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0장 설교 말씀] 욥(Job)이 고난에 대해서 탄식(욥10:1-22)

욥기 10장 설교 말씀은 욥이 사탄의 고난을 받아서 죽음에 대해서 동경하면서 삶에 대해서 탄식하고 있다. 욥은 갑자기 환란을 당하여 망연자실하면서 탄식한다. 욥의 삶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죽기를 원하고 있다. 욥기를 통해서 우리도 인생에 환란을 만나면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Ⅰ. 욥의 대답〔5〕 10:1-7

1. 욥의 고통에 대한 불평(1)

욥은 분노를 발산함으로써 마음에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기로 결심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욥은 격한 말들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영혼의 고통을 분출시키게 한다. 여기서 욥이 실언을 하긴 했지만 너그러이 봐줄 만한 것이었다

(1) 그는 원망을 하려고 하긴 했지만 그것은 ‘원통함을 발설’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2) 그가 말을 하고자 한 것은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려는 것이지 자기의 확정된 판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잘못된 말을 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이며, 나의 영혼이 아니요 영혼의 고통이리라.”

2.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탄원(2)

그는 불평을 하고자 했지만 그 최초의 말은 기도였다(2절).

열왕기하 14장 아마샤와 여로보암 2세 설교말씀

(1) 즉 그것은 그의 고통의 가시, 곧 죄로부터 구원을 얻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주께서 나를 징계하시니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견디겠나이다. 그러나 나를 정죄하지는 마시옵소서!” 비록 고난 중에 있더라도 정죄는 없다는(롬8장)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위안이다. “주여 나를 정죄하지 마소서. 나의 친구들은 나를 정죄하지만 주께서는 그리 마옵소서.”

(2) 자기의 고난의 참된 이유를 잘 알게 해주시며 그것도 역시 죄라는 것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우리와 더불어 쟁변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하시는 데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3. 욥의 원망 섞인 간언 (3-7)

(1)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혹독한 처분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본성의 자비로움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3절).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내 피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이까.”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악을 행하셨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욥은, 선한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느끼면서도 모든 것이 밝혀질 날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문제, 곧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를 도저히 할 수 없었다.

(2) 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수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고문대에 올려놓고 고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4-6절). 가장 호기심이 많고 통찰력이 있는 육신의 눈이라 할지라도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한다. “독수리의 눈으로도 보지 못한 길이 있다”(욥 28:7).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감추어진 것도 감추어질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만물이 그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 육신의 눈은 모든 것의 외모만 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의 정체를 보신다.

육신의 눈은 곧 지치지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그의 시력은 쇠퇴하지도 않는다.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즉 하나님은 사람이 판단하듯이 판단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을 믿는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단견이 아니시며, 단명하시지 않으신다(5절).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처럼 짧고 악하리이까.” 인간은 경험에 의하여 점점 더 지혜로워지며 탐구를 위하여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은 없고 모든 것은 현재의 일이다.

(3) 욥은, 하나님께서 결백하다고 알고 계시는 어떤 가련한 죄수를 단지 하나님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감금해 두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의 오용으로 보인다고 생각한다(7절).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했지만 여기서는 자기가 죄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대적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내가 부족하지 않다거나 연약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나이다. 그러나 주의 은혜에 의하여 나는 ‘내가 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이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오니 이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심이나이다.”

룻기 3장 나오미의 지시를 따르는 룻 설교말씀

Ⅱ. 욥의 대답〔6〕 10:8-13

(1) 욥은 하나님을 자기의 창조주이자 보존자로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묘사하되 하나님은 자기를 조성하신 자요 보존하시는 자라고 묘사한다.

1) 우리를 만드신 이는 우리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 부모는 단지 우리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의 도구였다. 육체에 생기를 스미게 하는 영혼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만드신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욥은 여기서 영혼과 육체 모두를 주목하고 있다.

① 몸은 ‘흙을 뭉치듯’ 만들어졌다(9절). 토기장이의 솜씨와 뜻에 따라서 진흙이 그릇으로 만들어지듯, 우리도 형체를 갖게 되었다. 태 내에서의 인간 육체의 형성이 우아한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0절). 또한 몇 가지 구체적인 사실의 인용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다(11절). 비록 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이 세상에 오지만 우리 몸은 옷을 입고 무장되어 있다. 피부와 살이 옷이다.

