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7장 성경 말씀은 지혜를 찾는 자의 기쁨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한다. 사람이 지혜가 없으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어렵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가 있을 때 구원 받을 수 있다.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매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 전도서를 통해서 지혜를 구하고 복음을 깨닫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Ⅰ. 지혜자와 우매자 7:1-6
이 구절들 속에서 솔로몬은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 진리들을 주장하고 있다.
(1) 훌륭한 미덕을 지녔다는 명예가, 이 세상의 모든 부나 쾌락보다도 더 고귀하고 바람직하다(1절).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여기서 ‘보배로운 기름’이란 땅의 모든 이익들(땅의 소산들 중에서 기름이 가장 값비싼 것 중의 하나로 취급되어졌다),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들(이것은 기쁨의 기름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가장 영예로운 호칭들(이는 왕이 기름부음을 받는 까닭이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좋은 이름이 많은 재물보다 낫다(잠 22:1).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기름부음에 대하여 그 대가로 그녀에게 아름다운 이름, 곧 복음서에 기록되는 이름을 주셨다(마 26:13).
(2) 만약 우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면, 죽는 날은 우리의 근심, 걱정, 슬픔에 종지부를 찍게 해줄 것이다. 우리를 안식과 즐거움과 영원한 만족으로 옮겨 주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3)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2절). 우리는 잔치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을 행하며,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쉽게 허영과 보잘것없는 일에 빠지며, 교만한 마음과 안심하는 마음을 갖기 쉬우며, 육신에 탐닉하기 쉬운가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거창한 장례식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초상집에 가는 편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 초상집에 모임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유익한 점은 ‘모든 사람의 결국이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알고 ‘산 자는 그것에 유심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죽음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데에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보다도 더 손쉽고 자연스러운 방법이 없다. 좋은 설교에 유심하려 하지 않는 자들도 아마 이 점은 마음에 들 것이며 결국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초상집은 지혜자의 학교로서 그곳에서 많은 좋은 교훈을 배운다. ‘그 마음이 향락하는 집에 있는’ 것은 우매자의 특성이다. 그가 ‘초상집’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속박을 느낀다. 그의 마음은 바로 그때에도 향락하는 집에 가 있기 때문이다.
(4) ‘한 온스의 향락은 한 파운드의 슬픔과 맞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에게 그 반대의 교훈을 가르쳐 준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나타나는 근심이 마음을 좋게 만드는 경우가 자주 있다.
(5) 지혜자의 책망으로 우리의 타락을 억제하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보다 훨씬 낫다(5절). 솥 밑의 가시나무의 타는 것으로 적절히 비유될 수 있는 우매자의 웃음 소리를 사람이 그렇게도 끔찍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가시나무는 큰 소리와 큰 불을 잠시 동안 내기는 하지만, 잠시 후에는 재만 날리며, 솥에 있는 것을 끓이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왜냐하면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화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마는 것이다.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시끄럽고 잠깐 동안 반짝하는 것이지, 참된 기쁨의 표시는 아니다. 이것도 헛되니라.
Ⅱ. 지혜자의 인내 7:7-10
솔로몬은 앞에서, 미덕과 경건을 크게 실망시켰던 압제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한 적이 종종 있었다.
(1) 그는 그 유혹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7절).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흔한 사실이다. 만약 지혜자가 오랫동안 심한 탐학에 시달리면, 그는 자기 자신에 걸맞지 않은 언행을 하기가 쉬우며,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갑자기 외람된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 ‘그것이 마음 속의 은사를 파괴한다'(후반부의 구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관대한 마음까지도 탐학에 의해서 부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학대 받는 자들에 대하여 깊이 마음을 써야 한다. 만약 우리 자신이 그런 경우에 처했다면 우리도 어찌 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2) 탐학자들의 성품은 매우 악하다고 어떤 사람은 이해한다(7절). 지혜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던 사람이 만약 탐학자가 된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들이 그의 마음을 파괴해서 그의 내부에 빈곤하게 남아 있던 지성과 미덕을 소멸시켜 버리며 그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를 그냥 내버려 두면, 잠시 후에 그는 스스로 파멸될 것이므로 결국 그 문제는 좋게 해결될 것이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8절).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밑에서 벽돌 생산량이 갑절로 늘고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던 ‘일의 시작보다’ 이스라엘이 이겨서 애굽을 벗어나던 때에 모세가 저 교만한 압제자 바로와 조약을 맺던 ‘일의 끝이 낫다.’
