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1장 설교문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향한 사랑의 고백 노래이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을 사랑하고 있다. 솔로몬 왕도 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술람미 여인을 사랑한다. 구속사 관점에서 보면 솔로몬 왕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술람미 여인은 구원받은 성도를 상징한다. 우리도 술람미 여인처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Ⅰ. 이 책의 제목 1:1
이것은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이다. 이것은 또한 매우 복음적이다. 복음의 시대는 찬양의 시대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복음의 은혜가 우리 입으로 하여금 새 노래를 하게 하기 때문이다(시 38:1). 저자는 솔로몬이며 따라서 이 노래는 다른 많은 사랑의 노래들처럼 어리석은 자의 노래가 아니고 가장 현명한 자의 노래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데 있어서 그의 지혜를 따를 수가 없다. 솔로몬의 노래는 일천 다섯 개였으나(왕상 4:32) 다른 주제의 것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이 거룩한 사랑의 노래만이 남아 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같이 시를 즐겨 썼었다. 사람은, 어떠한 재능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솔로몬이 이 거룩한 노래를 언제 썼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혹자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타락에서 벗어난 후에 썼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동안인 그의 시대의 초기에 썼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전도서 뒤에 위치한다. 그 이유는 전도서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헛되며 우리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해주기에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찾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서만 누릴 수 있는 초월적인 기쁨을 찾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Ⅱ. 신부의 고백 1:2-6
이 장엄한 시 첫머리에 등장한 신부는 처음에는 신랑에게, 그 후에는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말한다.
(1) 신랑에게는 아무런 이름이나 호칭을 부르지 않고 단번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이것은 다음 두 가지를 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 신랑의 애정을 원한다(2절).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나와 화해하고 당신의 마음을 내게 알려 주시오. 내게 당신의 사랑의 증표를 보여 주시오”라는 의미이다. 구약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스스로 육체를 입고 나타나시길 원하였다. 즉 “더 이상 우리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지 마시고 스스로를 나타내시사 천사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그 입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씀을 듣게 하소서(눅 4:22). 그것이 우리에게 입맞춤이 되고 에서가 야곱에게 한 입맞춤 같이 화해의 증표가 되리이다.” 모든 복음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입맞춤해 주심으로써 완성되었다. 그것은 관대하신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했던 입맞춤이며 화평의 입맞춤인 것이다. 신부가 이것을 바라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① 신랑의 사람을 크게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은혜로운 영혼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 사랑의 선물과 열매는 어떤 감각적인 쾌락의 절정보다도 낫기 때문이다.
② 그 사랑의 열매와 향기를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3절).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당신의 은혜와 평안은 그것들과 자신을 잘 아는 모든 자들에게 즐거움이 되고 받아들여지니이다. 모든 성도들보다 뛰어나고 그것은 제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기름과 향기니이다.”
③ 모든 거룩한 영혼마다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 때문이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우리 마음 속에서 넘쳐 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죄로 인해 썩어진 자리로부터 순전한 것들을 모두 끌어내신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처녀들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계 14:4). 그리스도는 모든 마음이 순전한 자들의 신랑이시다.
2) 신랑과의 교제를 원한다(4절).
① 신부는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한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 “나를 당신에게로 인도하소서. 당신의 집으로 더 가까이 인도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자기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② 신부는 그 은총에 힘입어 더욱 그리스도께 나아가고자 한다. “나를 인도하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모두 그의 은혜를 인함이다. 그가 끌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따라갈 수 없다(고후 3:5;4:13).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된 교회에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실 때 성도들은 그것으로 인해 힘을 얻고 활기를 찾게 된다.
③ 이 간구에 대하여 즉각적인 응답이 이루어진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에 대한 응답이라기 보다는 그의 은혜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데에서 얻어지는 응답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궁전, 즉 그의 왕궁으로 뿐만 아니라(시 45:15) 그의 침궁으로 인도함 받을 것이다.
④ 침궁으로 인도받은 후에 우리는 바라는 것을 얻는다. “우리의 소망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차고, 모든 슬픔이 사라지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나이다.” 모든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즐거움은 향기름이나 침궁으로 인도함 받은 것으로 인함이니이다. 우리의 최고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이시니다(시 43:4). 그리스도 외에는 전혀 기쁨이 없나이다.”
⑤ 은혜를 입은 영혼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처럼 다른 성도들과도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 침궁 안에서 우리는 단지 그 분만 만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도 만난다. 성도들이 갖가지 일을 하는 동안 서로의 견해와 선호도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들에게 가장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모두가 일치한다.
