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단어 교회 성경공부는 헬라어 엑클레시아의 단어를 통해서 교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무리지어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구원받은 백성 자체가 교회가 됩니다. 가톨릭은 건물을 우선하면서 교회라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건물 교회보다는 구원받은 백성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헬라어 단어 성경공부
ἐκκλησία(1577, 엑클레시아) 집회, 회중, 교회.
-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엑클레시아는 에크(ejk, ejx, 1537: …로부터)와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 call)에서 유래되었으며, 따라서 이 단어는 ‘불러낸 자들(의 전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유리피데스(Euripides)와 헤로도투스(Herodotus)(주전 5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고대의 용법에서는 폴리스(povli”, 4172: 도시 city)의 유자격 시민 전체의 대중 집회를 나타낸다. 이 집회는 5세기 경에 가장 큰 중요성을 갖고 정규적으로 모였으며(아테네에서는 일년에 약 30-40회, 그밖의 곳에서는 아테네보다 자주 모이진 않았다) 또한 임시 엑클레시아로서 긴급한 경우에 모였다.
이 공회의 활동 영역은 법률 개혁, 제안, 관리의 임명에 대한 결정, 그리고 적어도 공회의 전성기에 있어서는 대내외 정책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계약, 조약, 전쟁과 평화, 재정)을 포함했다. 특별한 경우에는 여기에다 재판의 임무가 추가되었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결과적으로 재판정이 되었다.
엑클레시아는 그 도시의 신들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림으로 개회 되었다. 이 모임은 그 당시의 법률에 의해 구속을 받았다. 모든 시민들은 연설할 권리와 토의해야 할 문제들을 제안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이 있을 때에만 그 안건이 다루어 질 수 있었다(Aristot. Ath. Pol. 45). 결정은 일정한 수의 찬성을 얻어야만 유효하였다. 참가의 권한과 이 집회를 소집하는 방법 그리고 투표의 방법 – 아테네에서는 손으로, 또는 박수 갈채로, 또는 무기명으로 판자나 돌에 쓰는 투표로 – 은 매우 엄격히 규제되었다. 이 집회의 통제는 프리라네이스(Prytaneis)의 의장에게 속해 있는 것이었고 주전 4세기경부터는 9인회에 위임되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번역과 신약 시대의 수세기 전에 엑클레시아는 분명히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규정되어 나타났고 특정한 규칙에 따라 그리고 특정한 범주 내에서 반복되었다. 엑클레시아는 전체 시민들의 집회로, 기능에 있어서 민주주의 구조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기본적인 정치적 결정과 사법적 결정이 내려졌다.
- 70인역본의 용법.
엑클레시아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나오며, 그 중 22회는 외경에 나오는데 그 3회는 히브리어 상당어가 없이 나온다. 엑클레시아는 거의 항상 히브리어 카할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하지만 카할이 항상 엑클레시아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엑클레시아는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3개절, 예레미아 5개절, 에스겔 15개절에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쉬나고게(회중,회당;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1개절, 에스겔, 예레미야 등에서 나옴), 쉬스타세이스(모임,연합;창49:6), 오클로스(군중, 다수; 렘 31:8; 겔 16:40; 겔 17:17; 겔 23:24 등), 플레도스(큰수, 회중, 무리;출 12:6; 대하 31:18)가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엑클레시아는 ‘집회 assembly’를 뜻하며, 따라서 ‘모임, 회집’이란 의미(참조: 신9:10; 18:16의 총회)와 ‘모인 자들, 회중’이라는 의미(왕상8:65의 큰 회중)를 가진다. 실제적 의미는 ‘모인 자들’ 곧 ‘집회를 구성한 자들’이다. 삼상 19:20의 “선지자 무리”라는 표현이 이를 지지한다.
