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하나님 말씀은 천지 창조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빛과 궁창과 식물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1장: 천지 창조
1-5절, 첫째 날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본절은 단지 1장 전체에 대한 제목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실제적 시작을 증거한다. 그것은 원문 2절에 웨라는 말에서 확증된다. 그 말은 ‘그런데’라고 번역될 수 있다. 1절의 말씀이 단지 제목이라면, 2절은 ‘그런데’(웨)라는 말로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태초에’(베레쉬트)라는 말은 ‘맨 처음에’라는 뜻이다. 그것은 시간의 시작을 가리킨다.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 즉 존재 세계의 근원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계셨고 그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는 복수명사 형태이다. 이 말은 때때로 이방의 신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출 23:13; 왕하 18:33 등). 그러나 이 단어가 유일하신 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히브리어에서 복수명사는 복수 동사를 취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킬 때 항상 단수 동사를 취한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 복수명사 형태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이 크심을 나타내며 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암시할 것이다.
1절의 ‘천지’는 우주 공간과 땅의 원소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다음 몇 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창조된 천지는 아직 원시 상태에 있었다.
‘창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로서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무엇을 만드셨음을 잘 나타낸다. 사람은 이미 있는 재료로 집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든다. 재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또 사람은 이미 있는 자연법칙을 터득하여 전기도 발명하고 컴퓨터도 발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 외에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다(롬 4:17).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 대신에 물질이 있지 않았다. 물질은 근원적 요소가 아니다.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된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근원이시다. 그가 모든 것을 만드셨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며 가장 중요하고 큰 진리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계신 자’라고 계시(啓示)하셨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 .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있다, 존재한다’는 단어(하야)에서 나온 말로서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을 나타낸다.
시편 90편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기도하기를,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다(시 90:1-2). 이사야 40:28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렀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는데(계 22:13) 그것은 그의 영원하심을 나타낸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水面)에 운행하시니라.
본절은 원문에 웨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것은 ‘그런데’라고 번역될 수 있다. 본절은 창조 된 천지의 원시적 상태를 묘사한다. ‘혼돈’이라는 원어(토후)는 ‘형태가 없음, 혼돈, 공허’ 등의 뜻이며, ‘공허’하는 원어(보후)는 ‘텅 비어 있음’이라는 뜻이다(BDB). 창조된 땅은 아직 형태가 없고 텅 비어 있었다.
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깊음’이라는 원어(테홈)는 바다의 깊음을 가리키는 말이며(시 104:6), 이어서 ‘수면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깊음은 물로 뒤덮인 땅이나 수증기로 가득한 공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피조 세계에서 기본적 요소인 물은 창조된 천지의 초기 상태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어두움이 천지에 가득하였다. 빛이 창조되기 전까지 온 우주는 캄캄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영께서는 그 물 위에 운행하셨다. ‘수면에’라는 원문은 ‘그 물(함마임) 위에’인데, ‘그 물’은 앞에 나오는 ‘깊음’(테홈)을 가리키는 것 같다. 땅과 우주 공간은 물과 수증기로 가득한 상태이었던 것 같다. 그 창조 사역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물 위에 운행하고 계셨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우리의 구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어떤 이들은 본절이 천사의 타락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땅이 천사의 타락으로 혼란하고 공허해졌다고 추측한다. 그러면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천지 창조의 사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천지 회복의 사건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장의 구조상 1절은 첫째 날 안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창세기 1-2장과 출애굽기 20:11은 천지 창조가 엿새 동안에 된 것을 증거하며, 이것은 천사들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 세계의 기원을 말한다고 본다. 또 창세기 1:31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은 천사의 타락이 천지 창조의 제6일 이전에 있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 같다.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원문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된다. 창조된 천지가 아직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고 캄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다. 본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이나 나온다. 요한복음 초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계셨던] 말씀(로고스 lovgo”)이라고 불리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거되었다(요 1:3).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일하셨다. 그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시다. 인간의 말도 힘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그러하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풍성하게 기록되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며 이제는 한 책의 종교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근거이며 권위이며 내용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과 위로와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을 만드셨다. 그는 어두움의 세계에 밝은 빛을 주셨다. 빛의 정체는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는 대표적 빛인 태양빛 아래서 불빛이나 전기 빛을 보며 살고 있다.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빛 가운데서만 드러난다. 빛이 있어야 만물의 색깔도 있다. 어두움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검정색일 뿐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요일 1:5) 하나님의 세계는 빛의 세계이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무지와 죄, 슬픔과 불행을 상징하고, 빛은 지식과 의,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기쁨과 행복이 기대되는 세계이었다. 장래의 천국도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세계일 것이다(롬 14:17).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빛이 좋았음을 보셨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창세기 1장에 일곱 번 나온다. 이 말씀은 창조된 천지 만물의 본래의 상태가 선하고 아름다웠음을 증거한다. 창조된 세상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면, 그것은 사람 보기에도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죄와 불행은 본래 상태의 모습이 아니고 사람이 범죄한 후 상태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도 만드셨고 빛도 만드셨다. 빛과 어두움은 이 세상에서만 있다. 천국에는 밤이 없을 것이다(계 22:5). 이것은 교훈적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이것은 세상에 죄와 슬픔과 불행도 있고, 의와 기쁨과 행복도 있을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셨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빛과 어두움은 섞일 수 없다. 그것들은 본질상 서로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무질서를 싫어하시고 죄와 불의를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나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을 뿐 아니라,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나누신다. 그는 최종적으로 의인과 악인을 나누실 것이다. 마태복음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셨다. 낮과 밤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공간과 땅의 원질, 물, 그리고 빛을 만드셨다. 천사들의 창조도 첫째 날에 두어야 할 것 같다(욥 38:4, 7; 시 148:5; 골 1:16).