(3) 우리가 탐학에 의하여 미치는 지경에까지 몰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한다. 이는 ‘그 마음이 교만한 자’는 그들이 가혹한 처지에 이르렀을 때에 난폭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인내, 곧 견디는 인내를 입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 올 것을 기대하는 기다림의 인내를 덧입어야 한다. 우리는 지혜와 은혜로 우리의 격정을 다스려야 한다(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지체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즉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기 쉽다. ‘분을 오래 품지 말라.’ 왜냐하면 지혜자에게는 분노가 찾아 오더라도 마치 나그네처럼 그냥 지나가고 말지만, ‘노는 오직 우매자의 품에 머무는’ 까닭이다. 우리는 현재 있는 것을 최선으로 이용해야 한다(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며, 또한 그런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지 말라.” 이는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닌 까닭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에 대해서도 재판관이 될 능력이 없으므로, 그 질문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지난 시대의 좋았던 것을 부르짖으면서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자비를 모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이전의 황금기에 비해보면 철의 시대와 같은 이 시대에 우리를 보내신 것을 하나님의 불공정하고 불친절한 처사로 여겨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초조와 불만족에서 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싸움을 걸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보편적 쇠락이나 도덕의 타락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셨지만 인간은 언제나 악했다. 만약 어떤 점에 있어서 오늘날이 과거보다 더 악화되었다면, 다른 점에서는 더 좋아진 것도 있을 것이다.
Ⅲ. 지혜의 유익함 7:11-22
(1) 지혜에 대한 경솔 : 지혜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소유를 관리하고 선용하는 데에 필요하다. 지혜는 유업과 함께 하여야 아름답다. 즉 유업은 지혜가 없는 쓸 데가 없다. 지혜는 가난한 자들에게 뿐 아니라 부자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지혜는 부자를 자기 재물로 인한 피해로부터 지켜 주고 또 그 재물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지혜는 그 자체로 유익하며 사람을 쓸모있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만약 지혜와 함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더욱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며, 자신의 재물과 더불어 그에게 부가 없을 때보다도 자기 세대에게 더욱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혜는 우리의 안전에 기여하며, 고난의 폭풍과, 온갖 것을 초토화시키는 그 열기로부터 우리가 피할 안식처가 된다. 그것은 하나의 그늘(그 단어가 이렇게 되어 있다), 곧 메마른 땅에 서 있는 큰 바위의 그늘과 같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즉 돈처럼) 보호하는 것이 된다. 부자가 그의 재산을 가지고 그렇게 하듯이 지혜자는 그의 지혜를 강한 성으로 삼는다. 지혜는 사람에게 기쁨과 참된 행복이 된다.
이것은 뛰어난 지식 곧 하나님의 지식으로서 돈보다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 곧 인간의 지혜보다도 더 뛰어나서 이 지식을 가진 자에게 생명을 주는 지식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곧 생명이다. 그것은 생명을 연장시킨다. 지혜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 넣으며 그의 거처와 지주가 된다(19절). 지혜는 지혜자로 능력이 있게 하고 그의 정신을 강건케 하며, 그를 언제나 튼튼한 기초 위에 둠으로써 그를 담대하고 결단력있게 해준다.
(2) 지혜에 관한 몇 가지 교훈들.
