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히브리어 단어 성경공부 중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은총 단어인 헤세드의 히브리어 단어 동의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히브리어 단어 동의어 연구
[동의어] (관련성구)
חמד(2530, 하마드)
몹시 바라다, 탐내다, 기뻐하다
하마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몹시 바라다, 갈망하다, 탐내다, 기뻐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몹시 바라다, 탐내다, 기뻐하다’를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시 39:11에서 그의 바람직한 것이나 기뻐하는 것을 묘사한다. 욥 20:2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시기를 원하셨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시 68:16, 참조: 시 106:24, 렘 3:19, 렘 12:10).
이사야는 메시야인 종에 대하여 우리가 원하고(하마드),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다는 것을 예언해야만 했다(사 53:2).
거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거만을 기뻐하는데도 불구하고(잠 1:22b), 기뻐하는 그러한 행위는 자신들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사랑하다” love와 동의어이다(잠 1:22a, 잠 12:12, 욥 20:20).
유다에게 있어서 이와 상응하는 것으로 우상은 “즐거운” 것(사 44:9), “바람직한 또는 기뻐하는” 것이 되었으나(사 1:29), 이러한 반응은 근본적으로 심리적인 것이며 다만 부수적으로 윤리적인 것이다(RTWB, p. 64).
그러나 부정적으로 십계명은 “너희는 하마드(탐하다 covet)하지 말찌니”라고 기술하고 있는데(출 20:17) 이것은 과도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이기적 욕망을 언급하는 것이다(BDB, p. 326).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장식한 금을 ‘원하거나'(신 7:25, ASV, RSV, “탐내지” covet) 창부를 갈망하거나(잠 6:25), 혹은 땅을 탐해서는 안되었다(미 2:2, 출 34:24). 여리고에서 아간의 죄는 그가 전리품을 탐한 것이었다(수 7:21).
2. 니팔형에서 분사로 ‘바람직한, 탐나는’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보기에 바람직한 나무를 나게 하셨다(창 2:9). 이 나무는 하와에게 지혜롭게 할 수 있는 탐나는 나무로 보인 것이다(창 3:6). 그녀가 지혜롭게 되기를 원할 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범죄했다.
하나님의 규례는 금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바람직한’ 보배, 즉 값비싼 보배가 있다고 한다(잠 21:20).
3. 피엘형에서 이 단어는 ‘매우 즐거워 하다’를 의미한다.
술람미 여인은 그 그늘에 심히 즐거워 하여 앉았다(아 2:3).
(참조: J. B. PAYNE; BDB).
[동의어] (관련성구)
חן(2580, 헨)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
헨(명남)은 하난(חנן , 2603: 호의, 은혜를 베풀다, 자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혜, 은총, 매력,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의 총애를 받다’ find favor in the eyes of라는 어구로 나오는 43회의 용례와 ‘주다’ give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7회의 용례, 그리고 ‘얻다’ obtain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3회의 용례(에 2:15, 에 2:17, 에 5:2)를 포함하여 69회 나온다. 따라서 이 단어가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는 14회이다.
이 단어는 결코 정관사와 함께 나오거나 복수로 나오는 경우가 없으며, 이 단어가 인칭 접미사를 취하는 경우는 단 한번 창 39:21에서 뿐이다.
이 단어의 대다수의 용례들은 일반적이며 신학적인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동사 하난과는 달리 관심의 초점은 수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의 수령자에게 있다. 이 동사와 그 파생어들이 번번히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편에서 헨은 오직 2회, 즉 시 84:11,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시며”와 신랑의 입술에 머금은 “은혜”에 대해 언급하는 시 45:2에 나올 뿐이다.
