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장 강해설교말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음(약1:1-27)

야고보서 1장 강해설교말씀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성도는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면 안 된다. 세상 정욕에 빠지면 죄를 낳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심판 받는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Ⅰ. 문안 1:1

〔1〕이 서신의 기명을 통하여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절)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비록 그는 복음 전도자들로부터 ‘우리 주의 형제’라고 불리웠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와 혈육임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더욱더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통하여 우리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못한다면 그분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대한 섬김도 용납을 받지 못할 것이다.

〔2〕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1절).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로 흩어짐을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계시의 빛을 퍼뜨리시기 위하여 그들을 여러 나라에 흩으셨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흩어짐을 당했다. 이 일로 인하여 심지어는 그들 중에 있는 선한 사람까지도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해야 했다. 여기서 언급된 흩어진 유대인이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이라도 외국 각처로 흩어버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기 백성을 각지로 흩으실지라도 또한 그들을 돌볼 사람을 보내신다.

그러므로 이 편지 역시 한 사도가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쓴 것이지만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편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인 재난을 당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을 보내시기 때문이다.

〔3〕야고보는 이곳에서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안하노라. 이 사도의 간절한 바램은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게 되는 일이었다.

Ⅱ. 시련과 시험들 1:2-12

〔1〕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의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진실된 기독교인의 다수가 고통과 시련에 처해 있음을 시사한다.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도 아직은 심한 고통을 견디어야 한다. 선한 사람이 당하는 이런 시험들은 자기가 스스로 만들거나 또는 죄를 지어서 스스로 끌어들인 시험이 아니다. 그들은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그냥 시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2〕시험과 고난의 상태에서도 견지해야 할 의무와 덕이 무엇인가를 일러주고 있다.

1)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당할 때도 발휘해야 하는 덕 중 하나는 기쁨이다(2절). 이런 때 우리는 풀이 죽거나 슬픔에 빠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될 때 시험 때문에 무기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은 시련을 당할 때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고 가르치나 기독교는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으로 현재에는 우리의 덕이 높이 드러날 것이며 장래에는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난으로 우리 가운데 다른 여러 가지 덕들이 더욱 장성해질 것을 생각할 때 이것 또한 크게 기뻐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2) 그 다음에 지녀야 할 덕은 믿음이다(3,6절). 시련의 때에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에 대한 건전한 믿음과 그 진리에 굳게 매달리는 믿음의 수고가 있어야만 한다.

3) 반드시 인내를 하여야만 한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하나의 덕을 단련하는 것은 또 다른 덕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바르게 단련시키기 위하여서도 우리는 인내를 바르게 단련시키기 위하여서도 우리는 인내를 발휘해야만 한다. 금욕주의자들의 절제와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금욕주의자적인 절제를 발휘함으로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가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해질 수가 있다.

고린도전서 1장 설교문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책망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고 오히려 승리하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가 온전하게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는 그 명령을 모두 수행하고 또 우리에게 닥친 모든 고난을 견딜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게 될 때에만 비로소 인내가 온전하게 발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내의 역사가 완성될 때 기독교인은 완전해지며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게 된다.

4) 고난 중에서 힘써야 하는 것으로 기도를 권고하고 있다. 특별히 기도하여야 할 것은 지혜를 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고난이 우리에게서 떠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고난 가운데서 지혜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시험을 당할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서 빌면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즉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 하는 말씀에서 큰 용기를 얻어서 지혜를 구할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그분,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지혜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그분은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므로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아무리 큰 지혜를 구했다 해도 조금만 주어질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후히 주신다. 또 구하고 난 다음 자신이 어리석었지 않았나 하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지혜를 구하고 싶거든 얼마든지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꾸짖는 일이 없이 후대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구할 때 지켜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6절). 그것은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5) 고난 중에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의무는 마음을 오로지하고 구하는 의도에 성실성을 갖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6절). 믿음으로 솟아 올랐다가 불신앙으로 곤두박치는 모습이 바다의 물결과 매우 어울리게 비유되고 있다. 바다 물결이란 바람이 부는 강도와 방향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하며 불어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의 기도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불신하여 요동하고 정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요동하는 신앙과 마음을 가진 사람은 우리들과의 교제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8절).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교제와 행동이 매우 불안정하게 될 것이다. 바다 물결같이 요동하는 사람은 결코 잘되지 못할 것이다.

