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1Ki) 원어성경 설교 말씀] 사르밧(Zarephath) 과부와 수로보니게 여인(왕상17:8-16; 막7:24-30)

열왕기상 17장 히브리어 원어성경 설교 말씀은 가뭄에 기적을 체험한 사르밧 과부와 마가복음 7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을 비교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두 여인의 신앙을 통해서 성도의 믿음을 세워야 한다.

사르밧 과부와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 비교(왕상17:8-16; 막7:24-30)

세상이 종말로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 시대는 이미 금수저, 흙수저로 양분화되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있는 사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양분화 되어가는 이때에 영적으로는 더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듭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재물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없는 사람을 착취하여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적 지도자들은 사라지고 거짓 선지자들만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그렇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백성들은 육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영적으로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김으로 여호와 신앙은 사라져 타락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영적으로 타락한 북이스라엘에 가뭄이 들게 했습니다. 보통 가뭄이 아닙니다.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 심한 가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영적으로도 가뭄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영육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스테판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성경

이런 상황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으로 장소를 옮겨주십니다. 장소가 이동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사 가는 것도 직장을 옮기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사르밧 과부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고취하려고 합니다. 두 여인의 공통점을 찾아서 말세를 사는 현재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현재 나의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를 깨닫기바랍니다.

첫째,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들어가십니다.

왕상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ק֣וּם לֵ֤ךְ צָרְפַ֨תָה֙ אֲשֶׁ֣ר לְצִידֹ֔ון וְיָשַׁבְתָּ֖ שָׁ֑ם הִנֵּ֨ה צִוִּ֥יתִי שָׁ֛ם אִשָּׁ֥ה אַלְמָנָ֖ה לְכַלְכְּלֶֽךָ׃

쿰 레크 초르파타 아쎄르 레치돈 베야샤브타 솸 힌네 치비티 솸 이솨 알마나 레칼켈레카

막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4 Ἐκεῖθεν δὲ ἀναστὰς ἀπῆλθεν εἰς τὰ ὅρια Τύρου. καὶ εἰσελθὼν εἰς οἰκίαν οὐδένα ἤθελεν γνῶναι, καὶ οὐκ ἠδυνήθη λαθεῖν

에케이덴 데 아나스타스 아펠덴 에이스 타 호리아 튀루 카이 에이셀돈 에이스 오이키안 우데나 엘델렌 그노나이 카이 우크 에뒤네데 라데인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두로와 시돈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입니다. 이곳 두로와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왕상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이세벨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아합은 바알을 섬기는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북이스라엘의 영적 신앙이 타락하게 되었고 기근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엣바알이 통치하고 있는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방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여 기근이 오지만 이방 백성인 사르밧의 여인에게는 풍요의 복을 주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훗날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가 됩니다. 예수님도 시돈과 두로 지방에 가셔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사르밧’ צָרְפַ֨תָה֙(초르파타 6886) 사르밧이며 (차라프 6884) 시험하다, 단련하다, 청결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가뭄에 이방 땅인 사르밧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르밧에 있는 과부를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사르밧은 신앙을 연단 하는 용광로입니다. 불순물이 용광로에 들어가면 빠지듯이 사르밧에서 이방 여인의 신앙을 시험하고 단련하여 깨끗한 상태로 만들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깨끗해질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사르밧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사르밧 과부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그릇을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셔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시험하게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용광로에 들어간 것처럼 인생의 불순물을 모두 빼내고 하나님의 축복하는 그릇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엘리야는 육적인 문제를 해결했다면 예수님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 들어가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엘리야는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서 성취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와 예수님은 문제가 있는 이방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왕상17:10-11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וַיָּ֣קָם׀ וַיֵּ֣לֶךְ צָרְפַ֗תָה וַיָּבֹא֙ אֶל־פֶּ֣תַח הָעִ֔יר וְהִנֵּֽה־שָׁ֛ם אִשָּׁ֥ה אַלְמָנָ֖ה מְקֹשֶׁ֣שֶׁת עֵצִ֑ים וַיִּקְרָ֤א אֵלֶ֨יהָ֙ וַיֹּאמַ֔ר קְחִי־נָ֨א לִ֧י מְעַט־מַ֛יִם בַּכְּלִ֖י וְאֶשְׁתֶּֽה׃

바야캄 바옐레크 초르파타 바야보 엘 페ㅔ타흐 하이르 베힌네 솸 이솨 알마나 메코쎄쎄트 에침 바이크라 엘레하 아요마르 케히 나 레 메아트 마임 바켈리 베예쉐테

스가랴 1장 붉은 말탄 사람 성경말씀

וַתֵּ֖לֶךְ לָקַ֑חַת וַיִּקְרָ֤א אֵלֶ֨יהָ֙ וַיֹּאמַ֔ר לִֽקְחִי־נָ֥א לִ֛י פַּת־לֶ֖חֶם בְּיָדֵֽךְ׃

바텔레크 라카하트 바이크라 엘레하 바요마르 레케히 나 리 파트 레헴 베야데크

막7:25-26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5 ἀλλ᾽ εὐθὺς ἀκούσασα γυνὴ περὶ αὐτοῦ, ἧς εἶχεν τὸ θυγάτριον αὐτῆς 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 ἐλθοῦσα προσέπεσεν πρὸς τοὺς πόδας αὐτοῦ

알르 유뒤스 아쿠사사 귀네 페리 아우투 헤스 에이켄 토 뒤가트리온 아우테스 프뉴마 아카다르톤 엘두사 프로세페센 프로스 투스 포다스 아우투

26 ἡ δὲ γυνὴ ἦν Ἑλληνίς, Συροφοινίκισσα τῷ γένει· καὶ ἠρώτα αὐτὸν ἵνα τὸ δαιμόνιον ἐκβάλῃ ἐκ τῆς θυγατρὸς αὐτῆς.

