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2장 설교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을 통해서 멸망시켰는데 처참한 상황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이 모습을 보고 비통해 하고 있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 당했다. 회개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백성은 하나님이 징계하신다.
Ⅰ. 하나님의 진노하심 2:1-9
본문에는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 야곱과 이스라엘의 상태, 그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의 상태에 대하여 매우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의 가장 중요한 점은 나마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의 슬픔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는 점이다. 즉 그가 ‘진노하사’ 그들을 치신 것이다.
(1)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기뻐하사 자신을 친구처럼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교회에 대해 진노하사 자신을 원수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기한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랑으로 징치하시는 것은 쉽게 견딜 수 있으나 사랑으로 책망하시는 것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맹렬한 불이…야곱을 사르셨도다(3절). 하나님이 진노하사 이 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이 불을 붙은 것은 그들의 죄이다. 하나님은 인자한 아버지 같아서 자녀들이 화나게 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스스로 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가 되셨다.
아니면 적어도 ‘원수 같이’ 되셨다(5절). 그는 ‘원수 같이 활을 당기셨다.’ 또한 그는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시사’ 그들을 향하여 칼을 뽑아 겨누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그 백성들의 원수는 아니시다. 심지어 진노하실 때에라도 하나님은 노하심으로 그들을 바로잡으신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같이 되신다. 그 때에는 그들에 대한 모든 섭리가 외견상으로는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화평케 하시는 분으로서 이 불화를 제거하셨다.
(2) 이전에 하나님의 교회는 매우 빛났고 열방중에 뛰어났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두운 구름으로 가리우사 그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1절). 이 구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구름도 아니요, 성전을 덮어서 영광을 나타내셨던 구름도 아닌, 짙고 어두운 구름을 의미한다. 혹은 홍해에서 애굽인들 쪽으로 향했던, 구름이 이제 그들을 향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오른손을 거두시사’ 닥쳐오는 재앙을 그들이 피하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오른손을 거두셨는데, 길고 여로보암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손을 마르게 하셨는데 그 손으로 대적들과 맞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3) 이전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은 견고하고 요새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사 그것들을 ‘삼키셨다.’ 그것들은 철저히 파괴되어 흡사 삼키운 것처럼 되었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5절). 그것들은 당당하고 견고하며 부요하고 잘 보호되고 있는 성읍들이었으나 삼키워진 바 되었다. 그는 거처만 파괴하신 것이 아니고 요새까지도 모두 파괴하셨다.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다하셨도다.
의지할 것들이 모두 떠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의 근심과 애통은 더욱 더하여졌다. 이 점은 7-9절에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여호와께서…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하나님께서 스스로 불의 담이되사 막아 주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왕궁의 벽이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황폐하게 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날이 오면 그는 ‘줄을 띠어'(측량줄을 의미한다).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신다. 그 줄까지만 파괴되고 더 이상은 안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4) 이전에 그들의 국가는 매우 융성하여 그 근처의 힘의 균형은 그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반대로 되었다.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2절). 그들이 먼저 우상 숭배로 스스로를 욕되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러운 자로 취급하셨다. 왕과 방백들은, 이전에는 그 신분이 훌륭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신분을 범하기 힘든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게 되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기’ 때문이다(6절). 여호와께서 ‘왕과 방백들을 열방 가운데’있게 하사 그들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기셨다. 그들은 이전의 명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죄인들과 같이 가장 비천하게 취급당하였다. 죄로 인하여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그들을 낮추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 이전에 그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들 중에 임재의 표시를 남겨 놓으셨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해주었던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이 사라졌다. 언약궤는 그룹들 사이, 속죄소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가장 거룩한 징표였다(대상 28:2;시 99:5;132:7). 그곳은 쉐키나가 안식하는 곳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다. 언약궤는 갈대아인의 수중에 떨어지는 수난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물들이, 그가 떠나가시면 무슨 거치를 지니고 있겠는가? 하나님과 그의 왕국은 발등상이 없어도 존립할 수 있다. 거룩한 직분에 봉사하던 자들은 ‘처녀 시온의 장막’을 기뻐하였었다(4절).