헨은 잠언에 13회 나오며, 종종 매력이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미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노이바우어(Neubauer)가 역설하였듯이, 이 어구가 나오는 많은 구절들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예를 들면 왕과 그의 신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야곱이 창 32:5, 창 33:8, 창 33:10, 창 33:15에서 사실상 자기 자신을 에서의 가신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이 어구를 전문적인 어구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이 어구는 이혼의 정당성에 관한 결정적인 구절, 신 24:1에서 발견되는데, 이 구절은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 사이의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랍비 아키바(Akiba)는 “‘만약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만약 그가 그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적 용법에서, 노아와 모세는 여호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언급된다(창 6:8, 출 33:12). 요셉으로 전옥에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창 39:21) 또 이스라엘인들로 애굽인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출 3:21, 출 11:3, 출 12:36) 이는 여호와이셨다.
민 11:15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라고 말하고 있다.
슥 12:10에서 여호와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헨과 타하누님의 심령”을 부어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타르굼은 “자비와 동정의 영”이라고 표기하며, 웅거(Unger)는 이것을 성령으로 간주한다.
슥 4:7에 나오는, 스룹바벨의 성전 완공 때에 외친 환호의 외침은 웅가르에 의해, “이것은 얼마나 은혜로운가(아름다운가)!” what gracefulness(beauty) it has!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셀린(Sellin)은 “잘한다, 잘한다!” Bravo, bravo! 라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수많은 구절들에서 헨은 ‘매력’ charm이나 호의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아히카르(Ahiqar)의 아람어 잠언에는 “사람의 매력은 그의 진실성에 있다”라는 어구가 나온다(ANET, no. 132, p. 429). 이런 호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의 배려이다. 즉 잠 3:4, 잠 13:15, 전 9:11, 전 10:12.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이런 은혜와 매력을 지닌 여자(잠 11:16, 참조: 잠 11:22)는 존경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단지 거짓된 매력과 헛된 아름다움만을 간직하고 있는 자와는 달리, 찬양을 받는다(잠 31:30). 나 3:4은 니느웨를 토밧 헨인 창부에 비유하는데, 이 히브리어 어구를 70인역본은 칼레 카이 에피카리스로 번역하며 불가타역본은 스페시오세 엣 그라테(speciosae et gratae)로 번역한다. 그 뜻은 ‘아름답고 즐거운’이다. NAB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fair and charming; NEB의 “아름답게 보이는” fair-seeming을 참조하라.
[동의어] (관련성구)
טוב(2896, 토브)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
토브(형용사)는 토브(טוב , 2895 )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0여회 나온다.
‘선한’은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으로 잘 나온다. 좋은 열매(창 2:9)와 바로의 꿈에 나타난 이삭(창 41:5, 창 41:36)은 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요셉의 노예상태가 “좋은” 것은 양식과 민족의 생존 같은 실재적인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선하지 못한” 모세의 재판에는 실제의 행정적인 불이익도 포함되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출 18:17).
토브로 전달된 다른 실제적인 선은 아합에게 거부한 승리의 약속(대하 18:7); 환대와 우정(창 26:29); 유익한 충고(삼하 17:7, 삼하 17:14); 일반적인 경제번영(왕상 10:7); 농업 번영(호 10:1, ASV);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암 9:4) 등이다.
그러나 국가의 풍기를 문란케한(느 5:9) 강포한 삶(잠 16:29)과 행동은 “선하지 못하다”고 일컬어 진다.
노동의 “선”은 일에서 얻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참조: RSV ‘기쁨’ pleasure).
“선”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추상적인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선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후손보다 더 낫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 56:5). 다윗이 제후인 아기스에게 충성한 것은 “선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 RSV ‘흠이 없는’ blameless).
엘리후는 진리나 타당성과 관련 지어볼 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동료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 보자”(욥 34:4).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 노를 더디 내는 것은 이상적인 용사의 폭력적인 힘보다 더 바람직하였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마찬가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아이는 고집 센 왕보다 “더 나았다”(전 4:13).
이 단어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창 6:2),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한다. 이 단어가 사람을 묘사할 때, 영어의 관용구는 ‘잘생긴’ handsome이란 말을 사용한다(삼상 16:12).
