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원어 단어 성경공부 중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은총인 헤세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은총은 두 가지가 있는데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חסד(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חסד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חסד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수 세기 동안 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mercy, 친절 kindness, 사랑 love과 같은 단어들로 번역되었다. 70인역본은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엘레오스(자비 mercy)라는 말을 사용하며, 라틴어 역어는 미스에리코르디아(misericordia)이다. 타르굼과 시리아 역본은 자주 ‘톱’의 동족어를 사용한다. 이 어근은 아카디아어에서나 우가릿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BDB와 GB에 이르기까지 사전들은 비슷하게 번역한다(Liebe, Gunst, Gnade, love, goodness, grace). 그렇지만 KB는 ‘함께 속한 …자들의 상호 의무’라고 정의한다.
엘보겐(I Elbogen)에 바로 뒤이어, 1927년에 넬슨 글루에크(Nelson Glueck)는 독일어판 박사 학위 논문을 고트샬크(Gottschalk)가 영어로 번역하여 「성경에서의 헤세드」(Hesed in the Bible)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에다 라루에(G. A. LaRue)가 쓴, 논의의 분수령이라는 서문을 붙여 출판하였다. 그의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짧게 말해서, 글루에크는 이스라엘이 헷족이나 다른 종족들처럼, 언약으로 신과 결속하게 되었다는, 점차 발전해가는 개념을 내세웠다. 클루에크는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는 분으로 묘사된다는 견해를 취하였다.
십계명 등은 언약의 약정들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승리는 언약을 지킨데 대한 보상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배교는 언약 위반이었으며 하나님의 헤세드는 기본적으로 자비가 아니라 그의 언약적 의무에 대한 충성이었으며, 이스라엘인들도 역시 이 충성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프트하우스(W. F. Lofthouse, 1933), 스나잇(N. H. Snaith, 1944), 로빈슨(H. W. Robinson, 1946), 우고 마싱(Ugo Masing, 1954)과 다른 많은 학자들은 실질적으로 그의 견해를 따랐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었다. 앗센션(F. Assension, 1949)은 그의 주장의 근거를 구약성경 본문들에 두면서, ‘자비’ mercy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스퇴베(H. J. Stoebe, 박사 학위 논문 1951, 또한 1952, VT와 THAT에 실린 논문들)는 ‘호의’ good heartedness, ‘친절’ kindness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였다. 시드니 힐스(Sidney Hills)와 케더린 자켄펠트(Katherine D. Sakenfeld)는 (The Meaning of Hesed in the Hebrew Bible, a New Inquiry), 헤세드가 예언적 용법에서 ‘신실성’ faithfulness을 포함하는, 자유로운 구조 행위나 구출 행위를 가리킨다고 총괄적으로 주장하였다(이러한 역사적 개념과 언급에 관해서는 Sakenfeld pp. 1-13[이하 Sak.으로 칭함], 또한 LaRue in the book by Glueck[이하 G.로 칭함]를 참조하라.)
필자는 십계명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있어,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진실하시고 그들에게만 충성을 요구하시어 언약 법령들인지, 아니면 이 십계명이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창조에서 나온 것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고 하나님께서 의로 심판하실 때 그 기준이 되거나 사건을 넘어서 사랑, 자비 그리고 친절을 보여주시게 될 영원한 원리인지에 관한 신학적 차이가 고려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단어 헤세드의 의미에 대해서는, 글루에크와 사켄펠드가 행했듯이, 일반적인 용법, 즉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다. 글루에크(Glueck)는 헤세드가 친족, 군대, 동맹자, 친구 그리고 통치자들의 윤리적 구속 관게에서 실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실제적이든 암시적이든 언약적 의무에 대한 충성을 가리킨다. 자켄펠트(Sakenfeld)는 똑같은 자료를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사실상 관계는 현존한다(사랑은 거의 언제나 주, 객 관계를 수반한다). 그러나 헤세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결정의 자유’는 필수적인 것이다.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며, 어떤 사람은 도와주는 위치에 있으며, 도와주는 사람은 자의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본문의 중심적인 특징이다'(p.45).
글루에크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의무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퇴베(Stoebe)는 THAT에서 헤세드에 대한 광범위한 취급법을 다루고 있으며(pp. 599-622) 열왕기상은 헤세드가 나오지 않는 실례라고 말한다. 벤하닷은 패하였다. 그는 어떤 의무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자비, 친절을 바랬다. 스퇴베는 야베스의 사람들도 인용한다(삼하 2:5). 사울은 패하여 죽었다. 사울의 시체를 보살핀 것은 분명히 자유로운 친절 행위였던 것이다.
라반이 리브가를 기꺼이 이삭에게 보낸 것도 언약적 의무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그렇지만 글루에크는 50절에서 섭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을 인용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던 친족에 대한 친절이었다. 그는 쉽사리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룻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룻의 행동을 계약상의 의무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그 내용은 손상된다. 여호와는 과부들이 모압에서 새 남편을 얻는 것에 대해 어떤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룻 1:8-9). 룻은 순수한 사랑으로 나오미와 함께 갔다. 룻 2:11-12에서 보아스는 그녀의 행동을 선하다고 인정하였으며 룻 3:10에서 그 행동을 헤세드라고 부르고 있다.