그들은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었었다'(참조. 애 4:7).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살육되었고 ‘그들의 피는 희생 제물에’ 섞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성막이었다(이는 성막에서 예배할 당시 그것을 하나님의 전이라 부른 것과 같은 논리이다, 시 27: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헐어 버리셨다'(6절). 그는 성막의 말뚝을 뽑고 지탱하는 줄을 끊으셨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막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모독할 때 그들에게서 성막을 빼앗으심은 당연한 결과이다.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7절). 성소는 죄로 물들어 있었다. 죄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미워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전에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14)고 까지 하셨던 자기 성소마저도 미워하시는 것이다.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6절).
혹자는 이 말이 성전뿐만 아니라 공회당과 선지 학교까지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은 원수들이 불살랐었다(시 74:8). 절기와 안식일은 주의깊게 기억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시온 가운데서 절기나 안식일을 잊어 버리게’ 하셨다. 이제 시온은 파괴되어 안식일과 다른 날의 구별이 없어졌다. 매일 매일이 슬픔의 나날이었으며 모든 절기는 잊혀졌다. 제물을 거룩히 구별하던 제단도 버려졌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제사를 받지도 아니하시고, 그 제사로 인해 영광을 받지도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7절).
제단은 여호와의 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먹이시지도 않고 그들과 같이 먹지도 아니하실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와 율법사들을 가지는 축복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사이에는 율법이 없어졌다(9절). 백성들은 더 이상 그것을 읽지 않았고 서기관들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이 기록되어 있던 돌판은 언약궤와 함께 사라졌다. 그들을 율법책을 박탈당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였고 여호와께로 오는 묵시를 경멸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 이상 선지자와 묵시를 받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Ⅱ. 시온의 슬픔 2:10-22
본서가 애가로 불리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것은 에스겔의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던 것같은 완전한 슬픔의 표현이다(겔2:10).
(1) 그들의 슬퍼하는 모습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1) 항상 당당한 제복을 입고 다니던 재판관들과 행정관들이 그 옷을 벗고 애통하는 자의 옷을 입었다. 장로들은 이제 더 이상 다윗의 집의 보좌인 재판석에 앉이 않고 땅에 앉았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할 말을 잃고 ‘잠잠히’ 앉아 있었다.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2)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항상 쾌활하던 그들은 이제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3) 선지자 자신이 애통하는 자의 한 본보기가 된다(11절). 눈이 눈물에 상하며. 그는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예레미야 자신은 이웃들에 비하여 한결 나은 상태이며 오히려 전에 그 백성에게 당하던 때보다 훨씬 편한 상태였다. 백성들의 멸망이 자신의 구원이 되겠지만 그는 공공의 유익에 신경을 쏟아 개인적인 유익은 묻어 버렸다. 그는 흡사 자신이 이 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라도 된 듯이 ‘백성이 패망한’ 것을 애통해 하였다.
(2)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18절). 혹자는 이것을 쓰라린 고통의 외침이라고도 하나, 그들 대부분은 고통 중에서 진실한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숫군(사 62:6) 이 원수들이 포위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거나 성벽의 무너짐(성이 함락된 후 약 한 달 뒤에 무너졌다) 때문에 처녀 시온으로 하여금 애곡하게 하라.”
오랜 후에 느헤미야도 같은 이유로 애통하게 된다(느 1:3,4).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끊임없이, 쉬임없이 애통하게 하라.”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이 재앙은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슬픔의 원인도 자주 생길 것이다. 즉 새로이 슬퍼할 만한 일들이 밤낮으로 생길 것이다. 그들은 점차 무감각해질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교만하고 강퍅한 마음이 완전히 낮아지고 온유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혼에 고통을 더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슬픔의 원인에 대하여 설명한다.
1)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었다. 하나님은 얼마 전에 심한 한발로 식량 부족을 일으켜 그들을 바로 잡으셨었다(렘 14:1). 그리고 이제 그들은 엄중하게 포위하시사 기근을 극한 상태까지 몰아 넣으셨다. 따라서 어린 자녀들이 어미의 품에서 굶어 죽어갔다(11절). 이것은 19절에 다시 반복된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 자기 어미의 손에 죽어서 먹히운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20절). 이와 비슷한 사건이 사마리아가 포위당했던 때에도 있었다(왕하 6:29).