본 장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육일의 하루가 일상적인 24시간의 하루에 적합함을 보인다. 여기에 하루가 긴 시대를 가리킨다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무의미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고 그것을 기념하는 안식일이 일상적 하루이므로, 다른 육일도 일상적 하루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긴 시대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천지 창조의 처음 삼일은 태양 없는 날들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만드셨고 지구의 자전도 아마 시작된 것 같다. 그러나 현재 지구의 빛에 주된 공급원인 태양은 아직 창조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태양이 없이 저녁과 아침을 맞이하였다.
본문은 몇 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인생의 해답이시다. 인간에게는 ‘우주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등의 근본적 질문이 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 있다. 하나님께서 그 대답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 속에 그 대답이 있다. 우리도 모세처럼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1-2)라고 고백하자.
둘째로, 온 우주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물질 세계와 인간 세계는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사도 요한의 증거대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여기에 인간의 바른 위치가 있다. 사람은 피조물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셨다. 어두움은 무질서와 무지와 죄와 슬픔과 불행과 통한다. 그러나 빛은 질서와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과 통한다. 하나님의 세계는 빛의 세계이다. 현재 세상은 사람의 죄로 슬픔과 불행이 많지만, 구원은 의와 평안과 기쁨을 주며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나라일 것이다(롬 14:17).
6-13절, 하늘, 땅, 바다, 식물을 만드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신 천지 창조의 육일 중 둘째 날과 셋째 날에 하신 일을 증거한다. 둘째 날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이라 부르셨고, 셋째 날 그는 궁창 아래의 물이 한 곳에 모이게 하시고 뭍이 드러나게 하시며 그것을 땅이라 부르셨고 그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땅에서 각종 식물이 나게 하셨다.
[6-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6절에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는 말씀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고 번역해야 정확할 것이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날 그가 만드신 하늘은 우주공간이라고 생각되며 그가 만드신 땅은 아직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또 그가 만드신 원시상태의 천지는 물이 가득하였고 성령께서는 그 물 위에 운행하셨다. 이제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대로 궁창이 창조되었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나뉘어졌다.
‘궁창’이라는 원어(라키아)는 ‘큰 공간’이라는 뜻이다. 궁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궁창 위의 물은 무엇이며 궁창 아래의 물은 무엇인가? 궁창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좁은 의미의 궁창은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본장 20절은 거기에서 새들이 난다고 말한다. 구름은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인데, 낮은 구름의 높이는 해면에서 1.8km 미만이고 높은 구름의 높이는 10km 혹은 18km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땅과 구름 사이 공간인 궁창 위에는 많은 물들이 있다.
