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 예수님 말씀은 바리새인 중의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대화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새롭게 거듭나서 중생하는 것을 말씀했다.
Ⅰ. 니고데모와 중생 3:1-21
앞 장의 마지막에서 볼 때 믿는 자는 많았으나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실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1. 니고데모(1)
니고데모, 그는 누구인가? 권세있고 고귀하다고 불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며 몇몇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관원 중에도 흔치 않은 사람이요,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사람이요,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학문으로 훈육받은 바리새인이요, 학자였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예루살렘 당국자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좋지 않은 풍조가 있었으며 어떤 관원들은 그러한 풍조에 쉽게 휩싸였다. 니고데모는 자기의 지위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될 때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엄위로운 호칭(2)
(1) 니고데모가 방문한 시간 :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니고데모는 예수의 대중적인 공개 강연을 듣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그가 예수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장소에서 혼자서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니고데모는 이 호칭을 밤에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첫째,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은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매일 공적 사역에 매여 계셨으므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리스도의 시간 일정을 잘 살펴서 쉬시는 시간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대적을 갖고 계셨으므로 니고데모는 특히 그리스도께 대하여 적개심을 많이 품고 있는 대제사장들의 눈에 띄이지 않게 아무도 모르게 그리스도께로 온 것이었다.
이는 참으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둘째로, 그의 행동은 대단히 열심있는 행동이었다. 저녁 시간이나 밤 시간의 일부를 그리스도와 대화하는데 이용함으로써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와 대화하지 않는 사람보다 오히려 시간을 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거나 졸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참 지식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빨리 그 도시를 떠나시려는지, 지금 이 유월절과 다른 절기 사이 어느 때에 다시 나타나시려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밤이라면 그리스도와 대화하는 일이 더욱 자유로울 것이며 소란스럽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두려워하는 겁쟁이의 태도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뛸까봐 두려워 했으며 부끄러워 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왔던 것이었다. 비록 그가 밤에 왔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그의 고결함을 인정하시어 그를 반갑게 맞아 주시므로써 그의 사역자들에게 비록 연약할지라도 훌륭하고, 선한 시작(출발)이라면, 격려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지금은 니고데모가 밤에 그리스도께 나아 왔지만 훗날에는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요 7:50,19:39). 은혜는 처음엔 단지 겨자씨 한 알에 불과하지만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이다.
(2) 니고데모가 부른 칭호 : 니고데모는 즉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내놓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랍비라 부르고 있다. 랍비란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그에 대하여 높이여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범접하기 어려운 비할 데 없는 곳에 계신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1)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주장 :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적 영감과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교사가 되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칼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힘으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자기의 주장에 대한 그의 확신 : 우리가 즉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나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이 아주 널리 알려진 사실이요 자명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3) 이런 확신의 근거.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여기 이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사려깊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탐구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예수께서 가르치심 교훈과 행하신 이적을 조사해 볼 이유가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이적들이 진정한 이적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납득하였고 그 이적에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써 그가 속한 계급의 사람들의 대세와는 반대 방향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행하신 이적에서 무엇을 추론해 내느냐에 따라 향방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분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영접해야 할 것이다.
3.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강화(3-21)
(여기에서 11-12절을 먼저 살펴 보라.) 여기에서 우리 주께서는 다음에 네 가지 즉 첫째, 중생 또는 신생의 필요성과 본질에 대하여, 둘째, 복음 진리의 확실성과 탁월성에 대하여, 셋째, 자신이 세상에 오신 위대한 뜻과 믿는 자의 행복에 대하여, 넷째, 불신앙과 무지로 일관하는 자들의 비참한 참상에 대하여 강화하고 계시다.
(1) 중생 또는 신생의 필요성과 본질(3-8절).
1) 이 중생의 진리는 니고데모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3절).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사실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즉 그는 거듭나야 했다. 니고데모가 이제 곧 나타날 하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일찍부터 그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신생에 해당하는 성령에 속한 변화가 없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상태의 변화가 올지라도 그에게 전혀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니고데모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 인정한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가지고 오셨으니 이 계시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는 욕구가 나타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시를 선언하신 것이다.
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중생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①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 :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우리는 옛 생명으로 살지 않고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출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며, 다시 거듭 태어난다는 말은 곧 새롭게 시작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낡은 건물을 수리해 보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직 기초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은 새로운 본성, 새로운 도리, 새로운 감성, 새로운 목표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되 아노오덴(a oothen)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다시 그리고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하며 새롭게 생기를 얻어야 한다.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러한 세운 출생은 하늘에서부터 연유한다. 신생은 곧 신적이며 천상적인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②이러한 중생의 필수 불가결성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본성)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로도 받을 수가 없다. 중생은 이제와 금후의 우리 행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일의 성질상 우리가 거룩하지 않다면 결코 행복하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 나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엄숙하게 강조된 중생의 필요성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니고데모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살펴보자.