감각적인 기쁨이나 좋은 것은 “단”이라고 묘사하는 데에서(렘 6:20), 그리고 다메섹의 물이 요단의 흙탕물보다 더 “낫다”는 나아만의 판단(왕하 5:12)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의 한 포도를 묘사하는 데에는 감각적인 매력도 포함되어 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선한’은 자주 ‘행복한’ happy을 나타낸다. 이것은 왕이 결혼하는 때를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행복한 축제일은 “좋은 날”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RSV ‘휴일’ holiday; 참조: 삼상 25:8).
“좋은 마음”은 행복을 나타낸다(대하 7:10, 잠 15:15).
행복은 술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는 것 같다(전 9:7).
토브를 포함하는 관용어로는 선호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사람의] 눈에 선한”이란 용법이 있다. 이런 용법의 예들로는 도망친 노예가 어떤 곳을 거처로 택함(신 23:16, RSV “그를 기쁘게 하는 곳),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이 남편으로 택함(민 36:6)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삼상 3:18). 이것은 타락하고 죄에 가득찬 욕망을 묘사한다(창 19:8, 삿 19:24). 이런 경우에, 이 관용어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토브는 우수한 질이나 상재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단어는 하윌라의 “정”금(창 2:12)과 고급 향유(아 1:3, RSV “바르는 기름” anointing oils)를 묘사한다.
우수한 장인은 모세가 “준수하다” (즉 고귀하다)고 묘사되는 경우(출 2:2)처럼, 인간의 성품의 특성이나 고귀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지칭된다(사 41:7).
토브의 중요한 용법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 H15)라는 명령은 분명히 “선”을 도덕적인 악과 대조 시킨다. 하나님께서 다루기 어려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실 “선한 길”은 도덕적인 삶을 가리킨다(왕상 8:36). ‘선한’과 ‘옳은’을 뜻하는 야샤르는 종종 도덕적인 선을 뜻하는 유사한 말로 나온다(대하 14:1, 대하 31:20).
토브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어떤 용법들에는 앞에서 논의된 둘 이상의 의미의 영역들이 뒤섞여 있다. 옛 언약의 “좋은 땅”은 실제적이며,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신 1:25, 수 23:13).
마찬가지로, “선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개념도 “선한”이란 단어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시 106:1, 대상 16:34), 좋으신 주님이시다(시 52:9).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선의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1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논의에 비춰볼 때, 각 개별 용법은 앞의 의미들 중 어느 것이 가능한지를 고찰하기 위해 분명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수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특별한 취급을 필요로 한다. “선과 악”은 보편성에 대한 관용어로 이용된다(민 24:13, 삼하 13:22). 어떤 이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이런 보편성을 뜻하는 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사하였다(창 2:9). 그러나 창세기 앞부분의 문맥은 전체적으로 이 어구의 도덕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선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동의나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덕적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왕하 20:19, 참조: 삼상 20:7).
“선한 눈”은 관대함을 나타낸다(잠 22:9, RSV ‘관대한 눈’ bountiful eye ).
전도서에서, “선을 보다” to see good는 좋은 것이나 삶의 기쁨을 경험하다로 번역된다(전 5:18, RSV ‘기쁨을 발견하다’ find enjoyment; 전 6:6, RSV ‘선을 향유하지 못하다’ enjoy no good).
(참조: A. BOWLING; E. BEYREUTHER).
[동의어] (관련성구)
טוב(2898, 투브)
좋은 것, 물품(건), 선함, 번영
투브(명남)는 토브(טוב , 2895)에서 유래했으며, ‘좋은 것, 상품이나 물건, 선함, 유익, 번영, 행복’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2회 나온다.
(a) 투브는 ‘좋은 것’을 의미한다. 요셉이 그의 가족을 다루는데 있어서 ‘좋은 것들’은 먹을 땅의 소산이다(창 45:18, 창 45:20, 창 45:23).
사 1:19, 렘 2:7, 스 9:12, 느 9:35, 느 9:36에서는 먹거나 누리게 될 땅의 소산을 묘사한다.
