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1장 설교 말씀은 학개 선지자가 유다 백성을 향하여 성전 재건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짓다가 멈추고 나서 성전을 황폐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했다.
Ⅰ. 성전 건축의 지연에 대한 책망과 권고 1:1-11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있는 동안 불평하였던 것은 ‘그들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했다’는 것이며 ‘선지자도 다시 없다’는 것이었다(시 74:9). 그것은 그들이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에 대한 심판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귀환할 당시에 어떤 선지자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구약 예언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 영광스러운 업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데, 학개는 하늘로부터 특별한 사자의 자격으로 나타난 그 첫 사람이었다.
이 선지자는 바사의 3대 왕인 다리오 히스타스페스 제 2년에 파송을 받았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학 1:1). 총독 ‘스룹바벨’은 다윗 집에 속한 ‘스알디엘의 아들’이었으며 포로 귀환 때에는 유대인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는 교회에서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들은 위대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사자라고 할 수 있는 선지자들은 행정이나 사역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더욱 효과적이 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1. 당시의 유대인들의 죄(2)
그들은 바벨론에서 올라오자마자 제사를 드리고자 단을 세웠으며 일 년 후에는 성전의 기초까지 놓았다(스 3:10). 그때 성전 건축은 급진전하는 듯이 보였으나 바사 왕궁의 금지령을 받게 되자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들은 권력의 압박을 받게 되자 그 권력에 굴복했을 뿐만 아니라, 대적들의 맹렬함이 누그러진 후에도 성전 건축에 대해 다시 마음을 쓰지 않았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의무에 대해 깨우침을 받기까지 이와 같이 계속 늑장부렸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주장하였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절). “우리의 손실조차 복구되지 않았도다. 우리같이 일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있어 교회 건축은 너무 큰 일이니, 그 일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집을 건축하자. 그동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단에다가 제사를 드리도록 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전혀 성전을 세우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 좋은 때가 올 것이라”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심판(6,9-11)
그들은 성전 건축을 중단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받은 형벌은 곧 그들의 죄에 대한 보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로 그들을 계속 궁핍한 가운데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성전을 건축하지 않음으로 면하자 생각했던 그 가난을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들에게 임하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과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 뿐 아니라 그의 손의 심판에 대해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는데, 이는 그의 마음과 뜻을 그의 말씀 뿐 아니라 그의 징계를 통해서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포로로 만들지 않으셨으며 이방의 대적들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들이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뿌린 씨가 결실을 맺도록 축복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많이 뿌렸다'(6절). 즉 많은 땅을 경작지로 사용하였다. 이는 그들의 땅이 오랫동안 묵고 있었으며 안식을 누렸기 때문이었다. 많이 뿌렸다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부터 많은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였다. ‘수입이 적되’ 매우 적었으며(6절),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적었다'(9절).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실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읽을 수가 있다(10절).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구름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구름들을 막으심으로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다. 따라서 ‘땅도 산물을 그쳤다.’ 왜냐하면 만일 하늘이 놋처럼 된다면 땅은 쇠같이 되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온갖 섭리를 통하여 우리로 우리의 필요한 것에 대해 민감하게 하실 것이며, 의뢰케 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이제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바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참조. 호2:21). 내가 이 땅에 한재를 불러 (11절). 즉 “기후를 극도로 뜨겁게 하여 땅의 소산들을 태우게 하였노라.” 태양의 열은 식물에게 생명을 주며, 봄에는 지면을 소생케 한다. 그러나 만일 그 열이 극도로 올라가게 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시 망쳐 버린다.
이 한재는 ‘산에’ 임하였다. 산은 높은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한재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산들은 목장의 양떼들로 뒤덮이곤 했던 곳이나 이제는 그들을 위해 풀조차 내지 않았다. 그 영향은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미쳤다. 즉 모든 것이 그 뜨거운 극한의 날씨로 말미암아 망쳐졌다. 그것은 사람들을 뜨겁게 하여 열병에 걸리게 하였으며, 육축들에게도 질병을 가져왔다. 그들이 먹는 양식도 그들에게 양분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곳간에 곡식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그것을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9절).
