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연구 논문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21세기를 살아가면서 교회학교 교육에 대해서 우리가 전망해 보아야 한다. 주일학교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쇠퇴하고 있다. 우리도 알다시피 1970년대와 80년대의 주일학교는 황금기라 할 수 있다. 교회에 주일학생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일학교 학생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니 주일학교 학생의 숫자는 너무나 적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일학교를 교회에서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21세기 교회학교 교육의 전망
개요
먼저 한국 교회교육의 현주소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한편으로는 한국 역사에 민주화와 통일의 바람이 불고 열매 맺어 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백화점이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아들이 유산문제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양극과 같은 이 두 현상의 배후를 추적하면 모두 기독교의 영향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역사의 밑거름이 된 것도 기독교요, 자본주의적인 성공현상을 축복으로 교육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고 출세하는 것을 부추긴 것도 역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민주화를 이루는가 하면 속속들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오늘날 기독교의 이중적인 모습 속에는 한국 교회교육의 양극단의 문제를 보게된다. 또 그 안에 있는 진보와 보수,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교회 중심과 선교 중심의 양극화에 따라 교회교육도 그 내용이나 방법, 목표가 나뉘고 갈등을 빚어 왔다. 그 결과 진보교회는 소위 영성을 상실하고, 보수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상실하여 한국 교회 전체가 본래의 복음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상실하였다.
이런 현실이 교회의 대 사회적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교회의 성장률은 정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른바 신세대층)이 교회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런 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 전체와 지교회들은 교회교육에 대한 관심을 그 어느 때보다 크게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무기력한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상태다.
이러한 문제 위에 더 근본적인 위기가 불고 있다. 그것을 ’21세기 바람’이라고 하자. 21세기는 그 근본에서 인류의 삶의 형태를 바꾸어 놓을 것이며, 지금까지의 인류를 붙들고 지탱하던 기독교 신앙도 그 문명의 전환을 거치며 해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 교회와 교회교육에 불어닥친 위기들은 그 근본에서 21세기 문명의 전환과 맞물려 있다.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여 21세기에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로 설 수 있으며, 인류와 역사를 구원하고 해방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와같이 문제는 광범위하지만 여기에서는 범위를 좁혀서 교회의 교육문제를 진단하면서 21세기 교회의 모습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한 문제를 평가하고 전망하는 일은 그 자체가 큰 작업이므로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것을 동시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Ⅰ. 21세기를 대응하는 자원들
1. 역사적인 경험들
지금 정체 상황을 맞이해서 교회들이 당황하고 있지만 분명 우리 역사의 현대사에 교회교육은 큰 영향을 주었다.
1) 민주적 역량 형성
한국의 민주 발전은 교회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모든 단체와 교육 기관이 획일화 되고 군사화 되는 때에도 교회학교는 자치회를 통해 토론과 투표문화를 키워서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중적인 운동의 주체세력을 형성하였다.
2) 건강한 문화 형성
한국의 현대사에서 교회교육은 중요한 문화의 생산처 역할을 하였다.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연극, 노래, 무용과 같은 예술 활동이 이루어졌고 청소년의 사귐,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으며 문학의 밤, 성가제, 레크레이션 활동을 통해 문화의 산실 역할을 담당하였다.
3) 인권, 통일, 당면 운동의 중심체
한국 교회의 교육은 꾸준히 이 민족의 생명 살림을 위한 교육의 사명을 감당하여 왔다. 성서의 평등과 화해 정신에 기초해서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 만이 아니라 지교회의 교육과 예배의 자리에서 인권을 위해, 통일을 위해, 또 생태계 문제 등을 신앙의 삶으로 교육해 왔으며 이 운동들이 1990년대에 희년 운동으로 수렴되고 있다.
4) 약자(민중)에 대한 집중적 관심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오늘날 주장되는 세계화의 정책은 국민 경제를 향상시킨 반면 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약한 이웃들에 대해서 교회는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민중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두게 하였다.