〔3〕부자나 가난한 자나 그들이 어떤 근거에서 자기들의 기쁨과 위안을 얻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9-11절).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형제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될 수 있다(10절). 은혜와 부가 전적으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둘을 함께 누리도록 되어 있다. 어떠한 삶에 처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라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낮은 자리에 처하고 은혜로 낮아진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존귀함을 대망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며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11절). 즉 뜨거운 태양열에 꽃이 시들듯이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해질 것'(10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한 자는 자기를 부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그 부한 중에서도 겸손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할 것이다.

〔4〕시험과 시련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하였다(12절). 이 축복은 단지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고난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 못한다. 그 고난으로부터 축복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험은 영원한 축복을 받는 길이 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2절).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란 이 말은 마치 금속이 불로 제련됨으로 그 우수함이 드러나듯이, 시험을 통하여 연단되고 단련됨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믿음과 덕이 참되다는 것과 참으로 지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게 될 때를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연단과 확고한 믿음의 정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연단과 확고한 믿음의 정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와같이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은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며 그가 받는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잠시동안 십자가를 지지만 영원토록 면류관을 쓰게 될 이다. 이 축복은 고난을 당하는 의로운 사람에게 이미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복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원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즉’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셨던 약속’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한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Ⅲ. 죄의 진행과 결과 1:13-18

〔1〕하나님은 어떤 경우라도 사람들로 죄 범하게 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때때로 시험에 빠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의 범죄를 책임질 하나님의 섭리는 전혀 없다(13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악에게 시험 당하실 수 없는 분인 것과 같이 친히 사람을 시험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죄를 범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며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악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덕을 함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2〕악의 진정한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따라서 그로 인한 책임은 어디로 돌려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14절). 악과 시험의 원초적인 근원은 각자의 마음 속이다. 비록 어떤 외부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화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불꽃이 더욱 거칠게 타오를 연소 물질들은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다. 죄가 진행되는 방법은 어떠한가. 먼저 죄가 다가와서 유혹을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선한 것에서 떨어져 악한 것에 끌리도록 유혹을 받는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점차 죄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설교말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 구절의 ‘끌려’라는 단어는 ‘억지로 세게 잡아 끌리다’라는 뜻을 나타내며 ‘미혹됨이니’라고 번역된 말은 ‘꾀임을 당하거나 기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권세와 능력은 그 교활함과 속임수를 발휘하지 않고는 결코 번성하지 못한다. 다음은 마음의 부패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15절). 우리 마음 속의 욕심을 고양시키는 죄는 곧 우리로 그 욕심을 승인하도록 만들므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잉태한즉’이라고 표현했다. 이 죄의 최종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절). 이 죽음은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3〕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각양 좋은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16, 1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개념 속에 잘못된 점이 없도록 특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유리하지 말라.”하나님은 어떤 악한 일도 지어내시지 않으시며 지어내실 수도 없는 분이시다. 오직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시요 원천이신 분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17절).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 내에 어떠한 변화할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속성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변화나 그림자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변화나 그림자는 다만 우리 자신들의 속성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모든 선한 것이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성의 빛을 주신다. 또한 학문의 빛도 주신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위에서 보다 직접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 선한 것은 결코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생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거룩하고 행복한 모든 결과들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18절).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된 피조물이다.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재주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즉 순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신 뜻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으로 하여금 효력을 발생하는 도구는 진리의 말씀이며 그 말씀 이외에 그 무엇도 이처럼 참되고 영속되며 위대하고 고귀한 결실을 빛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롭게 하는 은혜의 목적과 의도는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 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첫 열매시며 그리스도인은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는 것이다.

Ⅳ. 들음과 행함 1:19-27

〔1〕우리에게 인간적인 열정이 일어나는 것을 자제해야 함이 요구된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중생했다면 이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19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귀를 기울여서 듣고 그 내용을 숙고하도록 하라. 이것은 아마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언급되었던 고난과 시험에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면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고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하는가에 귀와 마음을 열고 듣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성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불화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일을 대할 때 우리는 쌍방의 이유와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말하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만일 말할 필요가 있을 때는 절대로 화를 내며 말해서는 안된다. 만일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리려면 먼저 자기의 감정을 다스려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하려면 성내기를 더디해야 한다.