㉠니고데모는 이 진리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4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이 나타난다. 그 하나는 그의 지식의 취약성이다.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니고데모는, 마치 영혼과 육체 사이에 뼈가 새로이 형성되지 아니 하고서는 심령을 새로이 소성시킬 수 없는 그러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태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누가 한 사람의 이스라엘인으로 태어나고 양육받은 것보다 더 훌륭하게 태어나서 양육받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그들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서나 다시 태어나거나 새롭게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여겼지 유대인,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 거듭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와 같이 자기들의 처음 출생을 자랑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가르침을 받으려는 그의 진지한 태도이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난해하다고 해서 그리스도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의 무죄를 시인한다. “주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시켜 주십시오. 내게는 그 말이 수수께끼만 같습니다. 내 머리로는 사람이 그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캄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께 속한 일에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조차도 우리는 계속해서 지식의 매개 수단을 활용해야만 한다.
㉡이 위대한 중생의 필수성에 대한 진리는 우리 주 예수께 의하여 밝혀지며 좀 더 설명되고 있다(5-8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론을 듣고 자신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여 확언하고 계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5절). 비록 니고데모가 중생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전과 같이 적극적으로 중생의 필연성을 강조하신다. 복음의 교훈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복음의 교훈에 대한 의무를 피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보여 주신다.
첫째, 이러한 복된 변화의 조성자가 누군지, 즉 그 일을 역사하시는 분이 누군지를 보여 주신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성령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5-8절). 그러한 변화는 우리 자신의 어떤 지혜나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의 복 된 성령의 권능과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이 변화의 본질과 그 역사를 받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영이다. 중생한 사람들은 신령한 지음을 받았다. 거듭난 자들, 곧 신령하게 지음을 받은 자들은 이성적이고 꺼질 줄 모르는 불멸의 영혼의 명령과 주장에 따라 육을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 변화의 필수성을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므로 일의 본질상 이러한 변화가 필수적임을 보여 주신다(6절).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듣게 된다. 즉 우리는 육이다. 영혼은 여전히 영적 실체이긴 하지만 육과 결합되어 육의 뜻에 좌지우지되며 육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이라 부른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러한 상태로는 영이신, 즉 신령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교제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렇게 되었는가? 육으로 태어나므로 그렇게 된 것이다. 타락한 본성, 즉 육신은 우리의 처음 출생에서 비롯되며 새로운 본성, 즉 영은 두 번째 출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설혹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니고데모가 수백 번 그 어머니 뱃속을 들락날락 할지라도 문제의 핵심을 고치지 못하고서는 여전히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따름이다. 부패와 죄는 우리의 본질 안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악 중에서 만들어졌다(시 51:5). 그러므로 새로운 겉옷을 입는다거나 새로 얼굴을 단장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우리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의 말씀 가운데서 그 필수성을 강조하시고 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7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변화의 필수성을 말씀하셨다. 심령을 고치시는 위대한 의사 선생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거듭나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좇아 행해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본질, 우리 본성의 타락을 생각해 볼 때, 중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기이히 여길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이 필요한 유일의 것으로 그렇게 안될 일이다.
넷째,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를 비교하므로 설명되고 있다. 그 하나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이 물로 비유되고 있다(5절). 그리고 또 하나는 거듭난다는 것은 곧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말이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한 영혼을 성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성령께서 물과 같이 그 영혼을 정결케 하며 그 더러움을 씻어 준다는 사실과 물이 상처입은 사슴으로 해갈시키고 지친 여행자를 신선하게 하듯이 그 영혼을 시원하고 신선하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행하였으며 자신이 또한 베풀어 주기를 시작했던 세례 의식을 염두에 두셨으리라 짐작된다.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겠다는 그 말은 신령한 영적 은혜를 나타내는 가견적 표증으로서, 물로 씻는다는 사실에 의해 성령에 의한 중생을 표상하셨음에 틀림없다. 또한 성령에 의한 중생의 사역이 바람에 비유되고 있다. 발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헬라어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이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임의로 역사하신다. 성령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대로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원하는 사람을 원하시는 정도로 감화시키신다(고전12:11).
