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명 성경연구] 가이사랴 Caesarea

오늘은 성경 지명 성경연구 중에서 가이사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명연구 : 가이사랴 Caesarea

1. 지명

1) 별명 : ‘스트라토의 망대’라고 불리곤 했다.

주전 4세기경에 시돈 왕이었던 스트라토가 도시의 기초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2) 가이사랴 : 헤롯 대왕에게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이 땅을 주었고, 헤롯 대왕이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성의 이름을 가이사랴로, 항구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세바토스)라고 지었다.

2. 위치와 건설

1) 최초의 건설자 : 주전 4세기때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베니게인들이 마을을 만들었다.

2) 위치 : 지중해 연안, 욥바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갈멜산에서 약 37Km의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3) 건설 이유 : 헤롯이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과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서 건설하였다.

헤롯이 그리스-로마식 도시를 통해 비유대인들에 대한 자신의 지지와 관심을 보여 주면서 알렉산드리아와 견줄 만한 국제적인 무역항을 만들어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자신만의 항구를 가지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4) 건설 : 천혜의 항구가 아니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항구였다.

5) 건설 기간 : 약 12년에 걸쳐서 항구가 건설되었다.(주전 22-10)

6) 규모 :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방파제의 길이가 약 60m이고 폭은 약 6m에 달했다. 항구는 해안가를 따라서 약 400m가량 이어졌다.

3. 유적들

1) 침식 : 방파제를 비롯해서 해안가의 인공물들은 모두 바닷가의 침식 작용으로 바다 속으로 잠겨 버렸다.

2) 수도 시설 : 바위를 약 9.6Km 뚫어서 자연적인 관을 만들고, 다시 인공적인 관을 9.6Km 만들어서 연결하였다. 19Km 거리에서 물을 끌어다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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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생활에 필수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3) 창고들 : 해변에서 많은 수의 창고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창고 하나당 그 길이가 약 30m가 넘으며, 여러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창고들은 가이사랴가 항구 업무와 세관 업무에서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 준다.

4) 경기장들 : 길이가 약 300m, 폭이 90m가 넘는 규모로, 관람석만도 3만석이 넘는 대규모의 경기장이 발견되었다. 경기장은 가이사랴의 도시 규모가 얼마나 장대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원형경기장 겸 극장에서는 현재 매년 여름마다 ‘이스라엘 음악제’가 열린다.

5) 돌판 :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보고 내용이 담겨있는 돌판이 발견되었다. 이 돌판을 통해서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과 보고 내용이 밝혀졌다. 현재 이 돌판의 내용은 책으로 출판되어 나와있다

6) 비잔틴 시대의 가이사랴는 현재 가이사랴의 약 8배 정도 크기였으며 헤롯 시기 때는 현재 가이사랴의 3배 정도의 크기였다. 현재의 가이사랴는 십자군 전쟁 때 재건된 가이사랴이다.

4. 기독교 역사에서의 역할

1) 초대 교부였던 오리겐과 팜플리우스가 활동했던 곳이었다.

오리겐은 231-250년까지 약 20년간을 머물렀고 수많은 기독교 서적을 수집해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그 결과 기독교 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었다.

2) 초대 기독교회 사가인 유세비우스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5. 도시의 규모와 파괴

1) 다양한 인종 : 이곳은 항구였고 특히 무역항이었기 때문에 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 으며, 다양한 종교와 사상들이 쉽게 유입되고 섞이는 모습을 가졌다.

2) 인구 규모 : 건축의 규모와 유적들을 살펴볼때, 약 4~5만 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인구 구성 : 이방인들이 정식 시민이었고 유대인들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 비시민이었다.

4) 유대 전쟁의 시발점 : 종종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알력 때문에 폭동들이 일어나곤 했는데, 주후 66년경에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충돌이 유대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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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괴 : 619년 아랍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만 남았다.

6) 일시적 회복 : 1265년 십자군에 의해 탈환되어 아랍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6. 도시로서의 역할과 성경의 언급

1) 무역로 : 이집트와 베니게(페니키아) 사이의 중요한 무역항이었다.

2) 주후 6년부터 로마의 직속 통치령이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유대 총독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즉, 식민지 통치의 중심 도시가 된 것이다.

3) 빌립이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고 거주했던 곳이다(행8:40).

4)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준 장소이다(행10).

5) 바울이 다소로 도피할 때 이곳에서 다소행 배를 탔다(행9:30).

6)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기까지 여기서 2년을 지냈다(행23-26장).

성경지명 복음 말씀 가이사랴 빌립보

7) 헤롯이 벌리에게 먹혀 죽은 곳이 바로 가이사랴이다.

8)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원형 극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신이여! 신이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을 저지하지 않았고 그 결과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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