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설교 말씀은 경건한 욥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욥기 설교 말씀을 통해서 경건하게 살았던 욥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부자였다. 그런데 욥에게 갑자기 시련이 닥치게 된다. 사탄의 시험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갑자기 시련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Ⅰ. 욥의 부와 경건 1:1-3
(1) 욥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욕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마엘 자손으로서 권세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살고 있던 고을은 유브라데 강 유역에 위치한 아라비아 동편의 ‘우스’ 땅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그의 ‘남은 자’를 두신다. 욥과 같이 훌륭한 인물이 우스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스 땅의 특권이었다. 그의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쁘면 나쁠수록 욥은 더욱 훌륭했다. 그의 이름은 욥(Job) 또는 이욥(Ijob)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이름의 원수처럼 미움을 받고 대적을 당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이름이 비탄에 빠져 신음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2) 욥은 매우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나게 경건했으며 자기의 이웃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했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1절). 이 말씀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평가가 참됨을 확신하게 된다.
1) 욥은 경건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즉 하나님을 섬겼다.
2) 욥은 신앙 생활에 거짓이 없었다. 그는 순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도 스스로 고백하는 바와 같이(9:20,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죄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욥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존중하여 순전함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정말 선한 사람으로서 생각이 건전하였고 안목도 순수했다.
3) 욥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정순하였다. 또한 그는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의지가 굳었고 부탁을 받음에 있어서 부탁하는 쪽의 의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4) 욥의 마음에 가득차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욥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제어하는 원리였다.
5) 욥은 옳지 못한 것을 하려고 하는 생각을 두려워했다. 죄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과 혐오감을 가지고 그는 죄악을 피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잠 8:13). 그리고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3) 욥은 부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고 드문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욥은 부유했고 그의 부유함은 그의 경건함을 빛나게 했으며, 매우 선한 그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훨씬 더 많이 마련해 주었다.
1) 욥은 많은 가족을 거느렸다. 욥의 신앙은 탁월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생활은 은둔자나 은거자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요 가장으로서의 신앙 생활이었다.
2) 욥은 자기의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소유물은 막대하였다. 재산은 소유물이라고도 한다. 욥의 재산은 그가 차지했던 땅의 넓이로 묘사되지 않고 다음과 같은 것들로 표시되었다.
① 그의 가축들로 표시되었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3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자마자 곧 식물과 과일로써 먹고 살아가도록 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사람을 풍족하고 크게 만들어 주셨다(창 1:28).
② 욥의 종들의 수로 표시되었다. 욥은 매우 훌륭한 가족 혹은 가정을 소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명예도 얻었고 선도 행했다. 그가 서술하는 바와 같이 그의 재물은 그의 지혜와 함께 그로 하여금 자기 나라에서 명예와 권력을 가지게 해주었다(욥 29장). 그는 정직했기 때문에 부유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정직이야말로 최상의 정책이요, 경건과 자비 또한 번영을 얻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욥의 경건과 번영에 관한 이야기가 그의 큰 환난에 관한 기사보다 앞에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경건과 번영이 인생의 환난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욥의 친구들이 오해했던 바와 같이 경건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경솔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처럼 번영 또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한다(사 47:8).
Ⅱ. 욥의 경건한 생활 태도 1:4,5
욥의 번영과 경건에 대한 기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1) 욥이 자기 자녀에게서 얻은 큰 위로는 그의 번영의 일례로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세적인 위로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 욥은 다음과 같은 것에 위로를 받았다.
1) 자기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세상에 정착하는 것을 보는 것 : 욥의 아들들은 모두 분가하였고 아마도 결혼하였을 것이다.
2) 자기 자녀들이 사업이 번창하여 배불리 먹을 뿐 아니라 서로간에 잔치를 베풀어 줄 수 있는 것.
3) 자기의 자녀들이 건강한 것을 보는 것.
