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성경 좋은 말씀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건에 대해서 말씀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영원한 세계에서 이제는 눈에 보이는 유의 창조를 하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빛과 궁창을 창조하셨다.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와 땅 위의 식물을 창조했다.
I. 창조 역사의 시작과 그 대략 1:1,2
1. 창조 역사의 대략(1)
우리는 여기서 사도신경의 첫 조항, 곧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게 된다.
(1) 이 구절에서 다음 네 가지 점을 살펴 보게된다.
1) 창조로부터 나타난 결과 : 그것은 우주의 전 구조와 내용물이다. 세계는 위층과 아래층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집으로서 당당하고 장중하며 균일하고 편리한 그리고 각 방마다 지혜롭게 잘 꾸며진 구조물이다. 하늘은 그 밖을 장식하고 있는 영광스런 광명들로 우리 눈에 아름답게 비칠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영광스러운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첫째, 무한한 다양성을 볼 수 있다. 세상에는 특성과 구조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둘째, 무한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푸른 하늘과 녹음이 짙은 대지는 호기심 많은 관찰자의 눈에는 그지없이 매력적이다. 그럴진대 창조주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탁월하겠는가! 셋째, 무한한 정확성가 정밀성을 볼 수 있다. 자연의 작품들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그것이 다른 어떤 예술 작품들보다도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넷째, 무한한 능력을 볼 수 있다. 우주는 활동하지 않는 죽은 물질 덩어리가 아니다. 지구 자체에는 인력이 있다. 다섯째, 무한한 질서를 볼 수 있다.
존재들의 상호 의존, 정확한 조화를 이루는 운동들, 그리고 원인들의 놀랄 만한 연관성 등이 그 것이다. 여섯째, 무한한 신비를 볼 수 있다. 자연에는 해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에서 보는 것으로부터 위대한 창조주의 신성과 능력을 미루어 살필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눈으로는 하늘을 바라보고 발로는 땅을 딛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위대한 역사의 원인과 창시자 :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능력을 나타낸다. ‘엘'(El)이란 ‘강하신 하나님’을 뜻한다. 전능한 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발생케 할 수 있겠는가? 둘째, 하나님 안에 있는 위격(Persons)이 복수임을 나타낸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낸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여러분으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의 이같은 복수적인 명칭은 삼위 일체의 교리를 믿는 우리의 신앙을 모호하게 나타났지만 신약에서는 명백하게 제시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요 1:3;엡3:9;골1:16;히1:2).
3) 이 역사가 성취된 방법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즉 아무것도 없는 데서 하나님은 천지를 선재 물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기술자도 재료 없이는 일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는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은 자연의 법에 예속되지 않으신다). 또한 창조에 있어서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물질을 가정하는 것만큼 영원하신 지성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4) 이 역사가 발생한 때 : ‘태초에’ 즉 시간의 태초이다. 그때 처음으로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시간에 의해 측정 될 수 있는 존재들의 생성과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는 영원부터 계신 무한하신 존재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was)’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요1:1).
(2)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네 가지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첫째, 무신론이란 어리석은 이론이며 무신론자들이야말로 사실상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질 수 없는 세상이 있는 것은 알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으로 만물을 주관하시는 만군의 주이시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의 이름에 자기의 도움과 소망을 거는 자들은 복되다(시121:2,124:8). 넷째,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느 9:5,6).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면 모든 것은 당연히 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2. 창조 역사의 시작(2)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물질과 최초의 운동자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다.
(1) 혼돈(a chaos)이 최초의 물질이었다. 그것을 여기서는 ‘땅’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또한 ‘깊음’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의 광대함과, 처음에는 함께 뒤섞여 있었지만 후에는 땅에는 분리된 물 때문이었다. 창조주께서는 단숨에 그의 모든 역사를 다 이루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은 이러한 점진적인 진행을 통해서 대체로 그의 섭리와 은혜의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이 혼돈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첫째, 그것이 ‘혼돈하고 (흠정역에는’형체가 없고’-역주)공허하였기’ 때문에 그 속에 볼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즉 ‘혼란’과 ‘공허’만이 있었다(참조, 사 34:11). 하늘을 사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아래 세상은 윗 세상과 비교해 볼 때 여전히 혼돈과 공허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설사 볼 만한 어떤 것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볼 수 있는 빛이 없었다. 왜냐하면 ‘흑암’이, 짙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혼돈은 거듭나지 않은 타락한 영혼의 상태를 묘사한다. 거기에는 무질서와 혼란과 온갖 악한 역사만 있을 뿐이다. 그 영혼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능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복된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 영혼은 흑암에 쌓여 있게 된다.