성령께서는 강력하게 그리고 분명한 효과가 나타나도록 역사하신다. 그것이 바로 네가 그 소리를 듣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원인은 감추어져 있지만 그 효과는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신비스럽다. 그는 비밀스런 감추인 방도로 역사하신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이 어떻게 임해서, 어떻게 작용되는지는 우리에게 수수께끼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식과 방법은 하나의 신비이다.
(2) 복음진리의 확실성과 엄위.
1) 니고데모의 여전한 의의 :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있을 수 있나이까(9절). 중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가르침에 대한 그리스도의 설명이 그에게는 더욱더 분명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생이 반드시 필요하게끔하는 본질 또는 보성의 타락(오염)이란 말이나. 중생을 실제로 효과있게끔 역사하시는 성령의 방도란 그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운 것이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도 자기들이 기꺼워하는 이상으로 기독교의 진리들을 믿거나, 그 법칙에 복종하지 못하는 곳이다.
만일 그 사람들이 배우기를 선택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의 선생이 되실 것이다. 니고데모는 결국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무지를 시인하였다. “그 일들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 능력으로는 그 사실에 이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이 가르침이 그에게는 불가해한 것이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중생이 필수적이라는 이 진리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2) 니고데모의 어리석음과 무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10절), 중생의 교리를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설명해 준 가르침조차 이해할 수도 없느냐? 이 말씀은 첫째,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자처하지만 스스로는 의의세계에 대해서 무지하며 서투른 자들에 대한 꾸지람이며 둘째, 종교상 의식이나 개념, 성경의 미세한 부분이나 성경에 대한 비평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실제적인 문제는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이라할 것이다.
여기 이 꾸지람에는 두 가지 사실이 단호하게 지적되어 있다. 그 하나는 니고데모가 태어나 자란 곳, 곧 이스라엘이라는 말로 이스라엘은 신성한 계시가 존재했던 장소이다. 니고데모는 구약으로부터 그 사실을 배울 수 있었을 터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이와같은 사실, 이렇게 필수적이며 위대하며 신성한 사실에 관하여 무지했다는 점이다.
3) 복음 진리의 숭엄함과 확실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강화(11-13절).
①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들이 매우 확실하여 그 진리에 우리를 맡겨도 된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11절). 그리스도의 진리는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실한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는 많은 이유를 세상에서 가지고 있으며 그와 같이 우리의 영혼을 그 말씀 위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분이 알고 계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 일이 이렇게 확실하고 이렇게 분명함에도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②비록 평범하고 지상적인 것에서 빌어온 언어와 표현으로 전달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대단히 숭엄하며 하늘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이 12절에 암시되어 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즉 “사람들에게 더욱 쉽고 이해하기 좋게 새로 태어난다거나 바람과 같은 땅의 것을 취해서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얘기하고 너희들이 쓰는 언어로 어린아이에게 얘기해 주듯 혀 짧은 소리로 얘기해 주어도 너희는 내 가르침을 깨달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이 친숙한 표현도 거침돌이 된다면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된 신령한 일들과 추상적인 사상들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
복음의 내용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탐구할 수 없는, 도저히 이성의 힘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하늘의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땅에 속한 자라는 우리의 존재 구조와 땅 위에 거하는 자라는 위치를 감안하여 우리로 신령한 것에 더욱 쉽게 친숙하도록 우리에게 땅의 일을 말하시어 감지할 수 있는 것들로 신령한 일에 대한 매개물을 삼으셨다. 땅 위의 것은 속되기 때문에 멸시를 받지만 하늘 위의 것은 난해하여 무시된다. 그리하여 어떤 방법을 취하든지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게 되는 것이다.
③우리 주 예수 오직 그분만이 이와 같이 확실하게, 이와 같이 숭엄하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계시하기에 적합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절).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우리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실 수 있었다. 니고데모는 선지자라고 그리스도를 호칭했었지만 그리스도가 구약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 보다 더욱 크신 분이심을 인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 어느 누구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줄 가르침을 받고자 기다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의지)을 나타내 보여 주실 수 있으시다. 바로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오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되물으셨다.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인 자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에게 하늘 일의 일례를 보여 주신다. 인간의 영혼이 중생한다는 사실이 그러한 신비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신 사실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 안에 구별된 두 가지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므로써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는 자기의 능력에 대한 하나의 증거를 제시하신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형성된 교제는 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에게 보냄을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보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과, 신적 경영에 대한 그의 내밀한 인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명시를 나타낸다. 신약은 우리 인간을 가르치고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준다. 여기에 그의 사랑이 있다.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야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되어져 왔었다. ㉢그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땅 위에서 니고데모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계시지만 현재에는 하나님으로서 하늘에 계신 것이다.