(2)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말한다(5,6절). 신부는 교회에는 다니지만 교인은 아닌 믿음이 약한 기독교인, 즉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는,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신부는 자기가 죄와 고난으로 말미암아 검어졌기 때문에 이들 방관자들이 자기를 경멸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녀에게서는, 그녀가 그렇게도 갈망하는 입맞춤을(2절) 기대할 근거도 또한 그녀가 느끼는 기쁨에(4절) 그들이 동참하기를 기대할 근거도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검다는 것을 인정한다.
죄가 우리를 검게 만든다. 즉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단적인 행위, 중상 모략, 그리고 상대에 대하여 분내는 것들이 우리를 검게 만든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또한 슬픔이 우리를 검게 만든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이 보이다. 교회가 종종 천박하고 보잘것없다고 비난받음으로써 그녀의 아름다움은 눈물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의 아름다움을 확언한다(5절).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계달의 장막은 목자들이 사는 곳으로서 매우 조악하고 비바람에 시달리고 오래 사용해서 색이 바래서는 한번도 하얗게 되 본 적이 없지만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다는 것이다.
교회는 때때로 핍박으로 인하여 검게 될지라도 오래 참고, 뜻을 굽히지 않으며, 서로에게 위안을 줌으로써 오히려 아름다워진다. 진실한 성도들은 그 자신으로만 보면 검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름다워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검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을 모르나 그들은 모든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시 45:13). 그녀는 원래부터 검은 것이 아니고 후에 그렇게 된 것인데 이는 그녀에게 너무 과도한 짐을 부과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려보지 말 것은.
1) 그녀는 고난을 받아 검게 되었다. 일광에 쬐어서. 그녀는 희고 아름다웠었다. 즉 그녀는 원래 흰 피부를 지녔었으나 과중한 부담과 일광으로 인해서 검게 되었다. 그러면 그 과중한 부담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그녀는 그 집안 식구들의 노여움을 샀다.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그녀는 어리석은 형제들에게 고난을 받았던 것이다. 자기들이 유대인들과 친족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을 흥왕케 할 만한 무슨 일이든지 몹시 불쾌해 했었다(느 2:10).
같은 이유로 그 형제들은 그녀를 몹시 가혹하게 대하였다.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 즉 “나를 부추겨 죄를 짓게 하고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들의 포도원을 지키는 것처럼 그들의 우상을 섬기게 하였나이다.” 이것이 선한 사람들이 고난 받을 때에 당하는 주된 슬픔이다.”그들은 나를 고난에 빠지게 하고 힘들고 천한 일을 시켰나이다.” 포도원지기는 가장 비천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형제들은 그녀에게 집안의 고된 일을 다 시켰던 것이다.
2) 그년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Ⅲ. 신랑의 응답 1:7-11
(1) 신부가 사랑하는 신랑에게 매우 겸손하게 탄원한다. 그것은 좀더 자유롭고 깊은 관계를 위하여 목동들이 목자장에게 하는 것이며, 교회, 즉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하는 탄원이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서 돌이켜 하늘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다린다(7절).
1) 그녀는 그리스도를 이렇게 불렀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2) 그녀가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양들이 선한 목자에게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양떼를 먹이는’ 것과 ‘오정에 쉬게 하는’ 것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자비로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양들을 먹이시고 쉬게 해주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내외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때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쉬게 해 주시므로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3) 그녀는 그 무리 중에 넣어 달라고 간청한다. 먹이는 곳과…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어디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지, 어디에 가야 당신과 얘기할 수 있는지, 어디에서 당신이 당신의 양무리들을 먹이시고 보살피시는지 내게 알려 주소서. 그곳에서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겠나이다.”
4) 그 간청의 절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그들은 당신의 동무들임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적이요 경쟁자이나이다.” 은혜를 입은 영혼은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얼굴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즉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과 그에 대한 사랑이 흔들릴 만한 상황이 발생할까 늘 주의하게 되는 것이다.
(2) 신랑은 이 간청에 대해 자애로운 대답을 한다(8절).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대하여 즉각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는 신부에게 매우 부드럽게 말한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우리 주 예수께는 믿는 영혼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 사랑스럽게 비친다. 그는 그녀가 알지 못함을 아주 부드럽게 질책하신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너는 나와 나의 무리들을 어디서 찾을지 모른다는 것이냐?” 빌립이 이와 비슷한 요청을 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했던 대답과 비교해 보라(요 14: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그는 그녀가 어디에 가면 그를 발견할 수 있는가를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자취를 따라 이전의 선한 길을 찾으라.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먹일지니라. 즉 선한 목회자들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이다. “모든 짐을 나에게 가져오면 나는 너희를 환영하리라. 목자들이 너희를 도와주고 그들의 장막 곁에 살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와 연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준수해야 하며 그의 백성들 사이에 머물러야 한다. 가족을 가진 사람들도 신앙적인 모임에 그들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 그들의 아이들과 종들조차도 목자들의 장막의 특혜를 누리도록 하여야 한다.