(2) 하나님의 신이 최초의 운동자였다. 그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하나님의 신이 일하기 시작하셨다. 그가 일하시면 누가 혹은 무엇이 그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신으로 세상을 지으셨다고 말한다(시 33:6;욥26:13). 그러므로 바로 그 위대한 일군에 의해서 새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신인 깊음 위에 운행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시며 운동의 원동력이시다. 그가 죽어 있는 물질을 살리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영원히 죽은 채로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죽은 자를 부활시키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만든다.
Ⅱ. 첫째날 1:3-5
우리는 여기서 첫째날 창조 역사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다. 이 날의 역사를 다음 여섯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볼 수 있도록 창조하신 모든 존재들 중 제일 첫 번째로 지으신 것은 빛이었다. 우리는 그 빛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들과 그 속에 나타난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고 낮 동안에 우리의 일을 할 수가 있다. 빛은 무한히 아름다운 것으로 우주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창조에서도 영혼 속에서 발생하는 제일 첫 번째 것은 ‘빛’인 것이다. 복되신 성령께서도 지각에 빛을 비추심으로써 의지와 감정을 사로잡으신다.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이었던 자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의 빛이 된다.
(2) 빛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만들어졌다. 곧 그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빛을 원하셔서 명령하시자 즉시 빛이 생겼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속하고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되 본질적으로 영원하신 말씀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빛이 지어졌다. ‘그 안에 빛이 있었고 그는 세상의 빛이시며 참 빛이시기'(요1:9;9:5) 때문이다. 성화된 영혼 속에 비취는 신적인 빛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데 그 빛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도록 만든다(고후 4:6)
(3) 하나님께서는 원하신 빛이 생기자 그 빛을 만족히 여기셨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4절). 빛이 좋다면 빛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얼마나 좋으시겠는가! 우리는 바로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그는 빛과 어두움을 시간으로 나누어 빛을 낮으로 어두움을 밤으로 정하시고 서로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이어지도록 하셨다. 비록 어두움이 낮에는 빛 때문에 사라져 버릴지라도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어서 빛과 더불어 자기 차례와 위치를 차지한다. 아침빛이 낮의 일을 돕듯이 저녁 그늘은 밤의 휴식을 도우며 우리가 좀 더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주위에 어둠의 커튼을 드리운다.
(5)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서로를 구별할 수 있도록 각각 이름을 붙여 주셨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5절).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의 주로서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셨다. 낮과 밤이 변함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매일 낮에는 그를 위하여 일하고 매일 밤에는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함으로써 낮과 밤을 그의 영광을 위해 드리자.
(6) 이것이 첫째날의 역사이며 그것은 좋은 날의 역사였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5절). 이 날은 세상의 첫날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주간의 첫날이기도 했다. 필자는 한 주간의 첫날인 이 날을 영광스러운 날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가 한 주간의 첫날에 시작된 것과 같이 세상의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한 주간의 첫날 아침 일찍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여명이 그를 통하여 세상에 이른 것이다.
Ⅲ. 둘째날 1:6-8
우리는 여기서 둘째날 역사인 궁창의 창조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다.
(1) 하나님의 명령 : ‘궁창이 있으라.’ 궁창이란 히브리 말로 “펴짐”(expansion)을 뜻하는데 펼쳐진 시트나 드리워진 커튼의 모양을 나타낸다. 이 궁창은 칸막이가 된 벽이 아니라 왕래할 수 있는 길이다(욥 26:7;37:18;시104:3;암1:6).
