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장 하나님 말씀은 유다 백성의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유다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죄를 지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인생을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수밖에 없다.
Ⅰ. 책 전체의 표제 1:1
(1) 선지자의 이름 : ‘이사야'(Isaiah)라는 이름은 신약에서 Esaias로 읽힌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구원”이란 뜻인데, 이것은 특별히 구주이신 예수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큰 구원에 대해서 아주 많은 예언을 했던 이 선지자에게 적합한 이름이다. 그는 유다 왕 아마샤의 형제 혹은 그의 아들인 ‘아모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전승은, 어떤 선지자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될 경우 그 아버지 역시 선지자였다고 하는 규칙만큼이나 불확실한 것이다.
(2) 예언의 성격 : 이 예언은 이상이다. 그 당시 선지자들은 ‘선견자’라고 불리었기 때문에 그들의 예언이 ‘이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마치 육신의 눈으로 본 것처럼 분명하게 본 것이었다.
(3) 예언의 주제 : 이 책에는 바벨론, 애굽, 두로 그리고 그 밖의 이웃의 여러 나라들과 관련된 장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주로 예언된 대상으로부터 제목을 택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유다 백성들의 의식을 일깨운다.
1) 교훈으로 일깨운다. 하나님의 이 계시는 이 백성들에게 향한 교훈이다.
2) 책망과 경고로 일깨운다. 만일 유다에서, 또는 예루살렘에서 죄악이 발견되면 그들은 다른 어떤 배경들보다 빨리 그에 대한 셈을 치루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3) 아간 때에 위로와 격려로 일깨운다. 시온의 자녀들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이다.
(4) 예언의 시대 : 이사야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하였다. 이 사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1) 그는 오랫동안 예언하였다. 만일 그가(유대인들의 전승에서처럼) 마침내 므낫세에게 톱으로 켬을 당하여 죽었다면 실로 오랫동안 예언을 한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11:37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웃시야왕이 죽던 해부터(6:1) 히스기야왕이 병들었다가 회복될 때까지는 40년의 기간이 있었다. 그가 그 기간의 전후로 얼마나 많이 예언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2) 그는 여러 시대를 거쳤다. 요담은 선한 왕이었고, 히스기야는 그보다 더 선한 왕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틀림없이 이 선지자에게서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왕 사이의 기간, 그러니까 이사야가 한창 나이었을 때인 아하스의 통치는 매우 불경하고 악했다.
Ⅱ.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 1:2-9
(1)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을 하면서도 그의 백성들이 경청해 줄 것을 기대하지 않고 하늘과 땅에다 말을 한다(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들에게 말을 한 이유는 창조의 법을 지키고 창조의 목적에 부응하는 무생물들이, 이 어리석고 무감각한 백성들보다 빨리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늘의 빛은 하나님의 백성의 어두움을 부끄럽게 하고 땅의 풍요한 열매는 그들의 황무함을 부끄럽게 하며 하늘과 땅이 제 시간을 지키는 엄수성은 그들의 불규칙함을 부끄럽게 하라는 의미이다. 모세도 신명기 32:1에서 그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2) 그는 그들의 비열한 배은 망덕을 책망한다. 하늘과 땅조차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듣고 놀랄 것이다.
1) 그처럼 불평이 많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사이다. “나는 그들을 어린 아이처럼 먹이고 키워왔도다. 그들은 잘 먹고 잘 배워 왔도다”(신 32:6).
2) 그처럼 자상하게 보살피신 하나님께 대하여 그들이 행한 비뚤어진 행위이다.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그는 이러한 사실을 무지와 분별없는 탓으로 돌린다(3절). 소는…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하자.
1) 피조물 중 가장 우둔한 종류인 소와 나귀의 총명 : 소는 주인을 알고 그를 도울 만큼 자기 의무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 나귀는 자신이 거하는 주인의 마굿간을 알고 그것을 지킬 만큼 자기 권리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지식에 있어서조차 이 어리석은 동물들에게 부끄럼을 당하고 그들에게 가서 배우도록 보내질 뿐만 아니라(잠 6:6,7), 그들을 본받아야 할 정도까지 되었다(렘 8:7).
2) 이스라엘의 어리석고 우둔함 : 하나님은 그들의 주인이며 소유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지으셨고 잘 기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 “전능자가 무엇이길래 우리가 그를 섬겨야 하는가?” 그들은 알지 못하고 생각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알고 있긴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깊이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 지식이 그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한다. 그들은 그 지식을 자기들의 문제에 적용하지도 않고 그 지식에 관심조차 쏟지도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큰 적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항하고 그를 거역하였던 것이다.
(4) 그는 유다 백성의 교회와 나라의 부패를 슬퍼한다. 죄라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 그것에 감염되었다. 범죄한 나라요(4절).