2. 진보적인 교회교육의 유산들
우리 역사에서 교회교육이 그 창조적 과제를 다 할 수 있었던 교회교육의 내용들, 동시에 21세기에도 창조적으로 작용하게 될 전통들이 있다.
1) 성서적 해방 전통 위에 선 교육
성서 안에서 줄기차게 흐르는 하나님의 해방 활동을 발견한 것으로부터 개인구원을 포함한 전 사회구원, 더 나아가 온 피조물의 구원을 증언하게 되었다. 21세기에도 이 해방 전통은 중요하다. 다가 올 21세기에도 기계로부터, 또는 사이버 공간에서부터, 혹은 개인의 고립에서부터 약물로 인한 환각의 세계에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선교에 뿌리를 둔 교회 교육
그 동안 교회교육은 교회는 세상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임을 자각하고 흩어져 세상을 섬기는 일꾼 교육을 해왔다. 즉 하나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는 훈련을 해 온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선교에 기초한 교회교육의 강점은 진리를, 복음을 화육시켜서 이 세상에 유용하게 활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21세기라는 새로운 상황에서도 복음을 새 시대에 맞게 화육 시킬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3) 우리의 문화 역사 위에서 행해진 교회교육
그동안 우리의 교회교육은 신토불이를 추구하여 왔다. 우리의 영성, 문화, 삶의 양식을 복음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해왔다. 우리 민족의 절기를 우리의 신앙절기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우리 민족의 경험 속에서 신앙고백을 하기도 하였다. 21세기는 획일화나 서구화된 것이 가치표준이 되는 사회가 아라 개성, 즉 자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그 가치와 효능을 인정받고 비로소 세계적인 것이 되는 시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신토불이를 추구해온 교회교육은 21세기 개성과 다양성의 세계를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4) 에큐메니칼 전통 위에 선 교육
한국의 교회교육은 신토불이를 추구하면서도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세계와 함께하는 에큐메니칼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교육은 우리의 역사 속에 있으면서도 끊임 없이 세계 교회와 또 세계 문제와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삶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늘 새로운 시대를 감지하고 제시하는 예견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21세기의 문제와 흐름을 우리는 감지하고 함께할 능력이 있으며, 21세기를 가지고 토론하며 씨름하며 비판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5)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 교육
우리 교회교육은 막힌담을 허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늘 화해를 추구하고 일치를 이루는 교육을 해왔다. 우리는 다른 교회, 다른 전통의 교회를 같은 한 하나님의교회로 알고 더불어 지낸다. 이 다름을 우리는 개성으로 알고 개성이 다른 것과 함께 사는 삶을 어울어짐으로 알기 때문이다. 21세기에는 세계가 더욱더 인종이나 종교, 관습, 문화의 차이로 다면화되고 분류화 될 것이라고 한다. 이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함께 인정하고 순종하며 어우러지는 정신은 21세기를 평화의 세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3. 창조적인 신앙교육을 이루었던 틀들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가꾼 신앙교육적 유산들을 실제로 담아서 수 년간 활용하고 사용해온 방법, 틀들이 있다.
1) 인간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교육의 내용
한국 사회의 교육의 현상은 ‘성공도식’과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공부=좋은 대학=좋은 직업=성공’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상처 입은 많은 탈락자와 무한 경쟁의 결과로 생길 수밖에 없는 각박한 삶을 낳았다. 그러나 교육은 성공도식이 아니라 ‘인간화’를 그 목적과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희년’의 삶으로 교육하여왔다.
2) 대화라고 하는 교육 방법
학교는 프레이리가 지적한 대로 주입식, 일방적 교육을 해왔다. 그러나 교회교육은 대화적인 방법론을 발전시켜 왔다. 교사와 학습자가 함께 자기 삶의 경험을 성서 앞에 내어 놓고 함께 묻고 탐구하며 변화해온 것이다.
