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장 설교 말씀은 엘리바스가 욥을 책망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욥은 자기가 당한 문제에 대해서 탄식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인과응보적인 해석을 하면서 네가 잘못했기에 벌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Ⅰ. 엘리바스의 책망〔1〕 4:1-6
(1) 엘리바스는 자기의 변론으로써 이제 욥에게 주게 될 고통에 대하여 사과한다(2절). “만일 우리가 너에게 비난이나 충고의 말을 하면 네가 염증을 내어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우리는 네가 그러리라는 것을 염려하고 있노라.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도다.”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엘리바스는 욥의 현재 상황에 대해 얼마나 부드럽게 이야기하는가. “만일 우리가 너에게 우리의 마음을 말한다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상심케 할 가능성이 있는 말은 비록 그것이 매우 필요한 것일지라도 말하기를 주저하여야 한다. 엘리바스는 자기가 말하려는 것이 진리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친구가 비록 환난 중에 있지만, 이것이 그가 실언을 했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을 경우라면, 단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 두려워서 아무 책망도 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동정일 뿐이다.
(2) 엘리바스는 욥을 두 가지로 책망한다.
1) 그는 특별히 욥이 환난 가운데서 취한 행동에 대해 책망한다. 그는 욥의 나약함과 소심함을 책망한다.
① 엘리바스는 욥이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봉사하였던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욥이 자기의 자녀들이나 종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교훈하였던 것을 인정한다. 욥은 적합한 조언과 위로로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여’ 일과 봉사와 영적인 전투를 잘 하도록 해주었다. 영적인 소유가 풍부한 사람들은 영적인 자비를 풍부히 베풀어야 한다. 엘라바스는 여기에서 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는 이처럼 욥이 행한 선에 대하여 칭찬하므로써 자기가 의도한 책망이 욥에게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엘리바스는 욥이 위로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로 욥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로했는가를 회고한다. 그는 욥의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에 욥이 이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위로를 욥 자신에게는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하면서 불쌍히 여겨 말했다. 엘리바스는 자기의 지식을 가지고 욥을 꾸짖기 위하여 그것을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욥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베푼 것에 대해 마치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 네가 어찌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한 것과도 같다.
② 엘리바스는 욥이 현재 풀이 죽어 있는 것을 책망한다(5절).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이 일이 네게 당하였구나.” 바로 이 말을 사단도 사용했었다(욥 1:11;2:5). 만일 엘리바스가 욥의 고통을 그 절반이라도 절실히 느꼈다면, “그 일이 너를 쳐서 상하게 하는구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욥의 환난을 하나의 사소한 일로만 여기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욥의 원망이 너무 많은 것으로 여겼다. 우리는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만큼 여유를 주어야 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
2) 그는 이 환난이 있기 이전부터 있었던 욥의 일반적인 성품에 대하여 책망한다. 엘리바스는 욥이 사악하고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책망하였는데,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는 욥이 이전에 했던 신앙 고백이 마치 이제는 모두 소용이 없고 허위임이 판명된 것처럼 얼마나 무정하게 욥을 책망하고 있는가(6절).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이 이제는 모두 허위임이 드러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네가 진심으로 처신을 했다면 하나님은 이처럼 너를 괴롭히지 않으셨을 것이고 너도 환난 속에서 이와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이것이 욥이 위선자임을 증명하려고 사단이 목적했던 바로 그 일이었다. 사단 자신으로는 욥이 위선자임을 하나님 앞에 증명해 보일 수 없자, 사단은 욥의 친구들로 하여금 욥 자신이 자기가 위선자임을 고백하도록 설득시키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욥은 자기의 결백함을 굳게 지킬 수 있었고 자신에게 불리한 그릇된 증거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형제들에게 경솔하고 냉혹하게 책망을 퍼붓고 위선자로 정죄하는 자들은 사단의 일을 하는 것이다.
“네가 몰두하고 이야기하던 모든 신앙이 단지 네가 그것으로 인해 더 부자가 되고자 하는 소망과 의뢰함이었다는 것이 이제 드러나지 아니하였느냐? 만일 그 신앙이 진실된 것이었다면 그것이 너를 이와 같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지 못했겠느냐?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 24:10)는 말씀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전혀 은혜와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말은 아니니라.” 사람의 품성을 한 가지 행위만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
Ⅱ. 엘리바스의 책망〔2〕 4:7-11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욥이 위선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욥이 그의 환난을 참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환난 그 자체도 욥에게 불리한 증거로 삼으려 한다.
(1) 선한 사람들은 결코 이렇게 파멸되지 않는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엘리바스는 욥 자신의 관찰력에 호소한다(7절). “생각하여 보라. 그리고 의로운 사람이 너처럼 끊어짐을 당한 자가 하나라도 있는가 내게 제시해 보라.” 만일 우리가 그것을 최종적인 끊어짐이라고 이해한다면 엘리바스의 원리는 진실이다. 의로운 자는 그 누구도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살후 2:3). 그러나 우리가 그 끊어짐을 일시적인 재앙으로 이해한다면 엘리바스의 원리는 진리가 아니다.