4) 특히 자기의 자녀들이 서로간에 우애있게 연합하여 사랑하며 살고 그들 가운데 다툼이나 반목이 없는 것을 보는 것.
5) 아들들이 그 누이들에게 매우 친절하여 자기들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보는 것.
6) 자녀들이 자기들 소유의 집에서 잔치를 베푼다는 것.
(2) 욥이 자녀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점은 그의 경건의 일례로 주목할 만하다. 자기 자녀들의 영적인 축복을 위한 욥의 경건한 관심을 살펴보라(욥 1:5).
1) 그는 경건한 경계심을 가지고 자녀들을 경계하여 살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자녀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한, 우리 자신과 소중한 자녀들을 경계하며 살펴야 한다.
2) 그는 자녀들의 잔칫날이 지나자마자 자녀들을 불러서 엄숙한 종교 의식을 집행하였다.
3) 그는 자녀들로 하여금 엄숙한 의식을 예비하도록 불렀다.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5절). 그들 자신의 양심을 반성하며 잔칫날에 잘못 행한 것들을 회개하도록 가르쳤다. 이와 같이 그는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권위를 계속 발휘하였고, 그의 자녀들도 비록 분가하여 따로 살았지만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였다. 여전히 욥은 집안의 제사장이었으며, 자녀들도 재산 상속에 참여하는 것보다도 욥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더욱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욥의 제단에 모두 참석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은혜를 줄 수는 없다(성결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부모들을 적절한 경고와 권유로써 자녀들의 성결을 촉진시켜 주어야 한다.
4) 그는 자녀들을 위하여 제물을 드렸다. 욥은 아브라함처럼 그의 가족들을 위한 제단을 쌓았다. 그는 이런 특별한 경우에 한 자녀에 하나씩 ‘그들의 명수대로’ 평소보다 더 많은 제물들을 드렸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나는 그의 특별한 기질과 재능과 상태에 따라 기도드렸나이다.” 이런 기도도 제단을 쌓는 일과 함께 반드시 수반되어야 했다. 그의 마음이 자기의 할 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찍 일어났다. 욥은 자기 자녀들이 제물을 드리는 자리에 참석하도록 권유했다.
5) 그는 ‘항상’ 이와 같이 행했다. 회개와 믿음의 행위는 자주 되풀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범죄를 자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정당하게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섬겨야 한다.
Ⅲ. 욥을 시험하려고 허락을 얻는 사단의 악의 1:6-12
욥은 아주 부유하고 큰 자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지혜롭고 선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욥이 이룩한 번영이 너무도 굳건하여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짙은 구름이 욥의 머리 위에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욥의 탁월한 경건 때문에 그를 매우 증오한 마귀는 그를 괴롭힐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과 사단과의 대화가 비유라고 생각해도 전체적인 욥의 이야기의 신빙성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선지자 미가야의 비유와 비슷한 경우로(왕상 22:19이하), 이것은 단지 의인을 향한 마귀의 궤계와 그 궤계로부터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드러내 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1)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사단이 섰다(6절).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선한 것의 적(사단의 원래 의미가 그러하다)인 사단은 와서 ‘여호와 앞에 선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에 끼어 들었다.
1)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 : 족장 시대에는 신앙을 고백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다(창 6:2). 그들은 그 당시 신앙의 모임을 가졌고 그 모임을 위해 시간을 정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사단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모였을 때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혼란시키고 교란시키기 위해 그들 가운데 있었다.
2)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모임 :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욥 38:7). 사단은 원래 하늘에 있는 천사들 중에 하나였다.
(2)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어떻게 거기에 왔는가 하고 물으신다(7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은 그가 어디서 왔는가를 잘 알고 계셨으며,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곳에 왔는지도 알고 계셨다. 즉 선한 천사들이 선한 일을 하려고 오는 것같이 사단은 고통을 주려는 허락을 얻기 위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이 하는 대답을 통해서 그들의 동태가 파악되고 있으며 통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3) 사단의 대답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여행에 대한 것이었다.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1) 사단은 어떤 선한 일을 행하였다고 가장할 수 없었다.
