[기독교강요] [제1권 13장] 삼위와 하나님의 동일성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16. 하나님의 동일성

더우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35 그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신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 : 19)라고 하신 이 엄숙한 명령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 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 한다는 사실이다.

실로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세례는 신앙의 성례전 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서는 세례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아리우스파가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서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다. 마케도니우스파36 역시 이와 같은 광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만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참조, 사 11 : 2) 그리고 은사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성령도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주장 한 대로 아무리 은사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같은 한 성령”(고전 12 : 11)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17. 삼위성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내게 대단한 기쁨을 주는 구절이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유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유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37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位)의 삼일성(三一性)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슥 13 : 7)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 : 32, 8 : 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요 1 : 3, 히 11 : 3).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도 아니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38 그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 : 18)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가 인성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벌써 그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요 17 : 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 : 26, 참조, 14 : 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 : 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18.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점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교부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39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활동의 시초가 되시고40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41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없다. 여기서는 동일한 영이 아무 차별 없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9절)으로, 때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11절)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고 증거하였으며(벧후 1 : 21, 참조, 벧전 1 : 11), 또한 성경은 자주 성령을 성부 하나님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9.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더우기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똑같은 영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재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요 14 : 10)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교회의 저술가들 역시 본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분할된다고 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구별을 제시하는 이 명칭들은 각자의 상호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 하나이신 실체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방법으로 생각 할 때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대 교부들의 견해가 조화를 이룬다. 저들은 어떤 때는 성부가 성자의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느 때는 성자가 신성과 본질을 스스로 소유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와 함께 한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42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ay) 제 5권 전(全)권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였다. 숭고한 신비 속을 교묘하게 파고들어가 많은 공허한 사색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진술한 그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욱 안전하다.

20. 삼위일체 하나님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두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43 즉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들의 독자적인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44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 : 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 : 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위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 , 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실례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 : 21, 욜 2 : 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 : 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전체적 본질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반(反)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21-29)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

더우기 사단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으로부터 뒤집어 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위(位)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하여 왔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은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의 그 왜곡된 헛소리들을 반박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나의 특별한 목적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었지, 강퍅하며 논쟁적인 사람들과 맞부딪쳐 싸우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지금까지 평화스럽게 해석되어 온 진리를 사악한 사람들의 모든 비방에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끝까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진실로 성경의 감추인 신비에 대하여 논할 경우가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마땅히 냉정하고 아주 신중하게 사색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적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45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도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왜냐하면,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증거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46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그를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께 맡기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아노모에오스파(Anomoeans)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아직 다섯 편이나 현존하고 있다.47 그러나 이 설교들은 그 건방진 궤변론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 보다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불행한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보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들의 이해력에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48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의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말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한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거추장스럽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헛된 일 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수와 같이 헛소리하는 너무나 많은 이단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전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무식자들을 불안하게 하며 혼란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실로 이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즉시 많은 분파가 생겨났으며,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위의 구별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입증된 대로 한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 이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해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자도 성령과 구별되신다는 점 등을 확고하게 고수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를 주장한 자들에 대하여도 문은 굳게 닫혀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르베투스나 그의 부류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저들의 오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삼위일체론자를 가리켜 보통 무신론자라고 불렀다.49 나는 여기서 그가 삼위일체론자들을 공박하기 위해 생각해 낸 몰상식한 말들을 생략하려고 한다. 그 일로 이것은 그의 생각의 전체였다. 즉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진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组)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위(位)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동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오심에 따라 그로부터 다시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불합리한 주장에 대해 비유로 착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 안에와 심지어는 나무나 돌 속에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중보자의 위에 대하여 그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실로 “위(位)”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구에 대하여 구태여 장황하게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50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여 놓았기 때문이다(요 1 : 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셨다고 하면(요 17 : 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광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재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우기 천지 창조 역사 이외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여기서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소개되었다. 모세는 혼돈한 덩어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창 1 : 2).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이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셔서 아주 조심스럽게 천지의 혼돈한 물질들을 유지하시며 또한 여기에 미와 질서를 가하셨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확실히, 세르베투스가 꿈꾼 것과 같은 하나님의 한 모양이나 표현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불경건한 사상을 더 공공연하게 드러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을 위해 눈에 보이는 아들을 작정하심으로, 자신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세르베투스는 실재(实在)를 환상물로 바꾸어 이를 변형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새로운 우연적인 특성들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거짓되게 첨가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아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보통 피조물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고 있는데, 이들 각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는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신자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동질적이며 영원히 하나님과 공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게까지도 실질적인 신격을 부여하였다.

