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장 짧은 설교문은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니 요나가 불평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 십이만 명을 구원하려고 했다. 요나는 하나님께 화가 났다. 북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죽이던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것에 분노가 일어났다. 하나님은 박 넝쿨을 통해서 요나에게 교훈했다.
Ⅰ. 요나의 불평 4:1-4
(1)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다투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단지 진노의 메시지만을 전했으며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나는 그들이 자비를 얻은 것을 싫어하였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이든 기뻐할 수 있어야 하며 또 비록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묵묵히 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에 대해 노할 정도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었다. 요나가 견지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명예에 관한 문제였다. 우선 그는 자기 나라의 명예로 인해서 질투하였다. 니느웨의 회개와 개혁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돌이키기를 싫어하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회개한 이 이방 사람들에게 베푸신 은총은 유대 민족에게는 좋지 못한 징조가 되었다. 도한 그는 자기 자신의 명예로 인해 질투하였다. 즉 만일 니느웨가 사십 일 내에 멸망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여겨질 것이며 따라서 오명을 쓰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과 다투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자 그는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말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2,3절).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것은 매우 섣부른 기도였다. 불만을 품게 되자 그의 부패한 마음이 은혜를 누르고 고개를 쳐들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스스로 은혜를 얻기를 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비로 인해 다른 사람이 은혜얻는 것을 불평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니느웨로 가도록 처음 명령을 받았을 때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간 것에 대해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즉 “만일 내가 니느웨에 가서 선포하게 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고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리라고 내가 미리 예견하지 않았나이까?” 자신의 사역이 성공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요나는 얼마나 이상한 부류의 인간인가! 모든 성도가 기쁨과 찬양의 제목으로 삼고 있으니 매우 기묘한 일이다. 그는 마치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다”는,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영광된 것이 그의 불완전한 속성이기나 한 듯이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감정에 못이겨서 죽기를 구했다(3절). 여호와여 원컨데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만일 니느웨를 살리고자 하신다면 주의 말씀과 내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느니, 또한 이스라엘의 영광이 이방 사람들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 그는 마치 하나님께는 은혜가 충분치 못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가 선한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할 때 삶을 포기한 채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생명의 사역을 행함으로 기꺼이 죽을 준비를 갖추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기와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취해 가시도록 우리 자신을 기꺼이 그에게 내어맡기는 것이다.
(2) 이처럼 격분해 있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당연히 책망하신다(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온화하게 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보라. 이는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고 유순한 대답으로 분노를 식게 하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네가 합당하냐?”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가 치밀 때마다 이런 점검을 해보라. “그처럼 쉽사리, 그처럼 자주, 그처럼 오래 성내는 것이 합당한가? 그리고 내 자신을 격분 가운데 내어둔 채 홧김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욕설을 퍼붓는 것이 합당한가?”
Ⅱ. 박 넝쿨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4:5-11
요나는 여기서 자기의 불만을 고집하고 있다.
(1) 우리는 여기서 요나가 니느웨의 운명에 대해 부정적인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는 성밖으로 나가 혼자 앉아 잠잠히 있었다. 이는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5절). 이제 사십 일이 다 차고 있거나 아니면 다 찼을 것이다. 따라서 요나는 니느웨가 무너지기를 혹은 색다른 어떤 심판이 니느웨에 임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히 나무로 ‘초막을 지었다.’