따라서 그것도 바닥나 버렸다. 그들이 그것을 식탁 위에 놓았을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또한 힘든 노동으로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에게 지불된 현금이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리라.” 그 전대는 아주 못쓰는 것으로 이는 무분별하게 낭비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너무 부족하고 비싸서 그들은 돈을 벌자마자 써버리게 된다.
(2)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게 되면 주리라고 약속하신 은총을 주지 않으셨다(욜 2:24).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실 정도로 격동시켰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집이 황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전의 기초는 놓여졌으나 그 건축은 계속되지 않았다. “각 사람이 ‘자기 집에 빨리 달려가’ 그 집의 수리를 마쳤으나 주의 집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도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세적인 일을 방해하심으로 우리가 역경과 실망에 직면케 된다면 그 까닭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일보다 자기 자신의 일을 더 구하는 자가 되었기(빌 2:21)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3. 선지자의 책망(4)
선지자가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성전 건축하는 일에 태만하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곧 아름답고 잘 장식된 집에 너희의 가족들이 사는 것이 가하냐?” 그들은 벽과 지붕만으로는 만족해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은 내 집에 판벽을 대기에 꼭 알맞은 때라”고 말하여 또 다른 사람은 “내 집은 페인트칠을 하기에 꼭 알맞은 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은 여전히 황무해져 있었으며, 아무데도 손질을 본 곳이 없었다.
4. 선한 권고(5,7,8)
선지자는 하나님을 경멸한 자들에게 선한 권고를 하였다. 이러므로 이제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5,7절). “너는 하나님을 진노케 만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너희의 회개를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셨다(8절).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레바논으로 올라가서 다른 건축 자재와 함께 나무를 가져다가 힘을 다해 전을 건축하라.” 그는 백성들에게 약속하신다.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든지 그 일을 마칠 수 있도록 충분한 격려를 해주셨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오랫동안 미루었던 자들이 마침내 진심으로 돌아온다면 그의 은혜에 대해 틀림없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Ⅱ. 말씀의 성과 1:12-15
앞의 설교에서 백성들의 성공을 대망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난 후 그들이 순종하자 곧 하나님의 격려가 임하였다.
(1) 그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총독 스룹바벨은 당시에 뛰어난 사람들 중 하나로, 현재의 태만함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과거의 공적을 내세움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인 여호수아 역시 기꺼이 충고와 교훈을 받아들였다.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였고’ 그의 명령의 멍에를 메었다(12절). 그들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임을 알았으며 그가 전한 말이 여호와의 말씀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12절). 예언은 그들에게 있어서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랫 동안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가 없었으나 이제 한 사람이 있게 되자 그를 특별히 존중하였다.
때때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 즉 훌륭한 설교가 매우 드문 경우 그 설교는 가장 훌륭한 것이 되는 반면 아무리 좋은 만나라 할지라도 그것이 비오듯 풍성하게 내리면 하찮은 음식으로 여겨 몹시 싫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이 선지자를 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두 달 새에 그들 가운데 또 한 선지자를 일으키셨다(슥 1:1).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자신들을 심판케 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셨다(14절). 그는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넓히셨다(시 119:32).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이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흥분시키셨고, 그들로 즐거워하고, 담대하게 하셨다. 그들은 매우 활기차게 그들의 일에 전념하였다.
각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이나 능력에 따라 그 선한 사역에 더욱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마음은 그를 위해, 그리고 그의 나라의 유익을 위해 힘쓰도록 더욱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학개가 이 설교를 한 것이 유월 초하루였는데, 3주가 조금 지난 그달 이십 사일에 그들은 모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서 부지런히 일하게 되었다(15절). 시간을 잃어 버린 자들은 시간을 보상할 필요가 있다.
(2) 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그들을 책망했던 선지자는 격려의 말로 그들을 위로한다(13절).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그가 말하고자 한 모든 것이었으며 또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즉 “지금까지 너희가 경시한 것을 내가 용서하리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적에게서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번영케 하고, 너희의 손을 강하게 하고자, 또 그 성전 건축 사역을 축복하고자, 너희와 함께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