그리고 뼈와 힘줄이 갑옷인데 이것은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다. 아주 치명적인 부분인 심장과 폐가 그렇게 해서 보이지 않도록 옷으로 입혀져 있으며, 다치지 않도록 방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 신체의 감탄할 만하나 구조는 창조주의 지혜, 능력, 그리고 선하심의 생생한 실례이다. 성령의 전이 될 수 있는 이 육체들이 불의의 병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② 영혼이 생명이고 영혼이 바로 그 사람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즉 내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그 숨결이 없이는 몸은 단지 무용한 시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들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령으로 만드셨으며, 우리에게 사고의 능력을 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셨는데 생명은 곧 은혜이다. 이제 욥은 자기의 생명을 짐으로 여겨 생명과 다투긴 하지만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하고 말하던 때보다는 더 나은 마음의 상태에 있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유지시키신다. 하나님은 생명의 등잔에 불을 붙이시고나서, 이제 그 등불이 자체의 남은 기름으로 타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름을 공급하신다. 주께서…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살리시고 생명의 대적들로부터 나를 보호하셨으며 매일의 나의 요구와 필요를 공급하심으로 나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2) 욥은 하나님께 그런 사실을 내세웠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을 지으시기를.

1) “주께서는 나를 지으셨으므로 채찍으로 나를 시험해 보실 필요가 없으며, 내 속에 든 것을 밝혀내기 위하여 나를 고문대에 올려 놓으실 필요가 없나이다.”

2) “주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행동에 의하여 흙을 뭉치듯이 나를 만드셨나이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와 동일한 주권적인 행동에 의하여 나를 다시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3) “주께서는 당신 손으로 하신 일을 파괴하시겠나이까? 주께서는 나를 보존하고 돕지 아니하시며,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시 138:8) 지지하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욥은 예전의 하나님의 은혜와 현재의 하나님의 곤고케 하심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결론은(13절)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라는 것이었다.

Ⅲ. 욥의 대답〔7〕 10:14-22

1. 욥의 격렬한 원망(14,16-22)

그가 반복하고 있는 이 거칠고 불쾌한 말에 있어서 비록 그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용서될 수는 있다. 만약 욥이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경고 삼아서 우리의 심정을 더 좋은 상태로 유지하도록 하자.

(1) 욥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격함과 작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의 가혹함에 대하여 원망하면서 그것을 “가혹함으로 둘러싸인 공의”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욥에서 온갖 축복들을 거두어 가셨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14절).

2)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용납치 않으셨다.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욥은 자기의 고통이 계속되는 동안 하나님의 용서의 위로를 얻을 수 없었고 기쁨과 즐거움의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었다. 하나님 얼굴의 언짢은 기색과 그 손의 회초리를 우리가 보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사랑을 찾아보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법이다.

3)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든지 간에 현재의 하나님의 처사는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15절). 첫째, 만약 욥이 악하다면 그는 저 세상에서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 오며. 둘째, 설사 ‘그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며’ 전처럼(9:15) 용감하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고통으로 너무나도 억눌렸고 기가 꺾여 버렸기 때문에 어떤 위로나 확신도 바랄 수 없다.

출애굽기 23장 여호와의 절기 설교말씀

(2) 욥은 그 처벌의 혹독함을 원망하고 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 벌을 내리시되 아주 혹독한 벌을 내리고 계시다고 생각한다(16,17절).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자처럼 그를 사냥하신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욥을 비상한 어려움 속에 집어넣어 그에게 ‘기이한 능력을’ 나타내시사 그를 많은 사람에게 비범하고 놀라운 인물로 만드셨다. 욥의 고난을 가장 슬프게 만든 것은 욥이 그 고난들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느꼈다는 사실이다. 그 고통은 증가하고 있었으며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밀물이 끝나고 썰물이 시작되기를 바라지만 물결은 여전히 점점 높게 넘치고 있는 것이다.

(3) 욥은 자기의 생명을 원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가 이 모든 고통과 슬픔 가운데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있다(18,19절). “만약 이런 고통이 내 몫으로 정해진 것이었다면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쩜이시니까.’ 왜 나는 거기서 숨이 막히거나 태어나다가 죽지 않았나이까?” 카릴씨(Mr. Caryl)는 이 말을 욥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좀더 너그럽게 생각해서, 여기서 욥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의 삶의 목표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못하게 막는 환경 속에 그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욥은 자기의 고통이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 자기 원수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훼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될까봐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 나의 기운이 끊어졌더라면 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자기의 삶이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욥의 의도였다면, 그것은 잘못된 근거 위에 서있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욥의 겸손한 요청들(15)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1) 하나님께서 그의 ‘환난’을 봐주실 것을 기도한다(15절).

(2)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간의 쉼을 주실 것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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