3) 교사라고 하는 잠재적 집단
한국 교회는 교회학교 교사라고 하는 아주 큰 신앙 세력이 있다. 이들 교사는 심지어는 중학교 다니는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은 청년들이며, 학습자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말씀을 공부하는 말씀 세력이며, 많은 상식을 공부하는 지성세력이다. 이들의 열심과 유대와 학습이 지교회는 물론 한국 교회 변혁의 큰 세력이었다.
4) 시설과 재정
적어도 1980년 이전까지는 교회학교의 학습자료는 선진적이었다. 작은 교회들도 환등기 정도는 가지고 있어서 영상으로 어린이들을 교육하였다. 교회에서는 융판을 비롯한 시청각 교재, 인형극을 할 수 있는 장치들이 있어서 학교나 사회의 다른 곳보다 재미있는 학습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교회교육은 재미있는 학습과도 통했다. 또한 교회 전체에서 차지하는 교육비는 작았지만 교회는 대체로 교육에 후한 투자를 해왔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행사나 활동은 학습자들의 참가비가 아니라 교회의 예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많은 교육의 기회를 어린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Ⅱ. 정체된 교회교육의 현실
1. 교회교육의 내용면에서
진보적인 교회교육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그 방향성 때문에 반대적인 정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지나치게 양극화되어 왔는데 그 양극화의 한쪽 방향만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1) 수직적인 차원의 신앙교육이 약화되었다
경건, 영성, 고백적 차원의 교육을 소홀히 해왔다. 신앙은 처음부터 통전적인 것이지만 그동안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이 세계의 수평적인 문제를 강조하다보니 신앙의 기도하는 차원이 약화된 것이다.
2) 양육적인 신앙교육의 약화
양육이란 교육의 어머니와 같은 측면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 생애에 걸쳐 양분을 주고 북돋아주는 측면이 약화되었다. 선교의 일꾼을 강조하다보니 십자가와 사명만을 교육해서 우리의 교회교육이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3) 중심군의 신앙 형성의 실패
신앙의 성향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보수신앙과 진보신앙 또는 오순절 형태의 신앙과 지성적 형태의 신앙 사이에 너무큰 괴리가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공통점으로 함께 공유하는 중간지대가 형성되지 않아서 교파주의와 같은 분열 현상이 심화되었으며 일치운동에 걸림돌이되고있다.
4) 교회 공동체 육성의 약화
그 동안 흩어져 선교하는 교육을 중심으로 했던 교회들은 그 관심의 방향 때문에 교회 자신의 공동체 형성에 소홀하였다. 교회 공동체 형성은 단지 교세 확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내부의 친교, 결집력, 성실성 등이 약화되어서 냉냉하게 된 것이다.
2. 사회 변화에 뒤지는 교회교육
1) 지역자치중심의 삶 대 중앙교파적인 교회교육
그동안 한국사회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지방자치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삶의 단위가 재편되었다. 그리고 삶의 내용은 자치로 바뀌어 가고 있다. 교육의 구조도 지역 단위로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여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교육의 형태는 여전히 교파중심으로 의존하고 있어서 지역단위의 삶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름 수련회 때에 청소년부는 수련회가는 날짜를 잡기가 어렵다. 학교마다 보충수업 날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 해결책으로 그 지역의 모든 교회들이 연대하여 지역의 교육 자치장과 학교에게 협조를 구하면 될 수도 있으나 이 일을 여전히 개교회가 혼자서 하고 있다.
2) 개혁되는 학교교육 대 그대로의 교회교육
한국교회의 교회교육은 학교교육의 학제나 일정을 받아들였다. 편의상 학교제도에 교회학교 구조를 맞추었다. 그래서 쉽게 학습자들을 관리하고 지도할 수 있었다. 또한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은 열려있고 재미있어서 사회적인 지도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나라 전체가 경제력을 갖추며 상황이 바뀌어 가고 있다. 요즈음 계속해서 문교부의 교육 개혁안이 나오고 있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일반교육은 진보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교회교육은 이를 방관만 하고 있다.
(1) 시설 문제
큰 교회를 제외하면 개교회는 다양하고 비싼 교육 자재를 구입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일반학교에도 교회보다는 우수한 비디오시설, 컴퓨터 시설 등을 갖추어서 다양한 학습을 하고 있다.