심지어 글루에크조차도 여기에서는 ‘친절’ kindness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라합의 행위는 친절이었다(수 2:12). 그녀의 왕과 도시에 대한 충성은 당연한 것이며 합법적인 것이다. 창 19:19에서 천사들은 롯에 대해 언약적 의무-혹은 어떤 의무도-를 거의 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창 19:16은 그들의 행동의 근거가 그들의 자비였다고 언급하고 있다(참조, 사 63:9). 창 21:23에서 아비멜렉은 그가 이전에 베푼 헤세드를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기 위한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더 많은 헤세드가 필요했다. 글루에크는 다윗과 요나단이 우정을 맹세했다고 기록하는 삼상 20:8, 14, 15에 대해 언급한다.
글루에크는 말하기를 이 언약이 헤세드의 근거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 점이 글루에크가 저지른 중대한 실수인 것 같다. 그는 언약이 관계의 근거 위에서 생겨난다는 점, 그리고 이 의무들이 언약보다 더 심오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삼상 20:17은 요나단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언약을 맺게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그를 위해 애곡한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을 것이지, 의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삼하 1:26). 다윗이 사울의 집에서 보인 헤세드는 요나단을 위해서이지, 법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삼하 9:1, 3, 7). 글루에크는 이것이 은총도 자비도 아니고, 언약적 충성에서 요구되는 형제애였다고 말함으로써,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특징을 무시해 버리는 것 같다.
이런 견해는 다윗의 성격의 깊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스퇴베는 이것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우정어린 태도(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한 마음씨[herzlich freundlich Gesinnung])의 자연스런 증거라고 부른다. 다른 예들은 생략될 수 밖에 없지만, 그것들도 이와 비슷하다. 모든 학자들은 에 2:9, 17에서 이 단어가 ‘호의’ favor, ‘친절’ kindness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용법이 포로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해 다룰 때, 문제는 물론 하나님께서 족장들 및 이스라엘과 언약적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헤세드는 모순없이 언약적 헤세드로 불리워질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증거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 심판, 충성 등이 언약적 심판 등으로 불리워질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본문들이 그의 헤세드를 언약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그의 영원한 사랑에 귀속시키느냐에 달려있다. 헤세드는, 돔 소르그(Dom Sorg, 참고문헌을 보라)가 주지한 바와 같이, 실제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에 대한 구약성경적 반영이 아닌가?
초기의 지배적인 용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속성을 선언하신 곳에 나온다. 즉 출 20:6은 신 5:10 및 또한 출 34:6-7과도 병행된다. 이 구절들은 G., Sak., 그리고 스퇴뵈에 의해 중요한 문서 분류의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는, Sak.은 이 모든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헤세드의 자유를 강조한다. 그녀는 이 단어들이 출 34:6-7에 나오는 ‘자비’ mercy를 뜻하는 단어들과 근사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문서에서보다 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의 이런 측면(그의 자비로서의 측면)이라고 말한다-이에 대하여 그녀는 상당히 상상력을 발휘한다-(p.119).
그렇지만 그녀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을 ‘언어적 문맥’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충성스런(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세드를 받을 것이며, 불충한(미워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p.131). 그녀가 이렇게 언약에 강조점을 두게된 것은 세속적인 조약들이 종주와 가신사이의 사랑, 형제애 그리고 우정에 대해 언급하므로, 따라서 이것들은 언약적인 말이며 적어도 언약이 암시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는 이전의 개념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왕이 언약적 효과를 얻으려고 사랑이란 말을 일반적인 용법에서부터 빌어왔기 때문에, 사랑이 언약적인 용어가 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가신들로 하여금 형제, 친구 그리고 남편처럼 처신하겠다고 약속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에 있어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이 그의 사랑의 표시요 표현이다. 맥카르디(McCarthy)는 더 알기 쉽게 말한다. 즉 ‘후대의 첨가없이 본문에 반영된 출애굽기 19-24장에 나오는 시내 이야기의 형태는 이 이야기가 언약 형태에 따르는 어떤 조직을 반영해 준다는 주장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의 견해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의식들이 ‘역사, 서약, 위협 그리고 약속 이상으로’ 일치를 가져오도록 인도했다는 것이다(McCarthy, D. j., Treaty and Covenant, Pontif. Bib. Inst., ed. of 1963, p.163).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본문 그 자체는 단순히 자기를 사랑하는(아하브)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줄 것과 반대된다는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비록 그의 특별한 돌보심, 게다가 그의 언약이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명령들의 문맥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헤세드가 이런 언약만을 가리킬 뿐, 그것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가설이다.