1) 사악함이 나라 전체에 널리 퍼졌다. 그들은 범죄한 민족이었다. 백성들의 대부분이 사악하고 불경하였다. 그들의 사악함이 ‘납 조각’처럼(슥 5:7,8) 그들을 덮었다. 그들은 나쁜 줄기에서 생겨난 ‘행악의 종자’였다. 반역심이 혈통을 따라 내려가 그들은 모두 반역자의 혈통이요 후손이었다. 그들은 ‘부패한 자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패케 하는 지식, 즉 악을 퍼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감염시키는 자식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고의적으로 ‘만홀히’ 여겼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 거룩한 자를 화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알았으며 또 그렇게 하였다.
2) 그는, 온통 문둥병이 퍼진 병든 몸이나 욥처럼 짓무른 종기가 가득한 몸을 비유로 들어 위의 사실을 설명한다(5,6절). 병이 신체의 중요한 부분들을 뒤덮었고 그래서 곧 죽게 되었다. 그들은 판단력까지도 부패해졌다. 즉 문둥병이 머리속까지 퍼진 것이다. 문둥병이 온몸에 퍼져서 몹시 악취가 났다. ‘성한 곳이 없이’ 즉 건전한 도의도 없고 신앙도 없이(왜냐하면 신앙은 영혼이 활력이기 때문이다) ‘상한 것과 터진 것’ 즉 죄악과 부패 뿐이었다. 병을 고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고, 설혹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죄가 회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그 상처는 유하게 함을 받거나 싸매 지지 않으며 그것을 치료하기 위한 어떤 행위로도 처방받지 못한다.
(5) 그는 비록 그들이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것을 몹시 슬퍼한다. 그들의 나라는 거의 파멸되었다(7절). “자 너희 나라가 어떤 지경에 처했는가 보라.”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의 식물이 되어야 할 토지의 열매를 ‘이방인들이 너희 목전에서 삼킬’ 것이나 너희는 그것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 원수는 물리도록 먹는데 너희는 굶주려 죽을 것이라.” 시온의 딸같은(시온 위에 세워진 성전은 예루살렘에게는 어머니였다) 예루살렘이 이제는 파멸되고 황폐되었으며, 포도 수확기가 끝나 아무도 거하지 않는 ‘포도원의 망대’ 같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에워싸인 성읍’ 같은 그곳에 가까이 가기를 무서워하였다(8절).
이 말씀은 아마도 아하스 치세 때에, 즉 유다가 아람, 이스라엘, 에돔,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침략당하여 많은 수가 죽고 포로로 잡혀간 때에(대하 28:5,17,18) 전파되었던 것 같다. 국민의 불경건과 부도덕이 나라의 황폐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혀 개심하지 않으므로 하나니은 또다른 방침을 취하겠다고 경고하신다(5절). 하나님은 때때로 의로운 심판의 한 가지 방법으로써, 오랫동안 제멋대로 지내온 것 때문에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신 자들을 징계하시기를 멈추기도 하신다.
(6) 그는 이러한 전반적인 부패와 황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징표가 될 남은 자를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배교가 만연한 시대에 순결함을 지켜 주시고 공통적인 재난에서 안전하게 살려주신 자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롬9:27) 그의 당시에 유대 민족 중 기독교를 받아들인 소수의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 이렇게 남겨 두신 자들은 흔히 매우 적은 수이다. 수가 많은 것이 참된 교회의 표징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에게도 적은 무리밖에 없었다. 완전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멸망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었는지를 돌이켜 보고, 그 멸망을 몸으로 막은 소수의 선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얼마나 큰 빚을 졌으며, 이같이 선한 사람들을 남겨두신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좋다.
Ⅲ. 외식적인 종교 의식들에 대한 거절 1:10-15
(1)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듣도록 그들을 부르신다(그러나 그것은 무위로 돌아간다, 10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붙이시는 호칭은 매우 이상하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만드는 것이 공의로운 일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9절). 여기서 선지자는 그 관원들에게 소돔의 관원이라고 정면으로 공격한다. 왜냐하면 그는 오랜 후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들에 대한 선지자의 요구는 매우 정당하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을 경청할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의 법으로 삼을지어다.”
(2) 하나님은 정당한 이유로 그들의 기도 듣기를 거절하시고 그들의 예배, 즉 그들의 제사와 번제물, 제물의 기름과 피를 받으시기를 거절하신다(11절).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뜰에 들어오는 것(12절), 예물과 분향, 엄숙한 집회(13절) 그리고 월삭과 정한 절기(14절), 신앙적인 요청까지도(15절) 거절하신다. 그들은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에 일체를 다 거절당한 것이다.