2) 사단은 자기가 해로운 일을 행했다는 것을 자백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사단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는 것이다. 사단은 매우 교묘하고 민첩하며 부지런하게 땅의 모든 구석을 꿰뚫어 보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그 유혹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하여 있을 수는 없다.
3) 사단의 말속에는 자신의 특성을 얼마만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거만하게 자신의 특성들을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단은 자신의 특성들을 짜증스럽고 불만섞인 투로 말했을지도 모른다. 사단은 이리저리 걸어 다녔으나 휴식을 얻을 수 없었다. 마치 놋 땅의 가인처럼 도망자나 방랑자로 돌아다녔다. 아마도 사단은 “내가 여기 저기 다니면서 열심히 일했나이다. 그것은 해를 끼칠 기회를 찾기 위한 일이었나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사단에 욥에 관하여 질문하셨다(8절).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하나님께서 욥에 대하여 얼마나 명예롭게 말씀하시는가. “거기에 내 종 욥이 있는데, 그와 같은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선한 성품에 관하여 사단에게 얼마나 적절하게 설명하시는가. “네가 내 종 욥을 마음에 두었느냐?” 이 말씀에는 이 세상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것을 자랑하려는 사단에게 답하시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욥은 나의 충성된 종이니라.” 사단이 우쭐거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승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았다. “사단아 나는 네 일을 알고 있노라. 네가 욥에게 불리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왔도다. 그러나 네가 그를 유의하여 보았느냐?”
(5) 마귀는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비열하게도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 욥을 불리하게 하려고 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단은, 욥이 어떤 신앙의 대가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위선자임을 암시하였다(9절).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을 칭찬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그분 이실지라도 그 칭찬하는 소리를 마귀가 어떻게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자기들 외에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귀와 같은 자들이다. 사단이 욥은 위선자라고 주장하지 않고 “그가 그렇지 않나이까?”라고 묻기만 한 것은 얼마나 교활한가! 이것은 중상하는 자들과 아첨꾼들과 험담꾼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을 때묻는 방법으로서 그런 사실을 암시하려고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매우 부당하게도 사단은 욥이 위선자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욥이 대가를 목적으로 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정말 옳은 말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왜냐하면 경건은 큰 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의 말대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을 얻을 수 없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부당하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심하게 고난받는다는 이유로 그를 문책했고, 사단은 욥이 크게 번영한다는 이유로 그를 문책했다.
(6) 욥의 번영에 대하여 사단은 불만을 품었다(10절).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생명을 산울로 두르며,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의 자연적인 생명을 두르신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르거나 불의한 가운데 있는 욥이 아니라 정직하고 근면한 가운데 있는 욥을 형통케 하셨다.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마귀는 그것을 매우 분하게 여겨 말했다. “나는 주께서 그를 산울로 두르신 것을 보았나이다.” 그는 그것을 보고 상심하여, 욥이 하나님을 섬긴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매우 형통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7) 사단은 만일 욥을 파산시키도록 허락을 얻기만 한다면, 위선자라는 것과 그의 신앙이 대가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단언하였다. 사단은 말했다. “그를 이렇게 되게 해보소서. 그를 가난하게 만드시고 그에게 눈살을 찌푸리시며, 주의 손으로 그를 치신 후 그의 신앙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소서. 주께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으시면 그가 어떠한 자인지 드러나리이다.” 사단은 환난이 욥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얼마나 심술궂게 말하고 있는가! “욥은 믿음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기까지 하리이다.” 하나님은 욥이 그 당대에 가장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이제 만일 사단이 그가 위선자임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충성스러운 종을 하나도 가지고 계시지 못하며 세상에는 참되고 진실된 경건같은 것은 없으며 믿음은 모두 허위고 사실상 사단이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왕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8) 하나님께서는 욥의 신실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사단에게 욥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다.