(2) 문화, 여가면
한국교회는 어린이, 청소년의 문화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 문화기능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학교와 일반 단체들이 해가고 있다.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학교 안에 여러문화반, 취미반을 운영하고 있다. 또 일반 사회단체나 교육단체는 더 심도 있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교회가 했던 문화, 친교기능들을 해가고 있다.
(3) 교육형태의 문제
이제 일반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의 입시점수에 ‘봉사활동경력’을 요구한다. 학력점수 외에 인간적인 봉사자질도 키우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없는 청소년들은 주일을 이용하여 여러 복지시설을 찾아갈 것이고 그때에는 교회에서 청소년부 예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교회는 교육의 형태를 바꿀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교회, 또는 여러 교회가 연대해서 복지시설과 자매결연을 맺는다. 그리고 주일 아침 일찍 봉사할 청소년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고 교사와 함께 봉사활동을 한다. 그리고 끝나면 담임목사의 날인을 받는다. 그리고 이 확인이 학교에서 인정된다. 이렇게 되면 도리어 청소년을 교회로 쉽게 인도할 수도있다. 아무튼 바뀌고 있는 일반 교육의 형태에 교회는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3) 다양한 교육 상황 대 교회에서만 하는 교회교육상황
한국사회의 문화는 경제적인 여유로 인해 교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자가용의 증가로 주일이면 교인들도 야외로 놀러간다. 큰 명절이나 피서철, 날씨 좋은 날에는 교회가 비어간다. 그럼에도 교회학교의 교육과 예배는 주일 아침, 교회에서 하는 것으로만 되어 있다. 또 교육교재도 교회학교교사가 가지고 지도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다양한 교육상황을 잃어버리고 있다. 교사중심에서 가정의 부모나 자율학습 교육방법도 필요하고, 피서지나 고향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나 교재도 필요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일반 교육은 이 다양한 교육의 상황을 수용하는 형편이지만 교회는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이다.
3. 21세기의 근본적인 도전 앞에 멈춘 교회교육
사실 이 모든 정체는 21세기라는 변화와 근본에서 맥을 같이하고 있다. 단지 최근 10년동안에 생긴 정체가 아니라 낡은 천 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천 년으로 들어가는 문턱에서 기독교회와 신앙, 서구 중심의 사고와 가치, 기계론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이 통채로 해체되는 위기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기에 사실은 정체 ‘stagnation’라기 보다는 21세기 앞에 선 교회교육의 문제로 오늘날 교회교육의 문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1) 신세대의 출현
신세대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X-세대 소동이 벌어지며 근본에서 우리들과는 또 옛날의 신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지 기성문화에 항거하고 도전하는 새로운 세대라기 보다는 도무지 20세기의 인간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인간개인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곧 21세기와 관련된 세대이다. 교회는 이 21세기 인간의 유형을 해체되고 있는 20세기의 틀로 붙들고 있기 때문에 대개의 교회에 젊은 층이 없는 것이다.
2) 의사소통의 변화
이 신세대가 21세기 인간형과는 다른 것은 의사소통의 방법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말, 문자, 논리로 의사를 소통한다. 이것이 우리의 이념과 신앙과 도덕과 같은 상부구조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신세대는 말, 문자, 논리로 전달되고 구성되는 것들을 잘 알지 못하고, 이념, 신앙, 도덕과 같은 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두뇌 작용보다는 오감작용, 말로 오가는 대화보다는 온 감각을 통해 직관으로 사물을 인지하고 이해한다. 그럼에도 교회의 예배나 교육은 여전히 설교중심, 문자중심, 이해중심으로 되어 있다.