1)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13절). 불행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불평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그 일들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손을 보고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거스리는 말을 하는 우리의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마다 선하고 의로우며 유익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일 속에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과 조화가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은 마침내 최선을 위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사물의 성질을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 놓으신 상태에서 변경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2) 우리는 우리를 존중하는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에 우리 자신을 적용시키며, 한 날에 할 일과 의무는 그 날에 행해야 한다(14절).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차례대로 찾아오기 때문에 형통할 때에는 마치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기뻐해야 할 것이고, 역경 속에서는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해서 살며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거기에 대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한결같아야 하지만,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의 믿음의 발휘는 우리의 외적인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같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선을 행하여 선을 구하면서 거룩한 즐거움을 유지하며 마음의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째서 우리와 다투시는지를 생각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목적에 부응할 수 없다.
3) 우리는 이 생에서 악인이 가장 크게 번영하는 것이나, 경건한 자에게 떨어질 수도 있는 가장 슬픈 재난으로 인해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15절). 지혜는 우리에게 섭리의 그 어두운 시기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그것들을 하나님의 지혜, 거룩함, 선하심, 신실하심과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비록 솔로몬은 그렇게도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자기 생애의 날들을 ‘내 헛된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땅 위에서의 최고의 날들이라 하더라도 영원한 날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의인의 재난은 미래의 축복을 위하여 그들은 준비시켜 주는 것이지만, 악인의 재난은 단지 그들의 파멸을 거두는 것 뿐이다. 이렇게 굽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곧게 할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이며 우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4) 지혜는, 성도에게는 그 길에 대한 경고로도 사용될 수 있고, 죄인에게도 그 길을 억제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의인은 자기의 경솔함과 성급한 열정에 의하여 스스로 머리를 쥐어짜면서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를 가혹하게 다룬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16절). 자기를 무인하며 육신을 죽이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다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거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치 못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의인이 된’ 까닭이다.
“너무 독단적이 되지 말며,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지 말라. 비판자로 나서서 사람들이 마라고 행하는 것마다 헐뜯는 짓을 하지 말라.” 죄인에 관하여 보자면,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15절).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그 악인 정도만 악해져서 안전을 누리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17절). “네 자신을 법망에 노출시킬 정도로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5) 지혜는 우리에게 그 양극단의 중간을 취할 것을 명할 것이며, 항상 우리의 의무를 지키도록 지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평탄하고 안전한 길을 발견할 것이다(18절). “너는 이것 곧 스스로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이 지혜, 이 조심성을 잡는 것이 좋으며, 또한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라.’ 지식이 없는 말과 노새를 어거하듯이, 너의 완고한 격정을 어거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고삐를 잡으라. 그리고 일단 그것을 잡았으면, 이제는 꼭 붙들고 있으라. 양심을 지키면서도 주의하라.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너 자신이 연습하라.”
6)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을 가르칠 것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와 관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흠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 자신은 어느 누구도 흠이 없을 수는 없다. 이 ‘지혜가 지혜자로 능력있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분노에 대하여 무장시켜 줌으로써(19절) 그들이 분노에 의하여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해준다.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천사들이 아니라, 아담의 죄많은 아들 딸들이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20절).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도전적인 모욕에 대해서는 눈이 빨리 돌아가지 말고, 도리어 우리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상해에 대하여 눈을 돌리고서는 마치 못본 것처럼 행동할 것을 가르친다(21절).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마랄. “사람들이 너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애를 쓰거나 조사하지 말라. 하나님과 너 자신의 양심 앞에서 떳떳하라. 그러고나서 사람들이 너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지에 괘념치 말라. 만약 네가 온갖 말에 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쩌면 너는 네가 듣지 않고 있는 줄로 알고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그런 모욕을 스무 번 그냥 지나치는 것이 하나에 대하여 앙갚음하는 것보다도 더 쉬운 일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결점을 가르쳐 준다(22절). “너를 험담하는 자들에게 격노하지 말라. 만약 네가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 보면 네 마음이 너에게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이라. 따라서 너는 네가 한 대로 받은 것이니라.”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뒤에서 험담하고 비방한 것에 대하여 자신에게 참으로 분노한다면(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우리는 뒤에서 우리를 험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덜 느낄 것이다.