신명기에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무엇보다도 시내산 언약을 맺기 위해 모인 회중을 의미하고 있다(신 9:10). 엑클레시아/ 카할은 여호와의 이름과 연결됨으로써 제한적인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엑클레시아 퀴리우: = 케할 예호와: 신23:2 이하; 참조, 대상28:8; 느13:1; 미2:5). 신명기(9:10; 10:4; 18;16)에서 케할 예호와의 결합이 정당화된 이유를 볼 수 있다. 야웨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처음 확립한 엑클레시아/ 카할은 시내산에 있는 회중이며, 야웨와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날이 욤 학카할 곧 집회의 날(총회의 날)이다. 야웨는 그들을 모두 하나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여호와께서 소집한 백성, 곧 여호와께서 주신 규례들에 구속을 받는 백성을 나타내며, 그들의 여호와 언약에 참여는 순종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또한 특별하고 엄숙한 집회의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솔로몬 성전 봉헌 때에 예배하는 공동체는 엑클레시아/ 카할이며(왕상 8:14 이하; 대하 6:3), 에스라가 율법책을 남자, 여자. 아이들에게 “율법을 낭독하고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했던 초막절의 집회(혹은 모인 회중)(느 8:2; 느 8:17), 히스기야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백성(대하 30:2; 대하 30:4; 대하 30:13; 대하 30:17), 국가적 위기에서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소집한 이스라엘 회중은 엑클레시아/ 카할이다(대하 20:5; 대하 20:14).
엑클레시아/ 카할이 30회나 사용되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역대기에서 종교적인 결정(법궤를 옮기는 것, 대상 13:2; 대상 13:4)이나 또는 제의적 행사를 포함하는 행사(대상 29:10)을 위해 왕이 소집하는 지도자들의 집회나 그런 집회에 모인 무리들을 모두 나타내는 대표적인 의미로 사용었다. 이(성전에 모인) 무리가 시편에서는 카할로 지칭된다(예를 들어 시 22:22; 시 89:7 “거룩한 자의 회중”; 시 149:1 “신도의 회중”).
그리고 엑클레시아/ 카할은 전쟁을 위한 사람들의 소집(참조:삼상 17:47)이며, 다른 종류의 소집은 중대한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 비상 집회로의 부름이다(렘 26:17; 렘 44:15; 삿 21:5; 삿 21:8).
우리는 포괄적으로 엑클레시아/ 카할을 전쟁을 위한 동원이나 시급한 사법적 모임과 같은 남자들만의 모임이든, 에스라에서와 같이 온 백성의 모임이든 특별한 경우나 행사에 소집된 집회나 회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모인 집회일 때 엑클레시아/ 카할은 그것에 참예할 자격이 있는 자들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신 23:2이하).
한편 카할이 다른 단어로 번역된 경우에 주로 종교적인 의미없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의 무리에 대해(쉬스타세이스/ 창 49:6; 쉬나고게/ 민 22:4),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렘 31:8; 플레도스/ 출 12:6; 대하 31:18). 에스겔서에서는 대부분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의 무리나 병력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겔 17:17, 애굽; 쉬나고게/ 겔 27:27, 두로; 겔 32:22, 앗수르).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대부분의 구절에서는 많은 군중에 대해 양적으로만 사용된다.
특히 쉬나고게는 창 28:3; 창 35:11에서는 백성 peopl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레 4:13; 민 15:15; 민 16:3; 민 16:33; 민 20:6; 신 33:4 등에서는 여호와께 속한 한 백성으로서의 성전과 율법에 중심을 둔 신앙 공동체의 집회(혹은 모인 회중 전체)를 나타낸다. 이 의미에서 카할/ 쉬나고게는 에다 쉬나고게의 의미를 가진다.
에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소속하며, 만일 그가 남자라면 정확하게 규정되고 한정된 분량의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는 영구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를 소집하는 힘은 법률로 규제될 수 있는 엄정한 출생에 의한 공동체의 힘이다. 에다는 성전과 율법을 중심하고 것에 의해 결정되는 전체 유대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가장 세속적인 자들이라도 율법과 성소와 어떤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L. Coenen, DNTT).
그러나 카할/ 엑클레시아는 언약을 맺음으로써 생겨난 회중, 시내산 공동체 사회에 대한 의례적인 표현이다. 이 카할/ 엑클레시아는 부름을 듣고 이를 따르는 자들만을 포함한다. 따라서 카할/엑클레시아는 야웨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특징지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문제가 제시되는 곳에만 사용된다, 확실히 카할/ 엑클레시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위대성이 암시되는 곳에서 특별히 사용되며, 아마 헬라인 독자에게 단지 당시 유대 사회의 정치적, 생래적 주장을 암시할 수 있는 곳에서는 사용을 회피하였다. 아마 이것은 공동체 사회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율법에 관한 구절들에서 카할이 쉬나고게로 번역되는 이유일 것이다(L.V.Rost, Op. cit., , 127).