3) 새로운 매체시대
새 인류의 출현과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을 바꾸게 한다. 그 예로 멀티미디어 시대를 들 수 있다. 이 복합매체는 의사소통체계 뿐 아니라 의사소통의 내용까지 뒤바꾼다. 마샬에 따르면 메시지가 매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매체가 매세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이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으로 세계관, 진리의 내용, 모든 것들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미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컴퓨터나 오락기를 통해서 3차원의 교육과 오락을 즐긴다. 머지않아 사이버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사랑도 하고 전투도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는 평면적인 방법으로 2000년전 갈릴리 예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세대는 다른 매체, 다른 메시지를요구한다. 활자와 설교 속의 예수와 진리가 아니라 4차원 영성과 공간 속에서 경험하는 살아있는 예수와 진리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Ⅲ. 21세기의 정체와 새세대 문제
1. 21세기의 정체
1) 21세기 운동들
21세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정확히는 모른다. 기술주의자들은 낙관적인 세계를 내다보고 있으며, 환경 생태론자들은 비극적인 세계를 내다본다. 그러나 우리들 생활에서 21세기를 예견할 수 있는 커다란 사조들이 있다.
(1) 신과학운동
이 운동은 물리학과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17세기 갈릴레이와 데카르트 , 그리고 뉴튼에 의헤 성립된 세계관의 페러다임을 넘어서서 오늘날 전개되는 상대성 이론, 불확실성의 이론과 같은 서구 물리학과 동양의 종교 사상의 연관성을 찾아가고 있다. 또한 서구의 물질중심의 사고에서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을 밝혀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氣)’과학도 이 신과학 운동의 한 흐름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 운동
문학과 사상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도 20세기의 해체와 21세기를 예측하게 한다. 기계론적 사고, 합리적인 이성과 같은 특징들 분만 아니라 기독교신앙도 이 도전을 받는다. 특별히 인간의 과학적 방법과 이성적, 비판적 사고로 신학을 하고 성서를 해석하는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눈으로 보면 첫 번째 해체대상인 것이다.
(3) 뉴에이지 운동
종교와 문화 방법에서는 뉴에이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마귀의 운동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21세기를 예견하는 운동이다. 이제 사람들은 교리종교, 문자종교, 도덕종교에 관심하지 않고 영으로 감지하고 체험하는 종교를 원한다. 진리는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설교나 도덕이나 경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가와 같은 명상, 단과 같은 수련을 통해서 생체리즘과 우주기와 모든 것이 어울어져 진리체험을 하는 것이다.
2) 21세기에는 어떤 시대가 나타나는가?
20세기의 삶과 가치가 해체되고 21세기는 어떤 모습의 삶이 자리잡을 것인가. 21세기 운동들에서 우리는 몇가지 공통되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1) 물질 중심에서 정신, 영과의 유기적인 통일로
지금까지 서구의 기술문명과 정신세계는 물질과 정신을 양분해 왔다. 물질과 정신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는 물질과 정신, 영을 한 실체로 보게 될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 서로 깊은 영향을 준다. 즉 물질 안에 정신의 실체가 있고 정신이 물질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기사의 인간 이야기처럼 흙(물질)으로 빚은 사람을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는 통찰이 신화가 아니라 진실한 물질과 정신의 실체로 평가받게 된다.
(2) 역사 중심에서 생명중심으로 관심과 삶이 변화된다.
지금까지 인류의 관심은 역사에 있었다. 성서해석이나 기독교신학의 관심도 역사에 있었다. 인류의 지성은 역사의 진실과 관련되어 있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의 해방사건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보다는 생명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와 진리를 인식해가고 있다. J.P.IC 신학은 역사에서 생명으로 기독교가 넘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경제, 정치, 문화적인 억압에서 하나님과 해방을 경험하였지만 21세기에는 바울의 경험대로 탄식하는 피조물 안에서 구원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인 눈으로 생명을 담는 방식에서 생명 안에 역사적인 것들을 담는 방식으로 관심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3) 개체 중심에서 생명 우주와의 어울어짐으로 주체의 전환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서구의 사상과 산업사회, 또 기독교신학은 ‘자기’를 구별된 독립체로 인식하였다. 이 개체 중심의 주체이해는 인간을 철저히 자연으로부터, 또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같은 이웃으로부터 단절시키고 분리시킨다. 앞으로 21세기는 주체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개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자연-우주’가 모두 한 영, 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역사중심적인 사고에서 정의는 서로 단절되어 있는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해 말했지만 21세기는 그럴 필요가 없을수도 있다. 주.객도식 대신에 너 안에 있는 나, 내 안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21세기에 들어가는 새세대들
1) 신인류로 경험되는 신세대들.