땅으로부터 100km 정도까지를 대기권 즉 공기가 있는 공간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공기의 99% 이상이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대기권도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맨 아래 층인 대류권에 구름들이 있지만, 대기권 전체에 땅에서 80km 높이까지의 공기 중에 평균 3.12%의 수증기가 있으며, 대기 중 수증기의 부피는 약 13,000km2, 무게는 약 14조 4,560억 톤이라고 한다. 참 많은 양이다. 또 바다와 육지에서 증발하는 수증기 양은 연간 약 519경 톤이며 이것은 1초 당 약 1조 6457억 톤이 된다. 이 수증기들은 비와 눈이 되어 땅 위에 내린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과연 궁창 위에 막대한 양의 물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성경에서 궁창은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뿐 아니라 하늘 공간 전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궁창은 하늘(솨마임)이라고 불린다. 그러면 이 하늘은 1절에서 언급된 하늘과 구별이 없는 것 같다. 또 본장 14절과 17절은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때의 궁창은 구름 아래의 낮은 공간으로서의 하늘이 아니고 높은 하늘이다. 달은 지구로부터 38만km 떨어져 있고, 해는 지구로부터 1억 5천만km 떨어져 있고, 별들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있는 궁창은 우주공간과 동일한 의미로 보인다. 이렇게, 궁창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보인다. 좁은 의미로는 땅과 구름 사이의 공간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우주공간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9-10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절과 2절은 땅과 물이 첫째 날 창조되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셋째 날 단지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땅이 제 모습을 드러나게 하신 것 뿐이다. 형태가 없고 텅 비어 있던 땅은 이제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또 바다도 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거대한 공과 같다. 지구의 볼록 나온 배를 적도라고 부르는데 그 둘레는 약 4만 75km이며 거기에서 지구의 중심까지의 거리는 약 6,378km라고 한다. 지구의 무게는 약 6섹스틸리온 톤이라고 하는데, 섹스틸리온은 10의 21제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큰 공과 같은 지구는 팽이처럼 돌고 있는데(이것을 자전이라 함), 한 바퀴 도는 시간이 하루 즉 24시간, 정확히 말하면 23시간 56분 4.09초이다. 또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서도 돌아가고 있는데(이것을 공전이라 함), 그것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이 1년 즉 365일, 정확히 말하면 365일 6시간 9분 9.54초라고 한다.
물이 한 곳으로 모이며 이 거대한 지구는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지구에는 높은 산들도 있고 낮은 언덕들도 있으며 넓은 평원들도 있고 깊은 골짜기들도 있다. 흔히 지구에는 여섯 개의 큰 대륙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이 그 여섯 대륙이다. 이것을 육대주라고 말한다.
이 지구에는 더운 곳들도 있고 추운 곳들도 있다. 지구에서 제일 더운 곳은 섭씨 58도나 되고 제일 추운 곳은 섭씨 영하 88도나 된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세 개의 층으로 되어 있으며 세 번째 층 즉 가장 중심층인 중심핵의 중앙에는 섭씨 약 5,000도의 뜨거운 불이 있다고 추측한다.
물들은 모여 바다를 이루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가 가진 물의 총량은 약 1억 3,600만km2이며 그것은 지구 전체를 약 2.7km 깊이로 덮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지구가 가진 물의 97.2%는 바닷물이다. 바다 중 대륙에 인접한 곳은 얕지만, 멀리 나가면 깊어지는데 깊은 바다는 보통 깊이가 5-6km나 된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깊은 바다는 깊이가 약 11km라고 한다. 흔히 지구에는 다섯 개의 큰 바다가 있다고 하는데,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빙양, 북빙양 등이 그것이다. 여섯 개의 대륙과 합하여 5대양 6대주라고 부른다. 땅과 바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이다.
[11-1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또 그날 하나님께서는 식물들을 창조하셨다. 식물들은 세 부류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풀(데쉐 grass)이요, 둘째는 씨 맺는 채소(에셉)이며, 셋째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츠 tree)이다. 물론 이 세 부류 안에 수많은 종류의 풀들과 채소들과 나무들이 있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상에 식물은 35만종 이상이라고 한다. 그 중 반 이상은 꽃을 피우는 것들이다.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 가장 작은 것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규조류(diatom)라는 것이 있고, 가장 큰 나무는 키가 88m이며 너비가 9m라고 한다. 나무의 수명은 길어서 가장 오래된 것은 4-5,000년된 것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3번이나 언급됨), 즉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만드셨다. 또 그 식물들은 그가 보시기에 좋았다. 식물의 세계는 아름다운 다양성을 지닌 세계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둘째 날과 셋째 날의 창조 사역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세상은 광대하고 오묘막측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땅은 광대한 우주의 작은 한 지점이다. 광대한 하늘, 광활한 땅, 신비한 바다를 갖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이 크고 오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지혜를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의 눈을 높이 뜨자.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자. 그리고 이 광대한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우리 하나님 만세.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 또 각종 식물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들이었음을 다시 생각한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자연만물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 문제이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한 것이 문제이다. 도덕성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다. 죄가 문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과 땅과 산과 들판들과 꽃들과 나무들과 풀들은 아름답건만, 성경의 증거대로 사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필요한 일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고 새 사람이 되어 선하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양성을 가진 세상을 만드셨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획일주의는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이 아니다. 식물 세계에 다양성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도 다양한 재능과 취미와 기술과 직업을 주셨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있고 그가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와 직분에 충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