(2) 악한 사람들은 흔히 이와 같이 멸망당하였다. 엘리바스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관찰로 보증하고 있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8,9절). “우리는 네가 무슨 신앙 고백을 했든지 간에 네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노라.” 어떤 사람들은 불법과 사악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행했던 잘못과 해로움을 깨닫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대가를 지불 받게 될 것이다. 남을 괴롭게 하는 자들은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엘리바스는 남을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멸망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묘사하고 있다(9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리라.’ 어떤 사람들은, 죄인이 하나님의 입기운과 ‘그 콧김에’ 의하여 멸망 당한다는 이 말 속에서, 엘리바스는 바람이 욥의 자녀들 위에 그 집을 무너뜨린 일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바스는 특별히 사자의 비유를 들어 포학자와 잔인한 박해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10,11절). 히브리어에는 사자에 대해 다섯 가지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것들이 여기에 모두 사용되어, 교만한 박해자들의 갈가리 찢는 무서운 능력과 맹렬함과 잔인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의 포효하는 소리는 그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을 해하는 능력을 그들에게서 제거하실 것이다.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그들은 이웃을 약탈함으로써 자신을 부유케 하지 못할 것이다.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그들은 계승자를 남기지 못할 것이다.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그 사자 새끼들은 늙은 사자들이 그들에게 물어다 주던 먹이를 찾으러 다닐 것이다(나 12:12). 이 어구에서 엘리바스는 마치 욥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노략질하여 그의 재산을 얻었으나, 이제 그의 권력과 재물은 사라졌고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것처럼 욥을 비판하려고 의도한 것 같다.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사람이 이와 같이 능욕을 당하는 것은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Ⅲ. 엘리바스의 책망〔3〕 4:12-21
엘리바스는 불만스러워하고 참지 못하는 것이 곧 죄이며 어리석은 짓임을 욥에게 납득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에 여기에서는 욥에게 관계된 한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엘리바스가 이 이상의 취지를 살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즉 그가 욥을 위선자로서 정죄하려 하지 않고, 욥이 불평한 것에 대해 책망하려 하였다면 그의 이상은 그 책망의 근거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용할 수 있는 기록된 어떤 말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로 일반적인 진리까지도 계시의 특별한 방법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에게 알려 주셨다.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이상이나 음성보다 더욱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벧후 1:19).
(1) 이 말씀이 엘리바스에게 ‘가만히’ 임하였다. 은혜로운 영혼이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는 달콤한 교제들 가운데 어떤 것은 은밀하며,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적인 사역자들을 통하여 하시는 것과 같은 정도로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은밀한 속삭임을 통해 세상에 들키지 않고 그의 백성들에게 확신과 조언과 위로를 전하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12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과 우리가 하늘에 갔을 때 알게 될 것에 비해 볼 때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말씀은 ‘밤의 이상’ 중에서 엘리바스에게 임하였다(13절). 그때 엘리바스는 세상과 그 소란함에서 떠나 있었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조용하고 평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함께 시작되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14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엘리바스에게 임하였으며 이를 통해 엘리바스는 거룩한 방문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2) 엘리바스가 본 환상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15,16절). 그 환상은 사실이었고 꿈이 아니었다. 만이 어떤 못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 환산을 보게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만큼 어리석었다면 거기에는 선하고 악한 영의 환영이 나타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바스는 그의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느낌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그 형상을 분별치 못하였고’ 더구나 그것을 묘사할 수도 없었다. 그의 양심은 눈을 뜨게 되었고 견문이 넓어졌으나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3) 그 말씀은 여전히 작은 음성으로 전달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17절). “죽어야 할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불멸의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어찌 그렇게 생각하거나 가장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욥의 투덜거림과 불만에 대한 책망이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한 척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하나님보다 공평의 원리와 율법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며 더 완전하게 관찰할 수 있겠는가?”
(4) 엘리바스는 천사들이 하나님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18절).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들, 곧 시중드는 종들이며 일하는 종들이다. 만일 세상을 천사들로 다스리게 하고 그들이 단독으로 정무를 행하도록 맡게 한다면 그들은 그릇된 조치를 취할 것이고 모든 것은 지금처럼 가장 훌륭한 상태로 이루어져 있지 못할 것이다. 천사들은 총명하나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신뢰받고 영광받기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추론하고 있다. 하나님과 천사들 사이에 이러한 거리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랴! 인간의 생명을 살펴볼 때 인간은 매우 비천하다(19절). 인간의 가장 훌륭한 상태를 들어 보라.
비록 인간이 짐승들에 비해 존귀하다 할지라도, 거룩한 천사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천한 피조물이다. 천사들은 고결한 영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흙집에서 산다. 인간의 몸이란 흙집과 같은 것이다. 천사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갇혀 있으며, 그 몸은 영혼의 먹구름이며 방해물이다. 즉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다. 천사들은 견고하다. 그러나 인간이 거하는 흙으로 만든 집은 ‘티끌로 터를 삼고’ 있다. 우리는 단지 티끌 위에 서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높은 티끌더미 위에 서 있으나 우리를 바쳐 주는 것은 여전히 흙이며 그것은 곧 우리를 삼켜 버릴 것이다. 천사들은 불멸의 존재이나 인간은 손가락 사이에 있는 하루살이처럼 빨리 눌려 죽을 존재이다. 보잘것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기도 한다.
이간은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것이라고 기록된 바와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피조물이 어찌 신뢰를 받을 수 있겠으며, 천사들에게도 신임을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어찌 인간에게 어떤 봉사를 기대하시겠는가? 인간의 죽음을 살펴보면 인간은 더욱 천하고 신뢰하기에 부적합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20,21절). 그들은 날마다 죽어가며 끊임없이 소모된다.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장점도 사라진다. 아름다움, 힘과 학식은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토록 비천하고 약하며, 어리석고 죄 많으며, 이렇게 죽어가는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보다 의로우며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한 체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의 환난과 다투는 대신에 지옥에 있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