‘공일오비’라는 그룹의 노래 ‘신인류의 사랑’이 있다. 신세대의 우상이었던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신인류’로 불려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가사의 내용도 우리들과는 다른 사랑 느낌을 전해 주고있다. 두근거리고, 지성서적으로 대화하는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직설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못생긴 여자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기분이 상해하고 상대방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기성세대와는 도무지 말에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개성대로 살아가며, 욕망과 자유를 중요시 한다. 공동체보다는 개체성을,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좋아한다. 우리들의 잣대로는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잴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즉 서로에 대해서 별종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2) 신세대는 우리의 원수가 아니다.
이 신세대에 대해서 전국의 기성세대와 교회는 대체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일부 탈선행위나 대화가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신세대를 원수처럼 느낀다. 그러나 신세대는 21세기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21세기의 개성 때문에 혼돈을 경험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위크지의 한 기사를 보면 실제 미국사회에서 신세대를 객관적으로 조사하였더니 신세대는 이 사회에서 기성세대보다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이루고 있다는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객관의 눈, 21세기를 내다보는 눈으로 보면 신세대는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세대인 것이다. 우리들의 권위주의, 차별의식, 눈치보기, 물질주의와 같은 20세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찌꺼기들을 그들이 정화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신세대는 21세기 이 나라의 주체세력이며 또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Ⅳ. 21세기, 새로운 세대를 향한 교회의 교육적 대응
1. 이중의 과제
이제 4년 후면 21세기에 들어선다. 너도나도 큰소리로 21세기를 대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2중의 과제가 있다다. 하나는 당장에 우리 교회교육이 문제가 되고 있는 약점들을 보완하는 일이고, 동시에 21세기를 종합적으로 전망하면서 교회교육의 대응들을 구체적으로 세워가는 일이다.
2. 당장의 과제들
어쩌면 이것은 소극적 대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를 고치지 않고 곧바로 새것으로 넘어가는 것은 적어도 인간의 정신적인 유산에서는 없다. 이미 앞에서 한국교회교육의 약화된 면과 정체요인을 이야기 했기에 대안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진보적인 교회교육에 부족하다고 인식되는 점들을 보강하는 일이 필요하다. 신앙의 수직적 차원의 훈련, 양육적인 차원의 교육을 하는 일들이 이것이다.
2) 교회교육의 형태를 바꾸는 일이다. 교회의 교육은 지방자치 단위의 삶과 내용과 통하도록 그 구조를 바꾸어 가야한다. 또 일반교육보다도 빠르게 새로운 차원의 전인 교육, 인간화 교육,청소년 봉사 교육을 해가야 하겠다.
3) 교회교육은 다양한 문화적 상황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는 신앙과 교육의 중심쎈터이다. 그러나 예배와 교회교육이 가정 안에서도, 또 휴양지에서도, 또 성묘나 친교모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예배, 교육자료 등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3. 21세기를 준비하는 대응들
당장의 과제들을 풀어가면서 한국교회는 전체의 예지를 모아 21세기를 종합적으로 대처해가야 한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교회교육의 대응방향을 제시해 보겠다.
1) 21세기의 구원과 해방의 과제 찾기
기독교는 출애굽때부터 20세기 끝인 오늘날 까지 다양한 시대와 문화를 거치면서 구원과 해방을 이루어 왔다. 실존적인 죄에서, 또 사회 정치적인 억압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기능을 하였다. 과연 21세기는 어떤 인간 억압, 비인간화의 요소들이 있을까? 다음과 같은 영역들만 추정해 본다.
