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장 성경 강해 말씀은 하나님의 영과 거짓 영의 분별을 촉구하는 말씀이 기록되었다.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6절, 영들을 시험하라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 . . .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영은 정신이다. 그것은 사상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 교리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말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들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하였나’라는 원어(에이 에크 투 데우 에스틴)는 ‘하나님께로서 나왔는가’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상, 어떤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상과 교훈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목사들과 교사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 사상과 아무 교훈이나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영들, 정신들, 그들의 사상들과 말들과 교훈들을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2-3절]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 . . .
요한은 또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요, 예수를[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을 말한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장에 증거된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 곧 하나님이신 그가 육신이 되셔서 곧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일을 말한다(요 1:1, 14).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이시다. 요한은 본 서신 5:20에서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기를, 그는 ‘참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 즉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영, 즉 하나님께로서 나오지 않은 영이며,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며 단지 그 교리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거짓된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대로(마 24:5, 11, 24), 그들이 사도 요한의 당시에 벌써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그 당시를 이미 말세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말세 의식을 가졌다. 앞에서 그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말했었다(2:18).
[4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즉 그들은 중생(重生)하였다. 또 그들은 저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이겼다.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 계신 이, 즉 성령께서 세상에 있는 이, 즉 사탄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요 1:13),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목사들은 사탄의 일꾼들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義)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4, 13-1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적그리스도의 영 즉 이단들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신천지 교회 등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과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 등이며,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 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운동 등도 하나님의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는 거짓된 사상들이며 운동들이다.
[5-6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 . . .
요한은 말한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저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서 나왔고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온 혹은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 사람들이 저희 말을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종교 의식을 행할 수도 있으며 또 심지어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말 곧 바른 교훈,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를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12-14,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 곧 주의 사도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즉 중생한 자들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 곧 바른 말,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듣는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별된다. 진리의 영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복음 진리의 말, 곧 전통적 정통 교리를 듣고 믿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미혹의 영은 우리의 바른 말과 정통 교리를 듣지 않고 인정치 않는 것이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영들 곧 정신들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정신들, 사상들, 말들과 교훈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 속한 바른 것인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가 사람들의 아무 정신들, 아무 사상들, 아무 교훈들을 따라가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로, 우리가 영들을 분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주신 복음 진리이다. 그것은 넓게는 성경이며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지엽적 문제에서는 이해와 지식의 부족으로 잘못 알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성경의 근본 진리들과 근본교리들에 있어서는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영은 중생한 자들, 곧 참 교회의 회원들, 양들, 알곡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중생치 못한 자들, 적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거짓된 목사와 교사들, 형식적인 교인들, 가라지들, 쭉정이들, 위선자들, 염소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셋째로, 우리는 중생한 성도로서 진실히 모든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 정통 교리, 성경의 근본교리들과 역사적 기독교를 다 믿고 그 진리를 보수하며 성경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의롭고 선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7-11절, 서로 사랑함이 마땅함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 . . .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육신적 사랑이 아니고 거룩한 사랑을 가리킨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정당성이 없는 미움과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죄악된 성질이며 행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런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즉 중생(重生)한 표가 되며 하나님을 아는 표가 된다.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 . . .
요한은 또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에서 밝히 나타났다. 본절은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가 그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 獨生子]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는 외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스스로 낳으셨다. 그 외아들은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적이다. 그는 사람으로 태어나시기 전에도 독생자이셨고 본다. 그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요 17:5). 하나님께는 영원하신 외아들이 계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두 가지 뜻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의미 즉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이며, 둘째는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될 수 있으셨는가! 어떻게 신적 본질을 가지신 그가 인간의 본질을 취할 수 있으셨는가!
교회의 정통 신조들의 표현대로,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은 혼합됨이나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신비롭게 결합되셨다. 그는 이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영혼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언제 죽었었는가? 아담의 자손인 온 인류는 그 영혼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엡 2:1). 죄의 값은 죽음이다. 여기에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기 위해 메시아의 대속(代贖)의 죽음이 필요하였다. 그는 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외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주시기 위함이었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본절은 앞절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실에서 우리는 참 사랑을 발견한다.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화목제’라는 원어(힐라스몬)는 ‘유화제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불붙은 진노를 가라앉히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제물’이는 말(힐라스모스, 힐라스테리온 iJlasthvrion)은 성경적 용어이며 성경적 개념이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유화제물, propitiation](KJV, NASB)로 세우셨으니.”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힐라스모스)[유화제물, propitiation](KJV, NASB)이니.” 노아 홍수 심판 등에서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며 그의 심판을 가져온다. 죄인들은 속죄의 피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또 9, 10절에서 세 번 반복된 ‘우리’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제한성을 보인다.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 . . .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이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의 뿌리 깊은 죄악성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마 18:23-35).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큰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들의 부족과 실수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7절부터 1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부정당한 미움과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나타낸다. 형제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가 중생하였다는 표시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표시이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독생자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은 독생자의 속죄사역으로 다시 살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였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12-16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
[12-13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 . . .
요한은 말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딤전 6:16).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형체를 갖지 않으신 영이시므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큰 불행이며,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큰 행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선한 품성과 그의 능력과 평강을 누리게 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게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이런 복된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그 사랑이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본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칭의(稱義)로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고 또한 성화(聖化)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칭의가 구원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과정에서 더 구원답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한은 3:24에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느끼며 체험하게 된다.
[14-16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요 3:16). 또 그 복음의 확실성은 사도들이 그 독생자를 직접 보았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에 있다(눅 24:46-48; 요 21:24; 행 5:32).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죄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 진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자의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일체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요 믿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시다(요 3:16; 롬 5:8). 사도는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하기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그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참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은 참 신앙고백의 증거일 뿐 아니라, 구원의 증거 즉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1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적 연합의 두 가지 증거에 대해 말한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요, 그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령을 통해, 즉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느끼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는가?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둘째로,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또 계속 그러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하고 또 그의 명령대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미움은 구원받지 못한 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자.
17-21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17절]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이로써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함으로라는 뜻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은 법적인 구원인 칭의(稱義)뿐 아니라 새 생활로 나타나는 구원인 성화(聖化)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는 성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다. 영화(榮化)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요일 3:2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사랑 안에 담대함이 있다. 이것은 또한 심판날에 가질 담대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형제를 사랑하면, 주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를 믿고 그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이 소망의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품 안에서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가면 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원어(콜라시스)는 ‘고통’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이 본문에 더 적절하다(KJV).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며, 거기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없고 평안과 기쁨이 넘친다.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은 또 말한다.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이다(신 6:5; 마 22:37-38).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0).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참으로 안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 . . .
요한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기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이 자주 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 곧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그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21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 . . .
요한은 말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절의 ‘이 계명’은 후반부의 말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은 두 가지 진리를 강조한다. 첫째로, 본문은 우리가 주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할 때 담대함을 얻고 모든 두려움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우리가 칭의의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여실히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고 또 모든 두려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순종은 큰 평안을 가져올 것이다.
둘째로, 본문은 특히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증거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의 계명의 내용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 이상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