(2) 궁창의 창조 : 마치 하나님이 궁창이 생기도록 명령만 하시고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모세는 ‘그리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셨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또한 친히 우리 안에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루시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과 성결, 사랑을 명령하시는 이가 또한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은혜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이루신다.
(3) 궁창의 용도와 목적 :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즉 구름으로 뭉쳐 있는 물과 바다를 덮고 있는 물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궁창에 창고를 두시고 거기에서 땅에 물을 주신다. 그를 섬기는 모든 자들의 편안함을 위해 이같이 준비하신 그는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4) 궁창에다 이름을 붙임 :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궁창은 보이는 하늘이며 거룩한 성의 도로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궁창 위에 보좌를 두셨다고 한다(겔 1:26).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늘이 높음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그와 우리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생각해 내야 한다. 그리고 하늘의 광휘와 청명함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위엄 그리고 그의 완전하신 거룩함을 생각해 내야 한다. 또한 하늘의 광대함과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땅에 미치는 그 영향력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우주적인 섭리를 생각해 내야 한다.
Ⅳ. 셋째날 1:9-13
지금까지는 창조주의 능력이 보이는 세계의 위 부분을 지으시는 데 사용되어 왔다. 하늘의 빛이 밝혀지고 하늘의 궁창이 고정되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아래 세상, 곧 사람의 자녀들이 거기에서 살며 생활하도록 계획하신 땅으로 내려오신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식탁을 펼 수 있도록 땅이 마련되는 기사를 보게 된다.
(1)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남으로써 땅이 준비되었다.
1) 땅을 덮고 있던 물이 물러가 한 곳으로 모이도록 명령을 받았다. 물이 이와 같이 한 곳으로 모이자 하나님은 모인 물을 ‘바다’라고 칭하셨다. 성경에선 물과 바다를 종종 근심과 고통을 의미한다(시 42:7;69:2,14,15).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이런 것들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단지 하늘 아래 있는(하늘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다)물결에 불과할 뿐이며 게다가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명하신 곳과 정하신 울타리 안에만 머무른다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2) 물이 물 밖으로 드러나 ‘땅’이라 불렸고 사람의 자녀들에게 주어졌다. 땅은 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물 아래 있었기 때문에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들 중 많은 것들이 땅 속에 묻혀짐으로 해서 헛되이 되는 수가 있다. 그런 것들은 밖으로 드러날 때에야 쓸모 있게 된다.
(2) 땅이 사람의 생계와 양육을 위해 설비되었다(11,12절). 그 당시 바로 필요한 양식은 밖으로 솟아 오른 땅의 직접적인 산물들에 의해 준비되었다. 땅은 비옥하여 가축들을 위해서는 풀을, 사람들을 위해서는 채소를 내었다. 또한 장래를 위해서도 양식이 마련되었다. 즉 모든 식물마다 ‘각기 종류대로 씨’를 갖고 있어서 사람이 땅 위에 계속해서 존속하는 동안 자기의 소용과 유익을 위해 음식물을 땅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다. 여기서 다음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1) 땅 뿐 아니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땅 뿐만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내용물의 당연한 소유주이시며 그것들을 마음대로 처분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땅은 본래 ‘공허’하였다(2절). 그러나 이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재산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2) 일반적인 섭리는 계속되는 하나의 창조 활동이다. 그 속에서 ‘우리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계속 일하신다.’ 땅은 지금도 여전히 풀과 채소를 내며 해마다 열매를 내리는 이 명령을 받고 있다. 이런 것들은 세상의 위대한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능력과 다함이 없는 선하심을 보여 주는 영구한 실례들이다.
3) 비록 하나님께서 보통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 제 2원인들의 기능을 사용하시지만(하나님은 제 1원인이시다)그럴지라도 그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시거나 거기에 얽매이시지 않는다.
4) 필요한 것들은 사용할 때가 이르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짐승과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그들을 위해 풀과 채소가 미리 마련되었다.
5) 하나님은 우리가 땅의 소산물로부터 얻는 모든 유익에 대해 홀로 그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