카할이 신약성경의 엑클레시아로 발전한 것에 관해서, 우리는 이 말이 시내산에서 언약의 체결에 참예한 자들과 또한 에스라의 지도 아래 율법에 새로이 서약한 자들에 대해 사용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언약과,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적어도 에스라 시대에(참조: 이미 렘 44:15에서) 여인들과 아이들이 엑클레시아/ 카할에 속했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은 카할이 70인 역본에서 엑클레시아로 번역된 이유의 하나이다(K.L.Schmidt, TDNT). 사실은 카할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인들과 아이들도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허락된 기독교 공동체를 뜻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인 반면에, 쉬나고게는 그 요점이 남자들만의 참여와 관련되기 때문에 적합치 않은 용어이다.
-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엑클레시아는 신약성경에서 11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엑클레시아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뚜렷한 것은 이 단어가 마 16:18과 마 18:17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를 23회 사용한 사실은 적어도 누가가 예수님의 지상 활동 시기에 속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단어의 표현 중 대부분은 단연 바울 서신에 나오며(총 114회 중 46회: 에베소서의 9회와 골로새서의 4회를 포함)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에 22회 나온다. 이 개념을 특별히 구체화한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고 이 개념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특히 우주적 의미로 더욱 발전되었다. 이 단어는 베드로전후서와 디모데후서, 디도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야고보서와 히브리서에는 단절된 예문들만이 나오며 또한 요한삼서에서만 사용된다.
(b) 원시 공동체.
모든 복음서에 엑클레시아가 나오지 않는 것(마 16:18; 마 18:17은 예외)은 그들이 기록할 때에 이 개념이 당시의 통용하는 용법이 아니었다는 주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문학 형태가 바울 서신과 동시대 또는 보다 후기의 문학 형태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초대 기독교의 모든 제자들이 엑클레시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하심 후에 나타난 교제 모임을 나타내는 데에만 사용하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참조: O. Cullmann, The Early Church). 이 단어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기 또는 예수님 주위에 모인 제자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큄멜(W. G. Kummel)은 문헌상에서 볼 수 있는 이 단어가 역사적인 사실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기간 동안에 이러한 엑클레시아를 세우지 않으셨으며, 주의 만찬 의식 제정을 통해서 엑클레시아를 세우신 것도 아니다(“Kirchenbegriff”, Symblae Biblicae Upsalienses, I 1943, 23이하, 36).
그러나 교회의 의식이 원시 기독교 공동체 사회 초기에 싹트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근원은 제자들 중 일부가 부활 사건의 증인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곧 그들은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소식을 전할 사명을 위임받은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원시 공동체에 있어서 교회라는 개념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종말론적 상황에 대한 의식으로 특징 지워진다(참조: 고전 15:3이하). 그것은 이미 종말의 징조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시 기독교의 엑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전달하는 자, 그 자체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주권은 곧 임박한 재림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고 이미 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이 실감되고 있었다(참조: Cullmann, Op. cit., 특히 126이하).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이 세대에 속한 일부분에 불과하며 따라서 바실레이아(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Cullmann, Op. cit., 22).
(c) 마태와 누가
① 마 18:17의 문맥에서 엑클레시아는 한 장소에서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구성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메시야 예수님께 대한 충성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마 18:16; 참조, 신 19:15; 민 35:30). 마태복음 기자는 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질서의 요지를 추적하는 데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엑클레시아가 이곳에서 에다(회당 synagogue)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구절은 도덕률 폐기론적 경향을 지닌 회중에 대한 논쟁적 특성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마 16:18의 해석은 더 어렵다. 일례를 들어 이곳에서 엑클레시아의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의 정확한 상당어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이 문맥에서 미래형인 오이코도메소(내가 세울 것이다)가 예수님의 생애를 언급하는 것인지 또는 예수님의 죽음 후의 시기를 언급하는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베드로에게 부여된 역할은 우리가 초대 교회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서 단호하게 판단될 수는 없다. 갈 2:9에는 기둥들로 간주된 다른 사람들도 나온다. 행 11:1이하의 반대도 참조하라.