1) 신앙의 능력에 대해서는 외인, 아니 오히려 운수이면서도 신앙의 형식과 그림자에 대해서는 매우 열심을 보이는 듯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범죄한 나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제단 앞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드려지는 희생, 곧 화목 제물과 번제물을 가져왔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참된 신앙심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보이러'(12절), 즉 하나님 앞에 “보여지기 위해”(어떤 역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였다. 그들은 법과 공의를 구실삼아 살인, 약탈, 압제를 행하였던 것이다. 악의는 하나님께 있어서 마음의 살인과 같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사실 손에 피가 가득한 자이다.
2)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지라도 죄를 버리고 생활을 고치기보다는 자기들의 종교적인 열성에 매달리기 쉽다.
3) 악한 백성들이 아무리 성대하고 값비싼 제물을 바친다 해도 마음과 생활의 철저한 개혁이 없이는 하나님께 전혀 열납되지 않고 오히려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여기서 아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됐다. 아니, 순종이 없는 제사는 차라리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화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제사는 무익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묘사된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11절). 그것은 ‘헛된 제물’이다(13절).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들에 대한 그들의 열성은 모두가 헛된 수고였고 선한 어떤 목적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12절).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많이 기도할지라도 그 기도가 한도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희의’ 제사이지 내가 원하는 제사는 아니라. 나는 그것들에 ‘배불렀고’ 물리기까지 했노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뜰에 들어오는 것을 ‘마당을 밟는 것’ 혹은 마당을 유린하는 거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분향’은 비록 그 냄새가 아주 향기로웠을지라도 위선적으로 그리고 악한 의도로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증하게 여겨졌다.
하나님은 그들의 ‘성회’를 견딜 수 없었고 인내심을 가지고 두고 볼 수도 없으셨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듣는 것은 결코 싫증을 느끼시지 않지만, 악인의 값비싼 제물은 이내 싫증을 내신다. 죄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심지어 기도와 신앙적인 봉사조차도 하나님께서 지겨워하실 만큼 미워하시는 것이다. 가장된 경건은 이중적인 죄악이다.
Ⅳ. 회개와 개혁의 촉구 1:16-20
(1)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신다. “너희의 제사가 열납되고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라거든 너희는 처음부터 일을 바르게 시작하라. 돌이켜 내 법을 지키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신앙적인 모든 행위가 받아들여질 것을 결코 기대하지 말라.” 공의와 자선이 결코 무신론과 신성 모독의 죄를 면해 주지 못하듯이, 기도와 제사도 결코 사기와 압제의 죄를 면해 주지 못할 것이다.
1) 그들은 ‘악행을 그쳐야’ 한다. 즉 더 이상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되며 더 이상 무죄한 피를 흘려서도 안 된다. 이것이 몸을 씻되 ‘스스로 씻으라'(16절)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추잡한 죄짓기를 삼감으로써 악행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죄의 뿌리와 습관도 버려야 한다.
2) 그들은 ‘선행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회개를 마무리짓는데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선행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깨닫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히 두 번째 돌판에 있는 의무들을 강력히 요구하신다.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바른 것을 알아내어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학대받는 자들, 곧 고아와 과부의 원수를 갚아 주어라. 그렇게 함으로써 오만한 자들이 연약하고 힘없는 그들을 짓밟지 못하게 하라. 스스로 자신을 변명하지 못하는 자들, 그리고 너희의 친절에 보답할 만한 돈이 없는 자들을 위해 대변해 주어라.”
(2)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하여 이성적으로 논쟁하자고 권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한 한, 내게 무수한 재물을 가져올지라도 나는 결코 너희와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 그러나 너희가 씻되 스스로 씻는다면 얼마든지 내게 가까이 나아올 수 있도다. 우리가 그 문제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자.” 신앙심을 갖게 되는 데에는 그 나름대로 동기가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이 변론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죄를 자복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
1)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만일 그들이 회개하고 생활을 고친다면 이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받으리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는 어떤 고해도 부과되지 않고 더 무겁게 만들어진 멍에도 없다. 하나님은 “너희가 완전하게 순종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려고 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원하는 마음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든 죄가 용서될 것이며 다시는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또한 우리가 자주 배역하여 죄에 빠졌고, 옷이 주홍 물감에 담겨 있듯이 죄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을지라도, 용서하시는 자비가 그 죄를 완전히 지워 없앨 것이다. 우리가 회개와 개심으로 스스로 씻는다면(16절) 하나님은 완전한 용서로 우리를 희게 만드실 것이다. “즐겨 순종하기만 한다면 너희가 ‘땅’ 곧 약속의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 죄를 용서받으면 음식물이 참된 위안이 된다.
2) 그들이 만일 계속해서 완고하게 순종치 않는다면, 여호와의 법에 따른 판결이 그들에게 실행되리라는 것밖에 아무것도 그들은 기대할 수 없었다(20절).