1)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그러한 허락을 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욥의 영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세대를 통해 환난 당하는 자기 백성을 격려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키질을 받도록 하셨던 것처럼, 욥도 시험을 당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피셨다(눅 22:32).
2) 하나님께서 마귀를 ‘쇠사슬로 묶어두고 계시다’는 것은(그의 백성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다. 사단은 먼저 하나님께 청하여 허락을 얻지 않고서는 욥을 괴롭힐 수가 없었으며 더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외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12절). “그의 몸에는 상관말고 오직 그의 재산만 간섭하라.” 마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렇게 제한되어 있다.
(9)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에서 사단이 떠났다. 사단은 이내 나가서 여기 저기 다니거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지 않고, 욥을 가난에 몰아넣기 위하여 곧장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욥은 여전히 자기의 의무를 주의하여 행하고 있었으며, 그 일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Ⅳ. 욥에게 닥친 재앙 1:13-19
(1) 사단은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기 시작하던 바로 그날 욥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었다(13절).
(2) 모든 재앙들은 욥에게 한꺼번에 닥쳐왔다. 즉 한 전달자가 나쁜 소식을 전할 때 또 다른 전달자가 왔고, 그가 이야기를 끝내기도 전에 셋째, 넷째 전달자가 곧 뒤따라 왔다.
1) 그것은 그의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한층 더 욥을 불쾌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2) 그것은 욥이 자신을 반성하고 판단하여 겸손하게 복종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참화들에 짓눌려 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재앙은 욥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고 그의 즐거움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1) 그의 소유는 ‘소가 오백 겨리’였고 ‘암나귀가 오백’이었으며 그것들을 돌보기에 충분한 종들이 있었으나 이 모두를 한꺼번에 잃어 버렸다(14,15절). 그의 이웃인 스바 사람들은 소와 암나귀들을 약탈하여 갔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최선을 다했던 종들을 살해했는데 ‘한 사람만 피했다.’ 사단이 해악을 끼치도록 하나님께 허락을 받았을 때 사단은 그런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의 도구가 되어 줄 사악한 인간들을 얻으려고 힘들을 필요가 없었다.
2) 그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있었으며 목자들이 그것들을 지켰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에 의해 이 모두를 한꺼번에 잃어 버렸다(16절). 욥은 스바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불의와 잔혹함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소식은 욥으로 하여금 곧 위를 쳐다보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욥의 모든 양들과 목자들이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불에 의해 한꺼번에 다 타버렸고, 단지 한 명의 목자만이 살아남아 불쌍한 욥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이것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하도록 유혹할 만하였다. 전달자는 번개를 ‘하나님의 불’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내려진 이 멸망의 소식은 욥을 얼마나 두렵게 했겠는가!
3) 그에게는 ‘약대가 삼천’이 있었으며 그것을 돌보는 종들도 있었다. 그런데 욥은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잃었다. 갈대아 사람들의 세 무리가 와서 그것들을 끌고 갔고 종들을 죽였다(17절). 악인의 길은 형통하고 그들이 노획물을 얻는 반면에 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갑자기 죽임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의는 매우 깊어서 우리가 그 깊이를 잴 수 없다(시 36;6).
4) 그의 가장 귀하고도 소중한 재산은 열 자녀들이었다. 비극의 결말을 짓는 소식이 욥에게 동시에 전해졌는데, 그것은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고 있던 집이 무너지자 그들이 그 속에 파묻혀 죽었으며, 그 소식을 전하러 온 하인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그들을 시중들던 모든 종들도 죽었다는 것이었다(18,19절). 이것은 욥의 가장 큰 손실이었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마귀는, 다른 소식들이 욥으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 실패한다 할지라도, 이 소식은 욥으로 하여금 반드시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여겼다. 자녀들은 우리의 분신이다. 그들과 헤어지는 것은 매우 가혹한 일이며 어떤 것보다도 선한 자의 심금을 울린다. 오랫동안 그의 근심이 되기도 하며 희망이 되었던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게 된 것은 욥에게는 골수에 미치는 한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함께 갑자기 죽었다. 그들은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지내던 중에 죽었다. 만약 그들이 기도드리던 중에 죽었다면 욥은 그것을 더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의 자녀들은 욥이 그의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림으로써 그들의 위로가 가장 필요할 때에 죽임을 당했다.