(3)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신 자신의 위대한 계획과 그를 믿는 자들의 행복에 대하여 강론하신다(14-18절).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을 찾아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을 생명에로 복귀시키시려고 오셨다는 전 복음의 핵심 내지 진수를 대하게 된다. 여기 이 구원의 대척점에는 정죄가 있다(16-18절).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뱀에 쏘였던 이스라엘 자손이 구리 뱀을 올려다 봄으로써 치유받고 소생했던 것처럼, 우리를 치유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①죄라는 것의 사망적이며 파괴적인 본질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죄의 죄책은 불뱀이 물은 상처의 통증같은 것이며 오염의 힘은 거기에서 퍼져들어간 속성같은 것이다. 율법의 저주는 불뱀과 같은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이다.
②이와 같이 치명적이고 운명적인 질병에 대한 강력한 치유책이 예비되었다. 불쌍한 죄인들의 처지는 그야말로 개탄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절망뿐일까?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 처지가 절망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이스라엘 자손들을 치유시켰던 것은 바로 놋뱀이었다. 그 놋뱀 또는 구리 뱀은 불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주 적절하게 예표하는, 독도 없고 쏘는 것도 없는 모형 뱀이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놋뱀과 같이 전혀 해를 끼치는 것이 없으시다.
그 놋뱀은 만들어져 장대 끝에 달려 높이 들리워 치켜 세워졌는데 그렇게 인자도 십자가 위에 올려 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높이 올리워지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올려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올려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그가 들리우는 것을 말한다(요 12:32-33).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으로 들려 올려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우편에 들리워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으로 들리워 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드리우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이 영원히 공포되고 전파되는 중에 들리우신다. 이와 같이 들리우시는 이유는 그렇게 들리우시므로써 죄인들을 치료하시기 위한 것이다. 염병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치료책도 처방도 마련하셨다. 배상액, 또는 몸값을 준비시키신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다. 우리가 거부했던 그분이 바로 우리의 평안이신 것이다.
③이 치료책의 적용 방법. 믿음에 의한 적용법이다. 이 준비된 치유책을 올려다 본 사람은 누구나 쾌유되었다(민 21:9). 하나님께서는 ‘보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고 말씀하셨다. 즉 바라보고 살도록 하자.
④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봄으로 우리에게는 커다란 격려가 주어진다. ㉠그리스도께서 들리우신 이유도, 그를 따르는 자들이 구원받는 이유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의 시혜는 일반적인 것으로 곧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주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구원키 위해 오셨다(16,17절). 여기에 바로 진정한 복음, 좋은 소식, 여태까지 이 세상에 하늘로부터 전해 내려왔던 소식 중에 가장 좋은 소식이 있는 것이다.
①세상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주신다는 이 사실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16절). ㉠계시된 위대한 복음의 신비 :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독자이시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독자를 주셨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사람을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자를 주시는 것도 기뻐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고 죽도록 자신의 유일한 독자를 버리셨다. 그 성부께서 자기의 아들을 포기하시지 않으셨다면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바로 이 사실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자기의 사랑을 전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진정으로, 그토록 풍성하게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토록 크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값없는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 즉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함이 가득찬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바라보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오직 자기들의 나라만을 사랑하셔서 오신다는 헛된 독단을 내렸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온 세상을 사랑하셔서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 메시야를 통하여 모든 자에게 생명과 구원이 보편적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확고한 제안과 함께 그 아들을 보내실 정도로 그렇게 대단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다.
이제까지 구원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었으나 이제는 이 지구 끝까지 그리스도께서 구원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큰 복음의 의무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 위대한 복음이 가져주는 유익 :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죄를 제하여 버리심으로써 믿는 자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즉 용서를 얻은 것이다. 저들에게는 천국의 기쁨을 얻을 자격이 있다. 곧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②여기에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니 그 계획은 곧 그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실 때 눈에도 손에도 구원을 가지고 오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즉 세상에 거하며 사는 거주자로서 자기의 대리자 혹은 대사로 보내셨다(17절). 도대체 오시는 그 분은 무슨 사명을 지니고 왔을까? 평화의 사명일까? 이러한 우리의 의문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평화롭게 대답한다. 그가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하심이 아니었다. 이 세상은 죄 많은 세상이므로 우리는 그가 이 세상은 심판하러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상은 정죄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심판을 실행하시기에 충분한 권세를 가지고 오셨다(요 5:22,27). 그러나 죄를 정하시고 심판하시는 일을 먼저 시작하시지 않으시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새로운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오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계시며 세상을 구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부러진 뼈와 피 흘리는 상처를 치료해 주심으로써, 우리의 심판자인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이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지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3)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참된 신자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인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18절). 이 말은 집행 유예 이상의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즉 무죄가 되는 것이다. 유죄 선고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곧 복권된다는 뜻인 것이다. 심판의 선고를 내리시는 분은 누구신가? 그는 그리스도시니 죽임 당하신 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십자가는 그를 무겁게 짓눌렀을 테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저주에서 벗어나셨다. 다시 말해서 세상 때문에 정죄받으셨지 세상과 함께 저주받으신 것은 아니었다(롬 8:1).