Ⅴ. 멸망의 경고와 개혁의 약속 1:21-31
(1) 선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한 타락을 슬프게 탄식한다. 왕의 성읍인 예루살렘은 신실한 곳이었다. 즉 하나님에게와, 사람들 중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권익에 충실하였고, 유다의 공익에도 충실하였다.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공의가 정당하게 집행되었다. 우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아름답고 정숙한 배우자가 이제는 간음한 여인이 되었다. 이제는 공의가 예루살렘에 더 이상 거하지 않고 살인자들이 거기서 버젓이 살았다 방백들 자신이 아주 잔인하고 심한 압제를 하였으므로 살인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루살렘의 부패가 구체적으로 설명된다(22절).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관원들의 이러한 부패는 조화가 변조되거나 은이 찌끼로 바뀌는 것만큼이나 그 나라에 치욕과 손해가 된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고. 그래서 맛이 없고 시큼하게 되었다. 찌끼도 은처럼 빛날 수 있고 물이 섞인 포도주도 그 빛깔은 간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전혀 가치가 없다. 이렇게 그들도 덕과 공의의 모양은 갖추고 있었지만 참된 의미의 덕과 공의는 전혀 간직하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하고 율법에 복종하게 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반역을 하여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무시한다. 도적을 막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도적과 짝한다. 그들은 도적을 보호해주고 부정한 소득을 함께 나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득을 보려고만 마음먹는다. 즉 그 일이 옳든지 그르든지 상관없이 자기들의 지위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그들은 손해당한 자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였다. 즉 고아들을 보호하는 데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가 송사를 가져올 때 뇌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한다.
(2) 이러한 슬픔의 원인들을 시정하려는 결심이 세워진다(24절).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말한 것을 이루실 능력이 있으신 분께서)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하나님께서는 이 짐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할 때와 방법을 찾아내실 것이다. 만일 신앙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4절)이신 그분의 형상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능자이신 그분의 손의 압박을 맛보게 돌 것이다. 비록 교회 안에 많은 찌끼가 있을지라도 교회는 버려지지 않고 정련된 것이다(25절).
내가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악은 억압될 것이고 압제자는 해를 끼칠 권세를 빼앗길 것이라.” 한 민족을 고치는 것은 하나님 고유의 일이다. 내가 나의 손을 네게 돌리리라. “내가 처음에 신앙을 심기 위해서 했던 그 일을, 이제는 신앙을 되살리기 위해서 행하리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한 행정관들과 사역자들을 보내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신다(26절).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하여 행악자들에 대해 법을 시행하게 하고 공무를 처리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의의 원칙들을 심으시고 그 원칙들에 의해 그들의 생활을 다스리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신다(27절).
외부적인 억압을 받을 때에도 사람들은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의 감화로써 그 일을 효과적으로 행하실 것이다.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은 모두가 개심하게 될 것이고 그 개심으로 인해 구속될 것이다. “그 ‘귀정한 자’ 혹은 ‘돌아오는 자'(어떤 역본에는 이같이 되어 있다)는 의로 구속되리라.” 사람들의 덕이 되살아날 때 그들의 명예도 회복된다.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고침 받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징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멸망하게 될 것이다. 신앙심이라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어 비린 노골적인 신성 모독자나, 신앙 고백이라는 가면을 쓰고서 악한 생활을 하는 위선자나 다같이 멸망할 것이다.
이전에는 여호와와 연합해 있었으나 이제 ‘여호와를 버린 자도,’ 수로가 샘에서 끊어지면 그 속에 흐르던 물이 이내 끊어지듯이 곧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우상, 즉 ‘그들이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와 그들이 택한 동상도’ 그들을 돕지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이 숲 속의 푸른 나무 아래서 예배하였고, 그것 때문에 참된 하나님을 버렸으며, 집안에서 은밀히 예배하던 우상들이 그들을 돕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행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다(29절). 그러면서도 그들은 뉘우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다만 절망하는 빛만 보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으로 인하여도 수치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우상들 자체도 ‘사로잡혀 갈’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46:1,2). 그 우상들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31절). “강한 자는 ‘삼오라기’같아 이내 부서져 토막토막 끊어질 뿐만 아니라 쉽게 불이 붙을 것이라. ‘그의 행위는 불티같아서’ 그 삼오라기를 태울 것이라.”
이 모든 말씀은 다음 몇 가지 사항에 적용될 수 있다. 첫째, 아하스의 몹시 타락한 통치 이후 히스기야 시대에 일어난 복스런 개혁의 활동에 적용될 수 있다. 둘째, 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되돌아오는 것에 적용될 수 있다. 셋째, 복음의 나라와 성령의 부으심에 적용될 수 있다. 이 성령의 부으심에 의해서 신약의 교호는 새 예루살렘, 의의 성읍이 될 것이 틀림없다. 넷째, 그리스도의 재림에 적용될 수 있다. 그때에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완전히 정결하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