Ⅴ. 욥의 굳은 지조 1:20-22
사단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가 욥을 치도록 허락받은 모든 일을 행했다. 동방 사람 중에 가장 부유한 자로 보았던 욥이 하루 낮 동안에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가난해졌다. 만일 사단이 말한 대로 욥이 신앙을 가졌던 본질적인 이유가 자신의 재물 때문이었다면, 이제 재산을 잃었으니 분명히 신앙을 버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환난 속에서도 경건한 욥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마귀는 거짓말쟁이이고 정직한 욥은 자라는 것을 충분히 판명해 주고 있다.
(1) 욥은 환난에 빠진 사람처럼 처신했다(20절).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이것은 큰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욥이 자기를 치신 여호와의 손을 깨달았다는 것을 부여 주고 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 모든 진통들 속에서도 욥은 참았고 의연하게 자제하며 자기 영혼의 평온을 유지했다. 그가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자기 자녀들의 죽음을 듣고 난 후였다. 그 소식을 듣자 일어나 자기의 겉옷을 찢었다. 세속적이고 믿음없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졌으니 그것을 먹을 입들도 없어진 것은 참 잘된 일이로다.” 그러나 욥은 더 귀한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그의 자녀들을 남겨 두셨다면 비록 그들을 위해 줄 것은 거의, 아니 아무 것도 없다 해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이레’ 곧 여호와께서 마련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 욥은 환난 속에서도 지혜롭고 선한 자답게 처신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외적인 환난으로 인한 해악보다도 죄로 인한 해악을 더 삼갔던 것이다.
1) 그는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했고, 어떻게 풍부해지며 어떻게 빈곤해지는가를 알았으며,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했다.
2)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그 자신의 영혼의 소유물을 빼앗기거나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숙고함으로써 스스로를 평정시켰다. 그는 인생의 일반적 상태를 추론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21절).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7에서 욥의 이 말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 이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을 함으로써 욥은 모든 것을 잃었으면서도 잠잠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단지 적신이라고 생각했을 뿐 불구가 되었다거나 상처를 입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지만, 그의 믿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욥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왔을 뿐이었고, 단지 그가 마지막에 있어야 할 상태에 처한 것 뿐이다. 그리고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빨리 옷을 벗었던 것 뿐이다. 오히려 조금 빨리 짐을 벗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 훨씬 전에 옷을 벗는다면 어느 정도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잘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좀더 우리는 그 불편을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3) 그가 이렇게 훌륭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순전함이 시험을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욥이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찬송했고, 따라서 그 자신이 정직한 사람임도 입증했다.
① 욥은 이전에 누렸던 은총 속에서나 그가 지금 겪고 있는 환난 속에서나 하나님의 손을 인정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주신 이가 아울러 취하시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하실 수 없겠는가? 이러한 일들을 행하신 조물주를 욥이 어떻게 바라보고 주목하는가를 보라.
② 욥은 은총을 누릴 때나 환난을 당할 때나 하나님을 경배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그는 엎드려 경배했다. 환난을 당한다고 해서 경건의 훈련을 잊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슬프다고 해서 씨뿌리는 일을 중지해서는 안되며, 예배드리는 일을 중단해서도 안 된다. 욥은, 선한 목적으로 자기에게 환난을 주신 것과 환난 중에서도 자비롭게 후원해 주신 것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는 행복하게 되리라는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③ 본문에서 성령께서 환난 가운데 있는 욥이 지조를 지키고 훌륭히 처신할 수 있도록 베푸신 영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 그는 칭찬을 받으며 시련을 극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