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셨다. 제자를 불러서 삼고 세례를 베풀었는데 세례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다. 율법주의 신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제 예수는 추수 때가 되기 넉 달 전에 유대를 떠나셨다(35절).
Ⅰ.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말 뿐이다.
즉 그는 “제자들을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많은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자를 삼는 것,” 즉 사람들을 자기의 뜻에 맞게끔 적응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권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 태어날 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Ⅱ. 그는 “제자를 삼으시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그러나 사실은 제자들이 추종자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었다(2절). 예수는 자기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모두 친히 세례를 주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제자들을 존중하고 싶었다. 사실은 장래의 일을 위해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의 종들이 행하는 일은 모두가 자기가 직접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밝히 보이신 것이다.
Ⅲ.예수는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또 세례를 주었다.”
그는 당시 요한이 활동했던 것보다 더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이 일생 한 것보다 더 많이 했다. 그리스도의 대화는 요한의 대화보다 더 신임을 받았다. 그의 표적들은 확신을 주고, 그의 치유행위는 많은 사람들을 끌었다.
Ⅳ. 바리새인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
즉 그들은 예수가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첫 공적인 활동에서부터 시기의 눈으로 보아와서, 그에 관한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요한을 제거했다고 여기고(이 때에 요한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스스로들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요한이 활동했던 것보다 그들에게는 더 큰 고민거리인 예수가 나타났다. 또 다시 증인이 일어날 것이다.
2. 그들에게 염려가 되는 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많이 얻었다(삼았다)는 것이다. 복음의 성공이란 그 적들에게는 분격을 일으키는 일이다. 어둠의 세력이 복음의 성공에 대하여 격분케 될 때는 하나의 좋은 징조로써 그 징조는 점점 커지게 된다.
Ⅴ. 우리 주 예수는 자기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러한 소식이 들어갔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소식자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감추려는 자들로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누구도 “여호와께서 모를 만큼 깊이 자기들의 뜻을 숨길”(사 29:15) 수는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여기서 바로 “주님”(영문은 “여호와”와 같은 단어임-역주)이라 호칭되고 있다. 그는 이미 바리새인들이 들은 말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것은 거짓이었다. 예수가 당시에 벌써 “요한보다 많은 세례”를 주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예수가 요한보다 더 골치거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Ⅵ. 우리 주 예수는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1. 예수는 굉장히 핍박을 받을 것 같기 때문에 “유대를 떠났다.” 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핍박으로 나타났으며, 그의 활동 초기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망치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사악한 술책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음모를 피하려고 그리스도는 유대를 떠나서,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갈릴리로 갔다. 이 지방에서는 그들의 시기의 눈초리를 피할 것 같았다. 그 이유로써
(1) 하나님의 뜻이며,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시킬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7:30). 그는 아직도 증거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 위험 속에 노출시키지도 않았다.
(2) 그가 유대에서 모았던 제자들이 어려움을 견딜 수 없으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싶었으리라.
(3) 여기에서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한 규칙을 제시했다. “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핍박할 때는 다른 장소로 피하라.” 죄짓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때에도 고난을 당하라고 우리를 부르진 않으셨다. 그러므로자기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의 거처를 피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표적을 행사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구한 것은, 자기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있는 방법과 격려를 주기 위해서이다.
2. 예수가 갈릴리로 가심은, 그 곳에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곳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 반면 적들이 소수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지금 갈릴리로 가신 것은,
(1) 거기에서 요한의 전도가 그를 예비토록” 하였기 때문이다. 즉 헤롯의 관할 하에 있는 갈릴리는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최후의 장소이었기 때문이었다.
(2) 요한이 옥에 갇힘으로써 지금 그 장소는 예수가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예수가 지금은 등불을 등경 아래 감추어 사람들의 생각이 요한과 자기 자신 때문에 나누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이 선한 일군들의 자유와 구속이 모두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고 있다.(빌 1:12). 안전을 찾기 위하여 그가 갈릴리로 간 것은 어떤 목적 하에서인가? 요한을 핍박한 헤롯은 결코 예수의 저항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켐니티어스(Chemnitius)는, “경건한 자들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지만, 그들 자신은 피해 갈 사람이 없다. 그들에게는 피난처를 줄 자가 그리스도뿐이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주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