이것과는 별도로 예수님께서 지상생애 동안 교회의 터전을 예견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메시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무리 카할 곧 엑클레시아가 메시야적 공동체로서 메시야에게 속한 것일지라도 이 미래 시제는 예수님의 죽음 후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교회의 터전이라는 견해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존재한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해석 하기는 분명히 불가능하다.
“음부의 권세(사망의 권세들, 헬라어: 음부의 문들)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이 공동체가 죽음을 정복한 승리자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다.
② 누가에 있어서 교회 시대는 부활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구원사의 특별한 부분이다. 이것은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 곧 엑클레시아가 누가복음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행 5:11이후부터 16회를 사용한다(2장에는 나오지 않는다).
(d) 사도행전
처음 몇 구절(행 2:49; 행 5:11; 행 7:38; 행 8:1, 행 8:3; 행 9:31)은 매우 의미있는 구절이다. 행 8:1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해 듣는다. 행 7:38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을 엑클레시아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신 9:10을 언급하고 있을지라도 문자적 인용이 아니다(마소라, 카할, 70인역본 엑클레시아). 행 9:31에서 이 단어는 예루살렘 공동체 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공동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엑클레시아는 처음 단일 회중이었는데 이제 여러 회중을 뜻하므로, “회중”보다 “교회”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기억할 것은 본문 증거는 행 9:31에서 단수뿐만 아니라 복수도 지지하며, 따라서 헤 엑클레시아 = 아이 엑클레시아이이다는 것이다.
행 15:41에서는 복수가 더 좋은 것으로 인증되며, 단지 B Dpc에서만 단수이다. 행 16:5에서는 분명히 복수가 사용되었다. 다른 경우에 단수가 지배적이며, 행 11:22; 행 12:1; 행 12:5; 행 15:4; 행 15:22에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체, 행 13:1; 행 11:26; 행 14:27; 행 15:3의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공동체, 행 18:22의 가이사랴에 있는 공동체, 행 20:17-18; 행 20:28의 에베소에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행 14:23에 엑클레시아의 표현은 각 교회(church wise)를 뜻하며 아마도 복수일 것이다(루터: 회중들 congregations, AV, in every church).
특별히 의미심장한(시사적인) 말은 행 20:28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넷슬(Nestle은 시 73:2에 있는 병행구를 회상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엑클레시아보다 쉬나고게를 가진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70인역 쉬나고게)(시 74:2)
신약의 교회나 공동체에 대한 개념의 특징은 분명히 사도행전에서 온 이 구절들에 나타난다. 강조점은 서로 다른 지역들에 있는 회중은 서열이나 상호관계의 문제없이 단순히 교회로 부른 것이다. 지역 관계는 결정적 요점이 아니다. 이것은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앞의 언급에서 보여졌다. 강조해야 하는 것은 단수와 복수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엑클레시아가 엑클레시아이로 나누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엑클레시아의 총화가 엑클레시아를 만든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엑클레시아는 언급된 여러 지역에 존재하며, 이것이 서로 나란히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회중과 회중들”이든 “교회와 교회들”이든 우리는 항상 이해하고 번역해야 한다. 둘 중에 전자는 더 바람직하지만 우리는 후자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회중이 오늘날 전체로서의 공동체와 지역 회중을 구별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중요한 요점은 같은 단어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 회중과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 회중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장식용 형용어구(통칭)를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한정사는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부른다면 속격(하나님의)이다. 이 속격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라도 그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엑클레시아의 충분한 의미는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의 회중이나 교회는 항상 사회의 다른 형식(관행)과 대조하여, 그리고 심지어 반대하여 서 있다. 이것은 행 2:47에 있는 첫 언급에서 분명한 것이며, 그것은 라오스(laov”, 2992: 백성)나 코스모스(kovsmo”, 2889: 세상, 세계)보다 먼저(중요)하게 언급된다(D).