헤 데 귀네 엔 헬레니스 쉬로포이니킷사 토 게네이 카이 에로타 아우톤 히나 토 다이모니온 에크발레 에크 테스 뒤가트로스 아우테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성문에 이를 때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물을 가져와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 그 여인은 순종하여 가려고 할 때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르밧 과부에 대한 시험입니다.

‘가져오라’ לִֽקְחִי(라케히 3947 동사, 칼, 명령법, 여성, 2인칭, 단수) 취하다, 청종하다, 축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먼 길을 왔습니다. 갈증도 나고 배도 고픕니다. 이런 와중에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준비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 물과 떡을 취하여 나에게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명령법을 썼다는 것은 당신은 반드시 나에게 물과 떡을 가져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내 말을 듣고 따른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축복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르밧 과부는 얼마나 황당할까요? 낯선 남자가 와서 물도 달라고 하고 떡을 달라고 하니 황당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 때는 어떻습니까? 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피하여 들어갔는데 많은 사람이 알아보았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다짜고짜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렸는데 고쳐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간구하거늘’ ἠρώτα(에로타 2065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 간청하다, 원하다, 요구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당돌하게 물과 떡을 요구했는데 신약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당돌하게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는 주님이 자신의 딸을 고쳐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계속 소리치면서 애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주님은 자신의 몸을 숨겨야 하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소리치면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으면 난처한 상황이 됩니다. 이 소문이 갈릴리까지 퍼지게 되면 예수님의 신변에 위험이 올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엘리야의 말에 사르밧 과부가 황당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에 예수님이 황당해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사르밧 과부의 육적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는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 축복을 위해서 모두 해야 하겠습니다. 육적인 축복을 위해서는 사르밧 과부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떡을 드려야 합니다. 영적인 축복을 위해서는 주님께 나와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셋째, 사르밧 과부와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지막 믿음의 시험입니다.

왕상17:12-13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막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사르밧 과부와 수로보니게 여인은 마지막 믿음의 시험이 왔습니다. 현재 사르밧 과부는 떡을 만들 가루가 없습니다.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떡을 만들어 한끼 식사를 하고 자녀와 죽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위기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는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너무나 황당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떡을 만들어 오라고 하니 당황스럽습니다. 여기에서 사르밧 과부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하기 전에 믿음을 보십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떤 마지막 시험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자녀로 먼저 배부르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지 이방인의 개를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영적 구원의 역사는 선택받은 자를 위해서 왔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부정한 자에게 오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떡은 복음을 상징합니다. 구원의 역사를 주는 복음을 이방인인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구약의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떡을 요구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떡을 이방인에게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육적인 축복은 하나님께 직접 드려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축복은 주님으로부터 복음의 떡을 받아야 합니다. 생명의 떡인 복음을 받지 못하면 그 영혼은 살 수 없습니다. 구약의 엘리야는 육적인 축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약의 예수님은 영적인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 사르밧 과부와 수로보니게 여인은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왕상17:15-16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막7:28-29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합니다. 말씀에 순종했더니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습니다. 가뭄은 3년 정도 이어졌습니다. 그 기간 동안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더니 육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개들도 자녀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개로 인정하면서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은혜만 주셔도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은 후에 주님은 말합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말합니다.

‘나갔느니라’ ἐξελήλυθεν(엨셀뤼덴 1831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 나오다, 끊어지다, 돌아가다, 떠나다라는 뜻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있는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은 영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의 딸에 붙어있는 악한 귀신이 나왔습니다. 이 귀신은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아가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은 악한 귀신이 떠나므로 영적인 고통이 끊어졌습니다. 직설법은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귀신이 떠나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완료 시제는 귀신 들린 딸에게서 나온 귀신은 다시는 이 딸에게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쫓아내 주시니 다시는 귀신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유다서 1장 헬라어 원어성경 설교말씀

구약의 사르밧 과부는 직접 말씀에 순종하여 떡을 구워서 엘리야에게 드렸습니다. 말씀을 행동에 옮기니 하나님의 육적인 축복이 임했습니다. 한 끼만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가뭄의 기근을 이길 수 있는 복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신약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의 고백을 드렸더니 영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려 영적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 주심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육적인 축복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육적인 축복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가뭄이 있었던 날까지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신비한 육적인 기적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좇다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인 구원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기복신앙에 빠져 육적인 기적만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서 육적인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육적인 복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행동에 옮겨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드리지 않으면서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럼 영적인 축복은 어떻게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영혼 구원은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믿음으로 영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영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영적인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르밧 과부처럼 행동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물을 드림으로 육적인 복을 받고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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