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장 히브리어 성경말씀은 성전에서 환상을 본 이사야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환상을 보았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모습을 이사야가 보았다.
성 경: [사6:1] 비쉬나트 모트 하멜렉크 이즈야후 바에르에 에트 아도나이 요셰브 알 키세 람 비나사 비슐라이브 밀레임 에트 하헤칼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장) 백성들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像)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냐’이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선지자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 ‘높이 들린 보좌’는 아마도 여섯 계단의 꼭대기에 놓여져 있는 솔로몬의 보좌에서 연상된 듯하다(왕상 10:18).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계속된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 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은 웅장하게 건축된 궁전(잠 30:28;단 1:4)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하 24:13;시 29:9)을 뜻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요 12:41). 이 영광은 죄 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어서는 그 감추임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성 경: [사6:2] 시라핌 오미딤 미마알 로 셰쉬 키나파임 셰쉬 키나파임 리에하드 비쉬타임 이카세 파나이브 우비쉬타임 이카세 라길라이브 우비쉬타임 이오페프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오메딤 밈마알 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왕상 22:19;욥 1:6;슥 6:5). ‘스랍들'(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이다(14:29;30:6;민 21:6,8;신 8:15).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그 둘로는…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성 경: [사6:3] 비카라 제 엘 제 비아마르 카도쉬 카도쉬 카도쉬 아도나이 체바오트 말로 콜 하아레츠 케보도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카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로는 욥 38:7;시 29:1,2;계 4:8;7:11 등이 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카도쉬)과 ‘영광'(카보드)이었다. ‘거룩’이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은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민 14:21;시 57:5,11;72:19). 다시 말하면, ‘거룩’은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은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 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서 삼위 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렘 7:4;겔 21:27). 칼빈(Calvin)조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사6:4] 바야니우 암모트 하시핌 미콜 하코레 비하바이트 이말레 아샨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 여호와가 강림하실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여호와의 거룩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선지자가 서 있는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하니, 이는 스랍들의 찬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 연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4:5;왕상 8:10;겔 10:4, Gray, Knobel).
성 경: [사6:5] 바오마르 오이 리 키 니디메티 키 이쉬 티메 시파타임 아노키 우베토크 암 타메 시파타임 아노키 요셰브 키 에트 하멜렉크 아도나이 체바오트 라우 에나이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직역하면 ,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 됨과 그 백성의 죄악 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한다. 이는 첫째로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 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었다(약 3:2 참조).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깊은 연대 의식(혹은 책임 의식)을 느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29:13에서 발견된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선지자가 뵈온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었다. 성전 가득 뒤덮인 긴 옷자락, 주변에서 쉼없이 찬미하는 스랍들의 모습에서(1,2절) 선지자는 이 같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른다.
성 경: [사6:6] 바야아프 엘라이 에하드 민 하시라핌 우비야도 리치파 비멜리카하임 라카흐 메알 하미즈베아흐
성 경: [사6:7] 바야가 알 피 바요메르 힌네 나가 제 알 시파테카 비사르 아오네카 비하타티카 티쿠파르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화저(火著)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내 입에 대며 – ‘단’은 제단이니 곧 하늘에 있는 향단을 가리킨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늘 향단은 금으로 만들어졌다(계 8:3;9:13). ‘핀 숯’은 불타는 숯 혹은 뜨거운 돌을 뜻한다. 천상에서 거행된 죄사함의 성례는 스랍 중 하나가 단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정금으로 만든 화저(불집게)를 가지고 핀 숯을 취하여 선지자에게로 날아가 그가 부정하다고 탄식한 입술을 거기에 댐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인 행동은 다만 선지자에게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핀 숯’ 자체가 정화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보라…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스랍들의 말로 앞 절의 신비한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평행법은 선지자에게 사죄의 확신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받은 사죄 의식에는 피 흘림의 제사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 행위로 인하여 그 같은 제사가 불필요하게 될 날이 올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