세 구절에서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로(행 19:32, 행 19:29, 행 19:40). 엑클레시아는 백성의 모임, 즉 세속적 집회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엑클레시아는 완전한 의미의 세속적 용어이다. 만일 우리가 동일한 단어가 동일한 저자에서는 일관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합당한 원칙을 따른다면 이것은 “교회”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역시 영어의 “회중”을 허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독일어 Gemeinde(참조: 대회, 집회)는 “정치적인”과 같은 어떤 선행하는 형용사가 없으면 보통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기반 위에서 우리는 우리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할지라도 세속적 집회와 교회의 집회를 구별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역시 단수와 복수의 분명한 연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복수는 모임이라는 의미의 집회를 의미한다. 결정적 요점은 어떤이나 어떤 것이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이는 자가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의”나 “주의”의 분명한 부가나 무언의 부가는 모이는 자나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자를 말해준다. 엑클레시아로 말해질 때(행 20:28)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모으시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엑클레시아에는 하나님의 것인 모든 사람들이 속해 있는 것이다. 행 5:11과 행 15:22에는 홀레(o{lh: 온 whole)가 분명히 부가되어 있다; 이것은 모임이나 집회라는 의미에 상응한다. 그것은 특별히 새로운 어떤 것을 가하지 아니한다.
그것이 단순히 강조하는 것은 엑클레시아 투 데우에 내포된 것을 강조한다. 세속적 엑클레시아와 대조해서 이것은 양적인 용어가 아니고 질적인 용어이다. 국가적인 집회는 존재하고 있고 존재한다고 하고 더욱 크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집회는 크기는 고려(기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소유를 모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참으로 먼저 교회는 부르고 모이게 하신 자를 믿고, 그 다음, 그 부름에 응답하여 함께 모이는 자들에 의존해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e) 바울서신(Ⅰ)
이 단어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사도행전에서와 유사하다; 참조: 바울 역시 단수형과 복수형을 자유롭게 사용하며(롬 16:23; 롬 16:4, 롬 16:16; 갈 1:13, 갈 1:22), 홀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롬 16:23), 장소(롬 16:1)나 구역(고전 16:19)을 언급한다. 때때로 관사의 생략은 엑클레시아가 거의 고유명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참조: 고전 14:19; 고후 8:23). 작은 가정 교회도 엑클레시아로 불리울 수 있다(롬 16:5). 각 지역 교회는 전체 교회를 나타낸다(고후 1:1, ‘고린도에 있는 교회’). 따라서 지역 교회에서 적용되는 것(고전 6:4; 고전 11:18; 고전 14:34)은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단수형이든(고전 1:2), 복수형에서든(고전 1:16) 투 데우가 중요한 수식어이다(이것은 바울이 때때로 그런 것처럼 교회와 교회들을 구분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기 때문에 엔 크리스토(갈 1:22)나 투 크리스투(롬 16:16)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표현을 번역할 때 ‘그리스도의’라는 말은 지나치게 색채가 없는 번역이다. 우리는 또한 고전 14:33에서 “성도들의 교회들”이라는 말을 발견한다. 고전 1:2에서 엑클레시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실제로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초기의 제자들과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구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엑클레시아 투 데우(하나님의 교회)이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모으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점에서 새로운 요소를 지닌다.
교회가 세워지고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제자들과 바울에 의한 카리스마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바울은 최초의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특권을 인정한다.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을 모금한 것(이것은 단순한 자선이나 전략적인 문제가 아님)과, 갈 2:9에서 야고보 등을 “기둥들”로 기술한 것에서 이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비록 그들의 인간적인 오류 및 권위를 지닌 자들을 지나치게 높이려고 하는 일부의 잘못된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는 욕구는 없었으며, 오히려 초기의 혁신적인 견해들에 반대하여 본래의 견해를 지키려고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만 기초를 두느냐,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느냐,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거부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바울은 교회에 대한 어떤 기술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회중들로 이해함으로(사도행전의 견해와 유사함) 이 문제에 대한 핵심에 이른다.
(f) 바울서신(Ⅱ):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이 두 서신에서 교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교리가 전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골 1:18, 골 1:24; 엡 1:22; 엡 5:23). 교회와 그리스도 간에는 협조와 종속의 관계가 있다(엡 5:24-25, 엡 5:29). 교회는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엡 5:27).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를 통해 알려진다(엡 3:10).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말한다(엡 3:4-5).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의 신비는 남편과 아내 간의 결합 모델이 된다.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의해 예증되어 있다(엡 5:25이하).