23. 성자는 성부로서의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늪51에서 또 다른 비슷한 괴물이 나왔다. 어떤 악한들은 세르베투스의 불경건이 저지른 그 오명과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로 또한 당연히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셨다고 해석하였다. 실로 저들은 이 가공스런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한 “본질의 수여자”52이시며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그 가식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해서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다 우월하므로53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를 한 위격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답변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 : 7), (아직은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이니다). 그리고 더욱이 명확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격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성부 이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하거나 하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 : 1), 이 하나님을 가리켜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요 12 : 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거라고 증거하신 분도(사 8 : 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었다(롬 9 : 33).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사 45 : 23)라고 말씀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14 : 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하였다. 곧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2 : 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7 : 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므로(히 1 : 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께 옮겨진다고 하는 궤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명칭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 예레미야의 말 또한 주의할만하다 즉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렘 10 : 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때부터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 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물에게 존재를 부여케 하신 창조주가 어떻게 자존하지 않으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부터 빌어 올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성부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런데 만일 전체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든가 아니면 성자에게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든가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까닭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 되든가 또는 전체에서 끌어 낸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롬 8 : 9)고 한 바울의 증거에 의하여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체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은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성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였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하면 성부가 이 본질을 성자와 공유하였는가 공유하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답변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반만 신이라고 날조하는 것은 가증스런 죄악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곤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같이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공통된다는 사실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하면, 본질에 관한 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들이 해석한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 : 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제한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여러 구절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함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한 마디 말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논할 것이다.54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었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중보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성자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19 : 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人性)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이냐 선하지 않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들의 불경건은 그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것을 시인한다면 그들은 또한 자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신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주장을 한층 더 확증시켜 준다. 확실히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나는 또한, 바울은 하나님만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 : 17), 지혜로우시며(롬 16 : 27), 참되시다고(롬 3 : 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에까지 끌어내리는 가고 묻고 싶다. 태초로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우신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으시다는 말인가? 더욱이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당연한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마땅히 자기에게 꿇기를 정당하게 요구하셨다고 하면(빌 2 : 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금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0 : 3).

만일 그들이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고 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써 그들을 반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다는 점에 있었다고 교묘하게 구별짓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 또는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증보자의 전(全)인격에 까지 미친다 하더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에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하게 마무리지어 놓았다(빌 2 : 6-7). 실로 그가 여호와로 불리시고, 그룹들을 타시며(참조, 시 18 : 10, 80 : 1, 99 : 1) 온 땅의 왕이시며(시 47 : 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이 아무리 넋두리를 한다 하더라도, 이사야가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 : 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수는 없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내실뿐만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까지 회복시키시는 구속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이었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원작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본질이 다양하게 되든가 아니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만 이름만의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지만 성부 다음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 : 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자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하나님 안에 위가 여럿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모세의 이 언급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독자들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이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되게 속한다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자들에게 말씀 하셨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 반론을 즉시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 : 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는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란 명칭이 성부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하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은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나는 결론짓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 : 23).55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25. 신성한 본질은 삼위에게 모두 공통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56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에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位)라는 점에서는 발생된 분이 아니시다.

또한,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사위일체(四位一体)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하면 아마 그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제신(诸神)의 삼위일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이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하였는가 아니하였는가 라고 묻는 그들의 그 무가치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57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成员)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우리는 그가 성부로부터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옛날의 정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오직 위에만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본질을 이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불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 성령의 본질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동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면, 성부는 이때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반증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격의 근원이신 성부에게 한정된다고 대답했었다.58 물론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위격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위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웠다고는 하지만(빌 2 : 7),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춰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였다고 하였으나(히 2 : 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 : 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 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 : 28, 참조, 16 : 7, 20 : 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빛나는 광채의 그 완전함이, 육신을 입으신 자신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해 휠씬 뛰어나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 : 24,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셨으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들어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서는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 : 1, 요일 5 : 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제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이들 새로운 신(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그를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들은 마치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참되신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는 이입(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Irenaeus)에게서59 많은 구절을 수집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자들을 다루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현재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해야 할 경우,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누가 그는 사실상 성부였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은 종식을 고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3권 제6장을 읽으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2권 제46장에서 밝혀진 대로,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외에도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성자와 성부를 다같이 하나님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제3권 제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하나님이시며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제3권 제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세의 손을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분이라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합 3 : 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3권 제18장, 제23장). 제4권 제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읽게 된다. 그리고 같은 책 제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60

28. 터툴리안을 인용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들이 터툴리안(Tertullian)을 그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의 표현 방법이 때로는 거칠고 모호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애매하게 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삼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다만 위를 구별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가 말씀인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位)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그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는 성부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位)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Praxeas)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러한 구별에 대해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은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위격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그는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61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9. 교회의 모두 정평있는 교부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 였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를 지지한다.62 저스틴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 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할 것이다. 힐라리(Hilary)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더 예리하게 역설하였다.63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가? 아니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 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연결이 안 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64 그러므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그들의 파렴치함에는 더욱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게 된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회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와 이전 학자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 않았다.

이 악한들이 가장 적대시하였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들였던가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그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이론(异论)도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하였다.65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친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Christion Doctrine)라는 저서 제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어거스틴이 그때 자신을 망각하였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비난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여,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66

사탄은 온갖 궤변으로 오늘날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나는 이상의 고찰이 이와 같은 사탄의 일체의 궤변을 충분히 물리쳤다고 경건한 독자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만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은 충실하게 설명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무분별하게 헛소리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 1권 13장 하나님 말씀의 영구성

분명히 나는 내게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덕성을 열망하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다든가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는 그런 여러 일에 대하여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실로 발생의 계속적인 행위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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