(4) 불신앙과 고의적인 무지로 대항하는 자들의 참상(18-21절).
1) 여기에서 믿지 않으려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읽어 보라. 그들은 벌써 죄있다고 선고받는 것이다. ①무한히 진실하셔서 믿을만 하시고 무한히 선하셔서 기꺼이 맞이할 만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의 이름을 저들은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장 귀중하신 분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니 우리에게도 그분은 가장 귀중하지 않을 것인가? ②저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니 이 얼마나 불쌍한가! 불신자들은 확실한 심판, 바로 지금의 현재적인 심판을 받았다. 저들 자신의 마음이 저들을 심판하고 있으므로 저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심판은 저들의 이전의 죄책에 기초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불신앙은 구제책을 반대하는 것이다.
2) 또한 저들이 얼마나 그분에 대하여 무지한지 읽어보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19절). 복음은 빛이다. 복음이 세상에 온 것은 곧 빛이 세상에 온 것이다. 빛은 스스로를 증거한다. 복음 역시 그와 같다. 즉 복음 역시 그 신적 기원을 증명하고 있다. 빛이란 어느 곳에서나 밝혀 주는 것이며 진실로 “T은 즐거운 곳이리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말 문이 막히는 어리석음인가! 자기들의 야망과 결혼한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보다 오히려 자기들의 무지와 실수를 사랑했던 것이다.
자기의 병에 대한 사랑에 빠지고, 자기의 노예화된 상태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쌍한 인간이요 해방될 수도 없으며 완전해질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는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저들의 처지란 대단히 슬픈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그 처지를 개선치 않겠다고 결심한 탓이요, 그 빛을 알고자 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 까닭이다. 의도적으로 알고자 하지 않고 배격하는 것은 용서받으리란 말과 전혀 무관한 일이요 더 나아가 유죄 판결의 형을 더욱 무겁게 하는 일일 뿐이다. 사람들이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의 접촉조차도 꺼려하는 바로 이것이 유죄 선고에 해당하는 것이다. 심판 때에 우리는 우리가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죄를 범했던 그 지식에 대하여, 우리가 피해버린 그 지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20절)라는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이다. 행악자들은 처벌에 대한 공포나 수치심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이 빛으로 오지 않으며 할 수 있는 한 이 빛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자 하는 것이다. 복음의 빛은 죄인의 악한 행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저들의 범죄를 사람들에게 전시하기 위하여, 죄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 새 계명에 비춰 보면 대단히 흉악한 죄임이 백일하에 들어나리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졌다. 복음에는 복음의 위로를 주기 위하여 먼저 복음의 심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악행자들은 복음의 빛을 싫어한다. 물론 악을 행하고서 자기들의 악행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이 빛을 환영했던 창기와 세리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며 악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자들은 빛을 미워한다. 사람들이 죄를 사랑하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미움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지 않는 자들은 속으로 빛을 미워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반면에 마음이 고결한 자들은 이 빛을 환영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21절). 복음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죄를 깨닫게 하고 두렵게 하듯이, 고결한 심정으로 고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확신을 준다. 선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선한 사람은 진리를 좇는, 진리를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한 자들조차도 때로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만큼의 선행을 행하는데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진리를 좇으며 정직하게 행하고자 노력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고결함을 확고히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자는 빛으로 오는 자이다. 진실을 좇는 자는 스스로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며 자기의 행위를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애를 쓰며 비록 그 뜻이 자기의 뜻이나 이해와는 반대가 되더라도 그 뜻을 행하고자 한다. 여기에 선한 역사의 특징이 있다. 즉 선한 역사는 하나님 안에서만 역사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역사를 이루는 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의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됐을 때, 또한 우리들의 역사가 하나님 그분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분을 위해서 이루어졌을 때 우리의 역사는 곧 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고데모는 비록 그가 처음에는 당혹해 했으나 뒤에는 그리스도의 아주 신실한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