① 정보기술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 생기는 새로운 계급과 차별
② 기계적인 삶이나 사이버 공간, 또는 환각 세계에서부터 살아있는 생명경험으로 해방
③ 생명공학을 이용한 비인간적 윤리로부터 해방
④ 컴퓨터와 자기만의 생활공간으로부터 관계공간으로 해방
2) 21세기의 기독교 언어 경험 개발하기
이미 21세기의 모습을 영, 생명, 우주와 같은 방향으로 앞에서 논의를 했다. 신과학운동을 포함한 21세기 운동들은 어느정도 기독교신학과 언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21세기의 언어들을 동양의 신비종교와 사상에서 찾으려고 한다. 기독교도 동양의 사고에서 많은 것을 깨우쳐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와 복음의 체험 안에 영, 기, 생명, 우주와 같은 21세기의 경험들이 그 어느 경전이나 경험보다 풍부하게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21세기 언어와 경험들을 개발하여 교회교육의 내용으로 연결시겼으면 한다.
(1) 루아하(성령)과 기(氣)
기과학에서 주장하는 보이지 않으나 힘을 가지고 생명을 움직이는 실체인 ‘기’는 이미 하나님의 루아하요 성령의 놀라운 체험으로 증인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흙)로 사람을 지으시고 루아하(하나님의 기)를 불어 넣으시자 인간은 네페쉬(살아 있는 영)이 되었다. 이 루아하가 에스겔서에서는 사방에서 불어와 마른 뼈들을 산 무리로 일으키며 이 하나님의 기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의 영체험은 다양하다.
① 막힌담을 허는 정치적 해방을 가져온다.
② 인간의 병(육체, 정신)을 고친다.
③ 존재를 새롭게 한다(변화).
④ 방언을 하게 한다(통하게 하는 사건).
(2) 생명중심과 창조신앙
이스라엘은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부터 해방받는 역사적 과정에서 야훼를 경험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지금까지 역사종교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랜 성서형성 과정에서 출애굽 신앙보다는 창조신앙이 더 근원적인 하나님 인식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배열되었다. 그 근본에서 성서적 신앙은 생명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 생명, 인간 생명, 자연 생명을 똑같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에게도 축복을 주셨다. 또 인간의 생명과 자연 생명과하나님의 생명은 유기적 관계에 있음을 증언한다. 이미 창조신앙 안에 21세기의 생명 관점이 있는 것이다.
(3) 우주적인 관심
창조신앙과 종말 신앙, 그리고 예언자들의 통찰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이미 우주로 그 눈이 향해 있다. 예언자들은 인간 역사의 모순과 고통을 보면서 눈을 돌려 우주적 사건으로 해결한다. 궁극적으로는 ‘어린 양과 늑대가 함께 뒹구는 ‘생태사건, ‘눈물도 탄식도 없는 새 하늘 새 땅’사건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바라본다. 성서의 이 우주적인 전망은 결코 도피처가 아니다. 우주 창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회복되고 완성되는 우주가 성서적인 우주관이다.
이외에도 21세기 정신과 인간을 만날 수 있는 성서적 언어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가진 이 언어들을 우리의 에배와 교육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찾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Ⅴ. 맺는말
한국교회의 위기와 정체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교회교육이 갖는 약점도 있지만 근본에서 21세기 문명의 전환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21세기 문명의 전환은 사회전체, 기독교 신앙을 포함한 모든 종교에 관계 된다. 그러나 특별히 교회교육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았다. 21세기를 어떻게 대응할까? 정리하면,
1. 이미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진보적인 신앙교육의 유산들이 있다. 이 유산들을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2. 지금 우리는 문화 너머의 “21세기”, “신세대”에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있는 기독교 신앙을 전수해 갈까? 우리들 교회교육이 당장에 경험하고 있는 약한 점들을 보완하자고 미리 제안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힘을 모아 21세기를 준비하자고 했다. 이미 우리는 성서전통 안에 있는 21세기의 경험과 언어들을 우리들은 넉넉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