(2) 이와 같이 요나가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대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그의 피난처와 휴식처를 마련해 주셨다(6절). 요나는 그의 초막에 앉아서 밤의 냉기와 낮의 열기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고집센 아이에게 하듯이 그를 측은히 보셨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박은 입이 넓은 식물로, 갑자기 자라나서 그의 초막을 덮었다.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즉 육체의 원기를 회복시킴으로 마음의 곤고를 더 잘 극복케 하기 위해서였다. 혹자는 기껏해야 박 넝쿨은 미약한 그늘 밖에 안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 박 넝쿨이 바르게 사용되면 백향목보다 더 가치있게 될 수가 있다. 조그만 장난감이 때때로, 박 넝쿨이 요나에게 했듯이 골난 어린 아이를 달래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이 박 넝쿨을 갑자기 없애셨으며, 따라서 그는 다시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7,8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박 넝쿨은 나자마자 그 다음 날 시들어 버렸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들도 이처럼 꽃과 같아서 생기자마자 곧 쇠하여진다. 작은 것이 그것을 시들게 하였다. 즉 뿌리에 있는 작은 벌레가 큰 박 넝쿨을 죽게 한 것이다. 보이지 않고 식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그 일을 행하였다. 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요나의 박 넝쿨을 따게 하지 않으시고 벌레를 보내셔서 그것을 씹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박 넝쿨의 필요를 절감하게 하시기 위해서 바람을 준비하셨다(8절). 그것은 ‘뜨거운 동풍’으로서 태양의 열을 강하게 요나의 머리로 날려 보냈다. 이와 같이 가련한 요나는 태양과 뜨거운 바람에 드러나게 되었다.
(4) 이것은 요나로 하여금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8절). “만일 박 넝쿨을 죽게 하실 것이라면 박 넝쿨과 함께 나도 죽여 주소서.”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불평거리가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어리석음은 곧 드러날 것이며 가능하다면 치료도 될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그를 책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와 담론하셨다.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9절). 하나님의 곤고케 하시는 섭리가 우리에게서 친척, 재물, 즐거움이 되는 것들을 앗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성내지 말아야 한다. 즉 그 ‘박 넝쿨로 인하여’ 성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비교적 적은 손실, 다시 말해서 그늘의 손실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히 우리의 불만을 잠잠케 해주는 것을 박넝쿨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다.
(6) 요나는 유별나게 자신의 격노와 불만을 정당화시켰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9절). 감정이 격해지게 되면 양심마저 무시된 채, 요나가 여기서 했듯이 잘못된 판단 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에 대해서, 즉 짜증으로 자신이 죽게 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7) 그는 니느웨를 구워한 것에 대해 불평하였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요나 자신의 입으로 그를 심판하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바른 정신을 되찾았으며 감정이 가라앉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쟁론하셨다(10,11절).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즉 “너는 이 박 넝쿨이 시들다니 얼마나 측은한가라고 하였도다. 그런데 내가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는가? 네가 아깝게 여기는 박 넝쿨은 하나지만 내가 불쌍히 여기는 니느웨 거민들은 무수하니라.” 두 살 이하의 아이들만 십이 만 명이나 될 정도로 니느웨는 인구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니느웨에는 죄를 짓지 않은 자들이 아주 많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니느웨의 죄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니느웨가 무너진다면 그들 모두가 니느웨 전체의 재난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바라볼 때 내가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아니하랴?” 하나님께서는 또한 니느웨에 많은 육축이 있음을 주목하였다. 동물의 생명이 식물보다는 훨씬 귀한 것이니만큼 요나가 박 넝쿨을 아까와 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 육축들을 불쌍히 여기고 아까와할 이유가 더욱 많았다.
2) 요나가 관심을 가진 박 넝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자라게 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니느웨 사람들은 그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으신 자들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셨으며 따라서 그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이유가 더욱 많았다.
3) 요나가 아까와한 박 넝쿨은 갑자기 자란 것으로 가치가 덜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밤에 나온, 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니느웨는 오래된 성읍으로 오랜 세대가 살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4) 요나가 아까와 한 박 넝쿨은 ‘하룻밤에 망하였다.’ 즉 그것은 시들었고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니느웨의 귀중한 영혼들은 불멸의 존재들이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영혼이 많은 박 넝쿨보다 더욱 귀한 것은 틀림없다. 이후에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며 전에 성냈던 만큼이나 이제는 매우 기뻐하였을 것이다. 요나는 자신이 성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었으나 그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야 함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셨다 따라서 그 사실은 자비를 바라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
이와 같이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편협 된 영혼과 원리를 가진 자들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자신들과 또한 자기들과 같은 길을 걷는 자들에게만 국한시키려 하는지에 대하여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만유 가운데 한 주가 계시는데 그는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풍성히 자비를 베풀어 주시며 만방에서, 즉 이스라엘에서 뿐만 아니라 니느웨에서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들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자는 하나님께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