〔2〕분노를 억제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주어진 것을 기억해야 한다(20절). 신앙의 반목을 쉽게 일으키게 하는 가장 악질적인 요소는 분노이다. 분노는 인간적인 산물이며 노여움을 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정반대 편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체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도 그의 뜻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3〕우리는 격노와 아울러 다른 여러 부패한 성향들도 억제하여야 한다(21절).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을 왜곡하는 모든 부패한 마음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내어버리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우리에게는 항상 경계하고 또 내어버려야 할 악이 내재해 있다. 그것이 바로 넘치는 악이다. 악한 성향은 제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에게서 내던져지고 버려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외면적인 죄악 뿐만 아니라 모든 죄된 생각과 성향 그리고 행실과 말 등 모든 더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4〕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대한 가르침이있다.

1)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준비하라고 당부하고 있다(21절).

2)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에 대해서는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대목(臺木)이 접가지를 받아들이는 것같이 그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을 때 대목의 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에 접붙혀진 복음의 본성에 따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온유한 마음으로 복종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태도이다. 또한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듣게 될 때 그것을 끈기있게 들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항상 우리의 구원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이다.

3) 말씀을 들은 후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22절). 말씀을 듣는 것은 행하기 위함이다. 말씀을 듣고 행함이 없다면 아무리 자주 그리고 아무리 주의깊게 말씀을 듣는다 할지라도 별로 쓸모가 없다. 우리가 들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또 단순히 듣기만 하는 자들은 자기를 속이는 자들이다. 자기 기만은 결국 가장 나쁜 속임수인 것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23, 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사용하는 방법은 사람이 자기의 생긴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사용하는 것에 비유하여서 배울 수 있다. 거울을 들여다 봄으로 우리는 우리 얼굴에 더러운 것이나 오점들이 있는가를 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말씀은 우리의 죄를 비춰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교정받아야 하고 무엇을 씻어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이 거울로 자신을 비춰 본 후에 돌아서서 자신의 오점에 대하여 또한 그것의 제거책에 대해서 잊어버린다면 헛되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듣지 않는 사람의 경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말씀을 마땅히 사용해야 할 거울로 사용한 사람들에 대하여서도 기록하고 있다. 복음은 자유케 하는 율법이다. 제의적인 율법은 속박하는 멍에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케 하는 법이다.

마태복음 2장 예수님 말씀 요셉의 애굽 도피와 나사렛 정착

이것은 온전한 법이다.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는 이 온전한 법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말씀 안에 계속 거할 때 우리는 의당 보아야 할 그 자유케 하는 법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법안에 거하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행함으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축복은 그 법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함으로써가 아니라 행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5〕우리가 어떻게 헛된 경건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순수한 경건과를 구별할 수 있는가를 일러주고 있다.

1) 헛된 경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 속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26절). 헛된 경건 속에는 과시하려는 것이 있다. 사람이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더 경건하게 보이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경건함은 헛되다는 표시가 된다. 또 헛된 경건 속에는 타인을 비방하는 것이 들어있다.

우리는 종종 자기를 좀 더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남을 헐뜯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렇게 험담을 하는 것이 벌써 그 자신이 헛된 경건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은 참다운 겸손의 덕을 지닌 사림이 될 수 없다. 자기의 혀에 재갈을 먹일 수 없는 사람은 겸손해질 능력도 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헛된 경건을 취하는 속에서 그는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경건이 헛된 것임이 드러날 때의 허망함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2) 참된 경건함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27절).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게 되는 것이 경건의 영광이다. 거룩한 생활과 자비로운 마음은 진정한 경건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 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야말로 진실로 순수하고 정결한 경건이다. 진실된 경건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행할 때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하도록 가르쳐준다. 참 경건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은 가난한 자와 슬픔 당한 자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서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27절).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이며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바로 깨닫게 된다. 만약 신앙에 대하여 두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이것으로써 고난 당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이다. 순결한 생활은 거짓 없는 사랑과 자비를 동반해야 한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절). 세상은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고 해치기 쉬워서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더럽혀지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참된 경건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정결하고 순수한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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