이러한 의미는 당시의 세계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즉 구속자는 하늘에서 강림하실 때 적대적인 세력들을 이기시고(엡 4:8이하), 분열의 벽을 허시며(엡 2:4이하), 새 사람을 창조하시고(엡 2:15), 교회를 그의 배우자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시며(엡 5:22이하), 교회를 그의 몸으로 세우신다(엡 2:19 이하). 이러한 개념들이 영지주의적 사변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롬 12:4이하와 같은 구절들에서는 거의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일관된 묘사로 융합되긴 하지만 그 중요성은 이론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이 개념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엄격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이 개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갈등과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 야기된 어려운 상황에서 고양된 그리스도론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와 사람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교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유대인들의 사상과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간의 교회보다는 그리스도와 지혜와의 결혼을 가정하는 영지주의의 과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 체계가 사용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관심사들은 전적으로 바울적인 것이다. 진정,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같은 서신들에는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러한 개념들이 나타난다(공식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 그러하다).
고린도전후서에 따르면 교회는 상호 연관되어 있는 몸이며(고전 12장), 바울의 목적은 교회를 그 남편에게 순수한 신부로 드리는 것이다(고후 11:2). 언어는 영지주의적일는지 모르나 요점은 교회가 단순한 인간 사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론은 그리스도론이며 그 역(逆)도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차이는 초월된다(골 3:11; 참조: 갈 3:28).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오직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은 지금 새 언약을 세우신 옛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집회는 구약성경의 회중이 완성된 것이다. 거룩이 공동체에 돌려진다면, 그 거룩은 하나의 특성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의롭게 해주시고 성화시켜 주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부여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의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취된 약속의 말씀이다.
(g) 야고보서와 히브리서
엑클레시아의 장로들을 언급하는 약 5:14은 이 단어를 분명히 유대 회당식으로 조직된 지방에 있는 회중을 나타내는 순수한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반면에 히 2:12은 시 22:22(히브리어 카할)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의적인 축제 모임을 의미한다. 히 12:23은 다르다. 이 곳에서 이 단어는 유대 전통에서 취한 일련의 종말론적 술어들(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안에서 나오며 엑클레시아 프로토토콘 아포게그람메논 엔 우라노이스(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로 한정된다.
여기서 문맥상 이 “총회”에 들어감은 “온전케 된 의인”과 교제, 또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가능케 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의 교제 관계에 들어감으로 이해된다. 이곳의 문제는 한 집단(아마 조직이라는 말로 한정될 수도 있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파네귀리스로도 나타내어지는 예배의 봉사; 참조: O. Michel)의 특성 묘사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또한 구약성경의 전문 용어(비록 엑클레시아가 이러한 모임을 나타내는 확정된 표현은 아니나)를 사용하며 새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방랑하는 백성”에 대해 묵시적인 존칭을 사용한다(E. Kasemann).
(h) 반면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엑클레시아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여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는 장성한 회중 집회를 의미한다. 행 22:16까지 엑클레시아에 관한 모든 언급은 2장과 3장의 편지 또는 그 편지들보다 앞인 1장의 일곱 촛대의 환상에 나타난다(계 1:4, 계 1:11, 계 1:20, 항상 아시아의 일곱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 이 편지들은 각각 일정한 장소에 있는 엑클레시아의 사자들에게 보내진다(테스 엔…엑클레시아스, 계 2:1, 계 2:8, 계 2:12, 계 2:18; 계 3:1, 계 3:7, 계 3:14).
이 모든 구절들에서 몇몇 중요한 사본들이 여격으로 쓰이는 토(tov)를 지명에 붙여 문법적으로 사자에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사자를 수호 천사와 전령으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회중의 본질적인 특성들의 구체화로, 따라서 역사적 실제와는 별개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한다(참조: E. Lohmeyer). 따라서 여기에는 회중에 대한 개념이 묵시적으로 과장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회중의 의미는 역사적 회중들임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이 역사적 회중들은 유혹과 직면하고 있었으며, 이 편지들에 의하면 그들은 결코 믿음과 순종과 거룩함으로 특징 지워진 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시험을 지속적으로 받거나 통과하게 되는 것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참조: 마 16:18).
각 편지에서 일치된 결론을 맺는 진술은 모든 다른 엑클레시아이를 묶는 특정한 지역 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말하여진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끝에 교회들에 대한 언급에도 적용된다(계 22:16). 여기서 유일한 차이는 계 22:16에서는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반면에 요한계시록 앞 부분에서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삼서의 세 구절들(요삼 1:6; 요삼 1:9, 요삼 1:10)은 모두 하나의 특정한 지역의 기독교인 회중을 가리킨다.
(참조: K. L. Schmidt; L. Coe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