출 34:6-7의 본문은 보다 더 벅차고 엄숙하다. 이 본문에서는 큰 배교 이후에 이것이 행해진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모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찬 자기 계시였다. 자케펠트(Sakenfeld)가 여기에서 포로기 이전에도 ‘헤세드의 신학적 용법에는 죄사함이 항상(적어도!) 잠재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옳다(p. 119). 하나님의 자비와의 관련은 배교할 경우에 대한 말씀과 문맥에 확실하게 나타나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 라훔과 ‘노하기를 더디하다’라는 어구와 결합되어 있는 한눈(은혜 grace)은 이것들은 모두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그는 헤세드와 에메트에서(보다 후대의 것) 크시다. 그는 죄용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헤세드를 수 천 대까지 지키신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의 맹세를 지킨다는 사실만을 말해준다는 주장은 대단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약은, 그 서약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애정이 깊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켜진다.
자켄펠트(Sakenfeld)는 출 34:6-7에 의존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을 능숙하게 끌어모은다. 이런 구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즉 민 14:18-19, 느 9:17, 시 86:15, 시 103:8, 시 145:8(참조, 시 145:9, 10), 욜 2:13, 욘 4:2. 이 구절들 중에서 시 86:15만이 헤세드 뒤에 에메트란 단어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구절들은 모두 여호와의 사랑에 대해 언급하며 몇몇 구절들은 그의 용서하심을 언급한다. 어느 구절들도 특별히 언약의 근거에서 헤세드를 말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헤세드와 에메트(진리 truth)란 어구를 헤세드 안에 충성이나 성실의 개념이 있음을 옹호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어구는 약 25회 나오는데, 그중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약 7회 이상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중언법이며 한 명사가 다른 명사를 묘사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어구는 ‘신실한 사랑’ faithful love이나 ‘참된 친절’ true kindness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의미한다. 친절과 신실은 영어에서 매우 같은 뜻의 중언법이다. 이런 결합은 헤세드란 말 속에 언약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이 들어있음을 조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이 말 그 자체가 이미 그것을 의미했다면, 왜 ‘신실한’ faithful이란 수식어가 첨가되었을까? 일반적으로 헤세드만의 용법에서처럼, 반드시 충성이 뒤따라야 하는 것으로 표현된 언약은 없다. 이것은 왕상 3:3에서 추정된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시어 그에게 헤세드를 보여주신 것이 사실상 언약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또한 언약의 배후에 있는 그의 사랑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 본문은 이것을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돌리지 않는다. 스퇴베(Stoebe)는 시편 89편에서, 시 89:3의 언약은 시 89:2[H4와 3]의 헤세드)에 근거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THAT, p. 615).
또 다른 한 쌍의 명사로는 가까운 문맥들에서 어떤 다른 용례들과 함께 7회 사용된 언약(베리트)과 헤세드가 있다. 이것은 주요한 예는 신 7:9, 12로서, 왕상 8:23, 대하 6:14, 느 1:5, 느 9:32, 그리고 단 9:4에 반영되어 있다. 스퇴베는 이것을 출 34:6의 의역이라고 부른다(THAT, p. 616). 그는 신 7:8이 이미 하나님의 모든 은총의 기초를 그의 사랑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이러한 한 쌍의 명사들이 ‘언약적 사랑’ covenantal love이나 ‘언약과 사랑’ covenant and love으로 번역된다면, 이 사랑은 언약의 배경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렘 2:2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청년기의 헤세드는 신부의 사랑에 비유된다. 신부의 사랑은 약속의 근거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
헤세드가 또한 라훔(예, 시 103:4, 슥 7:9, 그리고 앞의 출 34:6-7을 참조), 헨(예, 창 19:19, 시 109:12), 탄훔(예, 시 94:18-19) 등과 같은 ‘자비’ mercy를 뜻하는 명사들과 짝을 이루는 경우가 약 15회 된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한다. 이 예들은 실제로 형용사적 관계에 있지 않은 한 쌍의 명사들로 나온다. 이것은 헤세드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해주는 단어들 중의 하나임을 시사해준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적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가 이런 관계를 헤세드로 표현하였다는 사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영원하였다(시 136의 후렴 부분을 주목하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그렇지만 에브라임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헤세드는 그렇지 않았다(호 6:4). 그렇지만 헤세드가 반드시 언약을 수반하는지 혹은 언약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스퇴베는 이것이 행위 뿐만아니라 태도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 태도는 사랑(라훔), 친절(토브) 등에 병행한다. 이런 태도는, 그 대상이 불쌍한 처지에 있을 때, ‘자비’ mercy(한눈)를 포함하는 일종의 사랑이다. 이 단어는 종종 ‘하다’ do, ‘지키다’ keep 등의 행위 동사들을 취하여 사랑의 태도 뿐만 아니라 사랑의 행동도 나타낸다. KJV의 ‘인자’ lovingkindness라는 말은 고어적이지만, 이 단어의 전체적인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R. L. Harris.] (p. 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