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히브리어 원어성경 설교말씀은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했습니다.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 네 씨에 나오는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뭇별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후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창15:4-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창세기 12장에서보면 하란에서 떠나라 하시면서 언약을 맺습니다. 너로 인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 온지 10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원문에 보면 사래는 아이를 전혀 낳을 수 없는 불임자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는 여자가 시집와서 10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면 쫓아버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래를 사랑하는데 풍습에 의해서 쫓아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언약을 재 확인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해지고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약속을 재확인시키시는 분입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약속을 믿지 못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소망이 없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민하는 것을 갚아주고 보상해 주고 큰 상급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나는 자식이 없는데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시대는 자식이 없으면 집에서 키운 신실한 종을 상속자로 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래는 전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식을 본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엘리에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약속의 씨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세워나갈 수가 없습니다. 상속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야라쉬)입니다. 차지하다, 유업으로 받다, 상속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니라’ 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로)입니다. 이 단어와 결합하여 엘리에셀은 영원히 상속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천국을 상속받는 것은 반드시 약속의 씨에서 나온 자만이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약속의 씨에서 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이삭을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직도 믿음이 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인도합니다.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다시 보여주십니다. 밖으로 인도하여 보게 하시면서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도저히 셀 수가 없듯이 너의 자손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이끌고’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야차)입니다. 히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가게 하다, 끌어내다, 데리고 나오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이루어주시는 분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에서 ‘우러러 보라’ 라고 단어는 (히브리어 나바트)입니다. 이 단어도 히필, 명령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즐거움으로 바라보다, 주시하다, 희망을 걸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직접적으로 인도하여 하늘을 강권적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명령하셔서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즐거움으로 별들을 바라보고, 주시하면서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저 별들만큼 너의 자손들이 많아질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소망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갖고 생활하는데 세상에서 어려움이 닥치고, 인생에 환란과 시련이 불어 닥쳐서 예기치 않게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믿음이 떨어지고 연약한 모습을 내 자신이 볼 수가 있고 천국의 기업을 내가 물려 받을 수가 있을까? 라는 구원의 확신도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도전과 비전을 주셔서 다시 새롭게 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별은 셀 수도 없는 만큼 많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은 자식 하나 없습니다. 아내도 나이가 많은데 그것도 불임 자인데 어떻게 아이를 주시겠다고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는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기에 어려운 문제들도 하나님은 너무나 쉽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런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에서 ‘믿으니’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만)입니다. 히필, 완료,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대다, 신뢰하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왔다고 했지만 믿음 없는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자식이 없으니 엘리에셀을 자식으로 삼고 상속하겠습니다. 이런 믿음 없는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별을 보여주시고 내가 너에게 반드시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믿음도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강권적으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는 것이 미완료로 행동이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완료로 믿는 행위가 완전히 끝난 것을 말하면서 단수로, 개인적으로 믿음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대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대지 못했습니다. 어려움이 오거나 환경적으로 힘들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대야 하는데 자신의 생각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믿음,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믿음 이런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내가 만들어서 믿는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이것은 신념입니다. 신념으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신념은 결국 가짜 믿음이고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에 따라 변하고, 분위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시는 믿음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눈 앞에 와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롬 4:12-14)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 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으로 상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상속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할례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이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이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예수님을 구원주로 고백하지 못하고 마음에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해야 합니다. 내가 영원히 죽어야 할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렇게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것이 놀라운 사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 자신을 뒤돌아보면 하나님께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나에게 이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에 늘 감사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까지 주셔서 그 약속을 믿을 수 있게 하시고 장래 기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롬 4:19-24)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은 사라가 불임자라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약속을 이루실 것을 능히 믿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의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이 시간 주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창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럼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이끌어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하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 땅이 없으면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땅과 자손이 있어야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불러 낸 것입니다.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라는 말에서 ‘이끌어 낸’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야차)입니다. 히필, 완료, 1인칭, 단수입니다. 결실을 맺게 하다, 빼어내다, 옮기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르에서 강권적으로 뽑아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결실을 맺게 하시기 위하여 빼내시고,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천국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죄악의 자리에서 우리를 빼내시고 옮겨 놓으셔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악의 자리에 있으면 결국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히필형으로 나를 죄악의 자리에서 건져내시고 구원의 행위가 완료되어 천국의 자리에다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1인칭 단수를 사용함으로 구원은 개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천국에 옮겨 놓고, 죄악에서 뽑아낸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약속을 믿었더니 그것이 의로 여기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처럼 오늘 나도 내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나를 죄악의 자리에서 뽑아내어 구별시키시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게 하셔서 영원한 천국에다 나를 옮겨 놓았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영원히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원한 약속을 믿고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