2) 많은 사람들이 칼에 살육당하였다. 칼은, 갈대아인들같이 잔인한 원수들 손에 있을 때에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 그들은 연령을 가리지 않고 아이나 노인이나 모두 죽였다. 그 칼날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똑같이 ‘칼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21절).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다. 다음에 나오는 말은 매우 가혹하다. 주께서…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이유는 그의 영혼이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시기 때문이다.
3)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았다(14절). 예레미야는 오래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애통해 하였으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렘14:13).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그는 이 말을 애가에도 삽입하였다. 그들의 묵시는 모두 그들 자신의 공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꾸며낸 그 묵시가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백성들이 그들을 세웠고, 그들이 말해야 할 바까지 알려 줌으로써 그들을 자기들의 마음에 합당한 선지자로 만들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말해 주고 그들의 죄를 보여 주어 회개하게 함으로써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선지자들은 만일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사랑과 그들의 지원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만일 백성들의 죄악을 없앨 수 있었다면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4) 이웃이 그들을 조롱했다(15절).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이 고작 이것이냐?(시 50:2) 어찌하여 이제는 온전히 추하게 되었느냐? 아름다움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5) 원수들이 그들을 정복하였다(16절). 예루살렘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던 이들은 이제 그들의 ‘입을 벌렸다.’ 아니 ‘입을 넓혔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경멸하고 모욕하는 듯이 ‘비소하고 이를 갈았다.’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이것은 우리가 행한 일이고 우리가 얻은 것이라. 이제 저들은 모두 우리의 소유물이라.”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아! 이것을 얼마나 가지기를 원하였던가.”
6) 이 모든 일로 보아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이키신 것처럼 보이셨다(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대하여 정하신 일들은 실상 그들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은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범하면 어떠한 심판이 내려질 것인지 말씀해 주셨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그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이미 선포하신 것을 집행하셨을 뿐이다. 이는 레위기 26:16이하와 신명기 28:15에 의한 것이다.
(4) 그들은 이 슬픔을 치료하기 위한 위안을 구했는데, 그 위안이 여기에서 처방되어진다. 그들은 위안을 구하였다(13절). 선지자는 이런 경우에 그들에게 말할, 적절하고도 수긍될 만한 어휘를 고르려고 애쓴다.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친구를 위로할 때 우리는 그가 당한 경우가 그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함으로써 위로하려고 애쓴다. 그런 경우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에는 그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으로 비교하여 너를 위로해 주랴.’ “어느 성, 어느 나라가 너와 비교할 만한 고통을 받고 있겠느냐. 아! 그런 곳과 그런 슬픔은 아무데도 없도다. 왜냐하면 너만큼 존귀함을 입었던 곳이 없기 때문이라.” 우리는 친구들에게 그 상황은 그리 절망적이 아니고 쉽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인간적인 견지에서 전혀 희망이 없다. 그 이유는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를 파괴하는 경우, 육지는 원상태로 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파괴된다.
“네가 상처를 입었으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인간의 어떤 지혜나 능력으로도 그와 같이 부서지고 흩어진 상태를 고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통상적인 강장제를 투여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여기에 처방된 치료 방법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이끌어 내어 회개하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그 상황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19절). 그 기도는 즉시 시작해야 하며 또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혼란과 절망에서 일어나 ‘밤 초경에 부르짖도록’ 하여라. 남들이 잘 때에 너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그 자비하심을 끈질기게 구하라.
밤의 4경중 초경에,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쏟듯 하여라.’ 마음을 열어놓고 자유롭고 완전하며 성실하고 진지하게 기도함으로 네 처지를 하나님께 모두 펼쳐 놓아라.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어 그를 향하고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라. ‘이 불쌍한 양 무리가 무엇을 했겠나이까’라고 말하라”(20절).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며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과 당신이 택하신 야곱의 자손이 아니니이까? 여호와여 저희의 상황을 살피시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