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3장 설교 말씀은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호세아와 결혼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용서하게 된다.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호세아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한다. 고멜이 음행하였는데도 호세아는 용서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인을 십자가에서 용서했다.
Ⅰ. 이스라엘의 결국 3:1-5
어떤 학자는 선지자와 결혼한 음녀가 열 지파를 나타내듯이(호 1:3), 본장은 두 지파인 유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열 지파였으므로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1)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스라엘의 악함을 관찰할 수 있다(1절). 이스라엘은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여인’관 같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경우와 같다. 그들이 우상에게 무릎꿇는 것을 삼갔다 할지라도 그들의 눈엔 영적인 음행이 가득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술병을 사랑했다. 그들은 희희낙낙하며 술에 만취되어 지냈기 때문에 우상 숭배자들와 어울리게 되었다. 우상 숭배와 육욕은 대개 붙어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악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치게 하지는 못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이 그렇다. 그것은 사랑없는 자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사랑을 수없이 빼앗긴 자들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낮추신다(2절).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즉 2:14과 같이, “내가 저를 저의 첫 남편에게로 돌아오도록 설득하였노라.” 그러나 선지자가 저를 사기 위하여 가져 온 선물은 매우 적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녀는 적은 액수로까지 낮추어짐으로 저의 교만에 대한 벌을 받았다. 이것은 이 여인을 매우 천하게 보이도록 했다. 여기서 선지자는 자기 아내를 은 열 다섯 개라는 적은 액수를 가지고 방문하였다. 그때는 저의 남편이 보기에 저가 처음 상태요 회복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된 때였다. 이 여인은 또한 곡물로 보리 한 호멜 반을 갖게 될 것인데, 그것은 이 여인이 충분히 겸손해질 때까지 기대해야 할 전부이다. 하나님은 전에 한 번 이스라엘의 몸값을 애굽에게 지불하셨었다(사 43:3,4).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행음하러 가버린 이상, 그들을 위해 은 열 다섯 개만 주실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불의로 말미암아 그만큼 가치를 상실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기꺼이 제안하신 새로운 협정을 보라(3절). 그들은 하나님께 백성이 되어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한 수치를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즉 “너는 홀로 되어 슬픔중에 있는 과부처럼, 나를 위하여 많은 날 동안 고독과 침묵 가운데 거해야 할지니라.” 그들은 그들의 장식품을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내와 복종 가운데서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우리 스스로 수치를 당하고, 또 그것들로 인하여 징계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 안에서 더 이상 범죄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포로된 땅에서 그 나라의 우상을 경배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것이며, 그것은 많은 날들 동안 그들에게 오랜 시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너의 근본을 지키고, 너의 순결을 철저히 보존한다면, 즉 이 모든 일이 너에게 임할 때 네가 이방 신에게 네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받을 자격을 얻게 되리라.”
(2) 마지막 두 구절에서 우리는 그 비유의 해석과 이스라엘에게 그 비유가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없이 지내다가. 이러한 형편에 있는 나라는 과부라 불리워도 지당할 것이다.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상 또는 기둥, 이 단어는 야곱이 세운 기둥에 사용되었다, 창 28:18;31:45;35:20),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낼 것이다. 즉 그들은 포로중에 국가나 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에봇이나 드라빔도 없을 것이다. 즉 합법적인 제사직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이 포로로 있을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비록 회당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성전 예배가 없는 오늘날 흩어진 유대인들의 상황은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오랜 기간 후에 다시 아내로서 받아들여질 것이다(5절). 그 후에.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그들이 이 연단을 통과하였을 때 그들은 되돌아 올 것이다. 갈대아 주석은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예배를 구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 메시야께 복종할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이것을 예레미야 30:9;에스겔 34:23;37:25와 비교하라. 그들은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할 것이다.
혹자는 여기서 그의 선하심을 성전으로 해석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성전을 바라볼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르호보암 시대에 이스라엘이 버린 것이 세 가지였다고 말한다. 즉 천국, 다윗의 집, 성전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나타내셨으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경외해야 할 여호와의 위대하심이며 아울러 그의 선하심이다. 즉 그의 엄위하심이며, 그의 자비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