Ⅳ. 사람의 사특함 7:23-29
지금까지 솔로몬은 이 세상이 헛되다는 것과 이 세상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해 왔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솔로몬은 죄의 사특함과 그것이 분명히 인간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입증하고 있는데, 그것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경험이었다. 솔로몬은 여기서, 그가 쓴 어떠한 책들에서 보다도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 그는 자기의 지혜의 부족을 시인하고 그것을 슬퍼한다.
1) 그는 지혜를 탐구하는데 근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식의 수용력을 허락하셨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목적을 관철하려고 결심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23절). 또한 그는 어떤 노고도 감수하리라고 결심했다(25절). “내가 유용한 모든 학문과 철학과 신학을 통달하기 위하여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했노라.”
2) 그러나 그의 성공은 그에게 도움을 주거나 만족을 주지 못했다. 내가…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나는 그것을 섭렵할 수가 없었노라. 결국 더 많은 것을 알수록 알아야 할 것도 더 많아졌고 또한 나의 무지를 점점 더 알게 되었노라.”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의 경륜과 활동에 관한 것이다. 그가 이런 것들을 궁금했을 때에, 그는 곧 당혹하게 되었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잠 8:9). 그러나 우리는 멀리 있는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
(2) 지혜에서 그가 부족했던 경우처럼, 그의 어리석음이 지나쳤던 경우들에 대해서도 그는 시인하고 슬퍼한다.
1) 죄의 악함에 대한 그의 연구 : 그는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 알고자 하였다.’ 죄는 마치 자기가 죄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기나 하는 것처럼 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가면들을 전부 벗겨내고 죄의 본성과 그 색채를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병의 성격, 원인, 악성(malignity)을 알아야 하듯이, 우리가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도 그 죄의 악함을 알아야 한다. 그의 우매하던 시절에는 쾌락을 찾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았고 그리하여 육신을 위한 준비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던 솔로몬이,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시자 죄의 악한 영향을 찾아내서 자기의 회개를 굳히기 위해 열심이다.
큰 죄인은 또한 큰 참회자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이 가장 크게 강조한 것은 어리석음의 악(아마 이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인 것 같다)과 불결함의 죄인 것 같다. 이는 이 죄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으로 불리웠기 때문이다(창 34:7;신 22:21;삿 20:6;삼하 13:12). 솔로몬은 자신이 그 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그것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아제 그는 그 죄의 사악함을 보기를 원한다. 어리석음 속에 악이 있듯이, 악함 속에 그리고 심지어 우매함과 미친 짓 속에도 어리석음이 있다.
2) 이 연구의 결과 : 이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이 범했던 그 큰 죄, 곧 ‘이방 여인을 사랑한’ 죄의 악을(왕상 11:1) 발견했다. 그는 죄의 기억을 큰 슬픔으로 느꼈다. 내가 깨달은즉…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음란한 여인의 마음은 ‘올무와 그물’이다. 경솔한 사람들은 쾌락이라는 미끼에 의하여 거기에 걸려든다. 그녀의 손은 다정한 포옹의 위장 속에서 한 번 잡은 것을 꽉 잡아매는 수갑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이제 솔로몬은 그가 실제로 범한 죄의 수효를 밝히는 데에 마음을 쏟고 있었다(27절).
그는 자기가 그 죄를 더욱 자세히 시인하기 위하여, 회개자로서 그것들을 찾아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곧 당황해서 그것들이 무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절).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나는 아직도 세고 있지만 그것을 모두 셀 수는 없도다. 아직도 나는 내 마음속의 새로운 악을 발견하고 있도다”(렘 17:9,10).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 생활의 부패와 이 세상의 부패를(그 속에서 그는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의 선인을 찾기가 힘들었다) 비교함으로써 그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죄를 범했음을 발견했다(20절).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어리석은 짓과 미친 짓의 근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래의 바른 상태에서 타락한 것이다(29절). 처음 하나님의 손에서 생겨날 때의 인간은, 선하고 정직한 창조주의 축소판이었다(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 때문에 손상을 입었고 결국은 파괴되고 말았다.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여기서의 그들은, 우리의 최초의 부모 혹은 전 인류 전체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고 세부적으로는 각 사람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제도를 위한 존재가 되지 않고 자기의 꾀를 위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