(3) 신랑은 신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1) 그는 그녀를 ‘내 사랑아’라고 부른다(9절). 이것은 애정이 담뿍 담긴 호칭으로서 이 책에 자주 나온다. “나의 친구, 나의 동료, 그리고 나의 가장 친밀한 자여.”
2) 그는 그녀를, ‘바로의 병거’를 이끄는 튼튼하고 당당한 한 쌍의 ‘준마’에 비교하였다. 애굽은 훌륭한 말들로 유명하였다. 교회가 적들에 대하여 자신의 나약함과 잡아먹힐까 하는 두려움을 호소해 올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한 쌍의 말이 되게 하여 힘을 주었으니 너희는 이제 그 두려움을 경멸할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바로의 병거를 이기는 말, 즉 불말, 거룩한 천사에 비교하였노라.”
3)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장식들을 칭찬한다(10절).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아름답구나. 곧 머리 매무새, 물결치는 머리카락, 리본의 매듭이 아름답다.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흡사 왕비처럼 금사슬로 장식된 옷을 입기나 한 듯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성찬 의식은 교회의 장식물이다. 은혜와 은사와 성령의 위로는 모든 믿는 영혼들을 돋보이게 하며 또한 아름답게 한다.
(4)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기 위한 자비로운 계획을 세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로 은혜를 주신 곳에 더 큰 은혜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11절).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다시 말해서 그가 이 선한 일을 완성시키겠다는 것이며 그것은 절대로 잘못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Ⅳ. 주고받는 찬사 1:12-17
(1) 그리스도와 신부 사이에 애정이 교차된다.
1)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그와 같은 관계를 이룬다. 성도들은 겸손한 경건심을 갖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인으로 모신다(12절). 그리스도는 성도들과 교제하시고 그들로 기뻐하신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그는 자리에 앉아 그들을 환영하였을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교적 의무, 특히 왕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자리에 앉기를 기뻐하시는 성찬식에서 은총을 입게 될 때 그들의 마음은 회개로 말미암아 깨지고 믿음을 통해 치유받으며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른다. 그리고 그때에야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게’ 된다.
2) 그들은 그리스도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를 만큼 깊이 사랑한다(13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되며 가장 사랑하는 자, 유일하게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몰약 향낭’과 ‘고벨화 송이’로 비유된다. 그것들은 가장 기쁘고 즐거운 것들의 상징이다. 그의 복음과 성령의 위로하심은 그들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며 그들은 그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다. 고벨은 또한 속되, 중재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자비와 공의의 ‘송이’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속죄해 주셨다. 그는 종일 ‘내 품 가운데,’ 즉 마음 중심에 계셨다.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자신의 마음에 품으신다. 그렇다면 가장 사랑하는 구세주를 마음속에 모시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큰 사랑을 갖고 계시다. 그들은 그의 눈에 매우 아름답게 비친다(15절).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그는, 거룩한 속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므로 누구든지 선별된 자들은 아름답다는 것을 이 말로써 보여 주신다.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이 한 가지 등장한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이것은 4:1에 똑같이 다시 나온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말로서 독수리의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 아니고 비둘기의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로 치솟아 오르면서도 계속 땅 위의 먹이를 노려보는 매의 눈과는 달리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 단순함과 신실함, 그리고 비둘기같은 순결함을 발견하는 겸손하고 온화한 눈을 의미한다.
(3)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며 찬사에 대하여 찬사로 답한다(16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주여, 당신이 나를 어여쁘다 하셨나이까? 내가 당신의 형상으로 입혀지지 않았다면 어여쁘게 될 수 없었을 것이나이다. 당신은 모두 당신의 것인 이 세상 전부에게 즐거운 분이시나이다.” 그녀는 남편의 성품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한 후 이제 마치 사랑에 빠진 신부처럼 그가 자기에게 해준 것들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다. 그의 침상, 집, 서까래에 대하여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고 그의 사랑의 증표를 받으며 그에 대한 사랑을 되돌려 드릴 수 있는 거룩한 법령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그녀는 우리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공동 관심사를 갖는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일하시는 도구가 되며 그는 그들의 특권이 된다. 이로써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연합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은 우리 것이 된다. 침상이 그것의 색깔과 장식으로 훨씬 돋보이지 않는가?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그 색깔은 모든 색깔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숲과 들의 색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17절). 이것은 당시에 솔로몬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교류를 위하여 건축하였던 성전에서 따 왔었을 듯 싶다. 그것은 백향목으로 지어졌는데 백향목은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오래 가며 절대로 썩지 않는 나무로서 교회의 굳건함과 지속함을 상징하고 있다.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통로는 잣나무로 꾸며졌다. 이 잣나무는 보기에도 좋고 냄새도 향긋한 나무로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성도들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은혜로운 언약에 있는 모든 것들은 매우 굳건하고 좋으며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