투브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묘사한다(호 3:5, 렘 31:12, 렘 31:14, 시 27:13).
시 65:4에서 여호와의 집의 ‘좋은 것들’, 비유적으로 ‘영적 복’을 묘사한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b) 투브는 ‘물품(건), 재산’을 의미한다(창 24:10, 신 6:11, 왕하 8:9, 느 9:25).
(c) 투브는
① 목의 ‘아름다움'(호 10:11), 여호와의 백성의 ‘매력적인 미(예쁨)'(슥 9:17), 여호와 자신의 ‘아름다움'(출 33:19),
② 마음의 ‘기쁨'(신 28:47, 사 65:14),
③ ‘번영'(욥 20:21, 욥 21:16), 예루살렘의 ‘번영'(시 128:5), 의인의 ‘번영'(잠 11:10),
④ 맛과 지식의 ‘선함'(시 119:66)을 묘사한다.
(d) 투브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은 좋은 것들을 주는 분으로서 그러하다(느 9:25).
② 하나님의 선하심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시 25:7)은 친절이나 자비와 유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시 145:7에서 찬양의 대상이 된다: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사 63:7에서 마찬가지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③ 하나님의 선하심은 성도를 위해 쌓아주신 좋은 것들에서 나타난다(시 31:19).
(참조: BDB; TWOT).
[동의어] (관련성구)
נועם(5278, 노암)
즐거움, 유쾌함, 기쁨, 은총
노암(명남)은 나엠(נעם , 5276)에서 유래했으며, ‘즐거움, 유쾌함, 기쁨, 사랑스러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온다.
(a) 시 27:4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 시 90:17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묘사한다.
(b) 잠 3:17에서 “즐거운” 길, 잠 15:26에서 유쾌한 말에 대해 사용되었다.
(c) 슥 11:7, 슥 11:10에서 “은총”이란 의미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슥 11:7),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슥 11:10).
(참조: BDB; TWOT; HELOT).
[동의어] (관련성구)
רצון(7522, 라촌)
호의, 은총, 기꺼이 받아들임, 뜻, 의향
라촌(명남)은 라차(רצה , 7521)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총, 기꺼이 받아들임, 뜻, 의향’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회 나온다.
라촌은 세 가지의 주요한 의미를 나타낸다.
(a) 첫번째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은총’ 혹은 ‘호의'(신 33:16, 사 60:10, 시 5:12, 시 30:6, 시 30:8 등). 또한 왕들(잠언에만 나옴, 잠 14:35, 잠 16:13, 잠 16:15) 및 모든 사람들(잠 10:32, 잠 11:27 등)의 호의나 은총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b) 둘째로 이 단어는 ‘기뻐함’ 혹은 ‘받아들임'(출 28:38)이며, 항상 종교적 혹은 제의적 의미로 사용된다.
라촌은 선물이나 희생 제물의 ‘허용할 수 있음’ 혹은 ‘받아들임(열납)’을 묘사한다(레 1:3, 레 22:20, 사 56:7 등).
(c) 세번째 이 단어는 하나님 ‘뜻’과 같이 ‘뜻’이라는 특수한 의미에서의 ‘소원’ desire, ‘기쁨’ pleasure이다(스 10:11, 시 40:9 등). 더 많은 본문들이 사람의 ‘소원’ desire 혹은 ‘뜻’ will을 묘사한다(대하 15:15, 단 8:4 등).
야곱이 임종시에 한 축복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창 49:6에서 한가지 모호하고 난해한 용법이 나온다. 역본들은 독특한 독법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을 하였다. KJV는 “자기네들 뜻대로 그들은 성벽을 파내려 갔다” in their selfwill they digged down a wall, AV는 “그들은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they hocked an ox, RSV는 “그들은 제멋대로 소들의 오금을 잘라 절름발이를 만든다” in their wantonness they hamstring oxen, JPS는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소들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in their self will they houghed oxen이라고 번역한다(한글개역,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KJV가 히브리 논문을 가장 정확히 따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