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 세미나 중에서 오늘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목회자나 성도에게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열려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성이 없으면 육성이 나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영성(베드로전서 2:1~5)
전(全) 성서를 통하여 영성 개발에 위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세운 특별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문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능력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높은 학문을 쌓은 지성인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나중 생애를 보면 그가 크게 쓰임받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제자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한 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당시에 엘리트라고 하는 관원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높은 학문적 지성도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인류 역사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능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가슴이 설레이게 됩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우리의 영성도 베드로처럼 개발된다면, 그런 체험적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위대한 가능성과 변화된 인격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로 잔뼈가 굵도록 고기를 잡던 시몬이 동생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게바’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다가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여기서부터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 다녔습니다. 가버나움으로, 사마리아로, 나사렛으로, 두루와 시돈으로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시는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네 이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완벽한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주님의 칭찬도 놀라운 것이지만, 베드로가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만에 살아 나리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리 마옵소서! 결단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면서 만류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에 그토록 큰 충격은 없었습니다. 책망은 여러 번 들었으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용한 권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청천벽력같은 책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언제나 인간적인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자 그의 영성은 신비롭게 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그의 생애는 영적인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참으로 위대한 영성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 고백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사도들의 인격 위에 서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는 입장이 신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진다는 입장이 카톨릭입니다. 저는 오히려 카톨릭의 입장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신앙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신앙인격이 곧 교회이지 입으로 말하는 신앙고백만으로 교회가 설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신앙과 인격이 결국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모두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의 영성은 다릅니다. 그러기에 영성이 바로 개발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교회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자가 나왔고 제자로 인해 성도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지상의 교회는 곧 사도들의 교회요, 사도들의 교회는 곧, 성도들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제자가 교회를 세웠고, 그 제자들의 교회가, 곧 우리들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교회는 언제나 목사의 신앙, 사상과 인격 이상의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 위대한 모습은 베드로의 신앙과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요, 오늘의 한국 교회는 결국 우리들의 열정적인 사역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교회가 역사적인 의미를 상실하는 모습의 원인 또한 목회자의 사상적인 빈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대한 영적 자각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곧 교회이듯,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입니다. 저는 최근에 크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는 교회다’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나 교인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큰 교회가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신앙과 인격, 이것이 바로 그 시대의 교회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큰 교회는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새끼 교회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사업적인 면에서 보면 큰 교회가 구제와 봉사 등의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큽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대에 어떤 목사가 있었느냐입니다. 이것이 사업보다 중요합니다. 교회의 크고 작음보다 ‘살아있는 목사가 몇 명이나 있었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닫는 것이 목사의 영성입니다. 오늘날 모두가 사업인들이 되었습니다. 큰 사업, 큰 교회, 큰 건물….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니.” 참으로 두려운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들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사역의 본질이 아닙니다. 목회는 ‘Being에 관한 문제이지 Doing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업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존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가 일보다 인격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자신의 인격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땅의 사업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일이요, 예수 따르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7장 15~20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매는 선지자의 행위와 인격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사와 맺은 교인의 인격입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내 제자들이 어떤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말씀하신 핵심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훌륭하심은 그 제자들 때문에 더욱 빛이 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이 베드로의 인격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인격, 우리들의 나무됨은 맺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그 나무가 달라지므로 그의 교회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당시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로 그의 목양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신령한 젖’,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성 개발은 신령한 변화입니다.
첫째, 목사는 신령한 젖을 공급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 : 2). 베드로는 신령한 젖을 공급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을 신령한 젖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신령한 젖을 먹어야 신령하게 살이 찌고, 신령한 모습이 나타나고, 신령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령한 젖은 신령한 목자만이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신령한 젖은 곧 설교자의 영성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젖을 먹습니다. 어머니의 젖은 생명의 양식이요, 건강의 원천입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따스한 젖가슴을 만지면서 잠이 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자기의 젖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가난해서 밥을 굶게 되면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없어 눈물로 아이의 얼굴을 적셨습니다. 가난한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허기진 배를 부둥켜 안고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리지만 젖이 나오지 않아 눈물로 그 젖꼭지를 적시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요, 목자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질 때 목회자는 신령한 마음에서 신령한 젖을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가 마음이 상하면 아이는 젖을 먹고 설사를 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젖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젖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젖을 맛본 아이는 우유를 먹지 않습니다. 신령한 젖을 맛본 성도는 신령한 것을 사모합니다. 그러므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맛본 우리의 양떼들은 세상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은 온통 세상의 일에 몰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이 계속해서 신령한 하늘 젖을 먹이지 않고 세상의 우유와 같은 짐승의 젖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신령한 젖이 흘러 넘쳤습니다. 신령한 젖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즉 생명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만날 때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병을 고침받는 것입니다. 사업이 번창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고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설교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신령한 젖을 먹이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령한 영성을 가진 최고의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마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베드로처럼 위대한 설교자의 영성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주여, 십자가에 죽을 수 없습니다”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막아서던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입을 열 때마다 십자가와 부활을 외쳤습니다.
신령한 젖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젖은, 곧 자기가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 사건의 체험 속에서만 공급되어 집니다. 신령한 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시므로 제자들이 맛본 은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신령한 젖이 흘러 나오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령한 집을 세우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4~5)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령한 집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있고, 성도가 있고, 설교가 있으면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당 크게 짓고 그 곳에 성도가 많아야 큰 교회인 줄 알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돌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땅에 붙은 반석은 깨트려 운반해 와야 성전으로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은 땅에 붙어 있는 돌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돌이 아닙니다. 반석은 깨어지고 운반되어야만 집짓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시몬은 흙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선고를 받은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이제 흙이 아니고 반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흙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반석은 땅에 붙어 있습니다. 비바람이 불고, 홍수가 넘쳐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가 신앙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반석은 땅에 붙은 반석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재하셔서 그 반석을 칠 때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제 집을 짓는 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신앙 고백만으로 교회는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검이 그 반석을 칠 때 반석은 깨어지고, 그때부터 머릿돌이신 주님에게 붙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집을 짓는 산 돌의 신비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신비한 비밀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의 육체가 깨어지는 반석임을 알았고 부활로 산 돌이 됨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신령한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지상에 세우는 돌집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46년간이나 걸려서 지은 헤롯의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삼 일만에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성전이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나가면서 예수님, 저 성전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모든 건물을 잘보아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 돌들이 어느 하나라도 제자리에 얹어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건물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있고 지금도 세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짓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성전을 지은 솔로몬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그의 인생은 많은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일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전을 지은 솔로몬의 축복을 이야기하지만 솔로몬은 축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은 지었으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다시 사는 부활의 신비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돌집은 지었으나 신령한 집은 짓지 못하고 넘어진 사람입니다.
성서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왜 위대합니까? 베드로나 바울이 땅 위에 건물을 짓는데 신경을 썼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날마다 재물을 갖다 놓았지만 사도들은 그것으로 교회당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교회당을 짓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모이려면 건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하나님의 일을 모두 다 한것처럼 자기 만족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인지 건물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역사 속에서 성전을 크게 짓던 시대는 타락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중세기 기독교가 타락했습니다. 한국의 불교가 타락했습니다. 인격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 성장이라는 것을 교회를 크게 짓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많이 쌓이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속에 신령한 인격의 집이 없다면 허상입니다. 예수님이 거하실 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은 건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신령한 돌이 된 성도들의 심령입니다. 곧 반석처럼 굳어진 심령을 깨트리고, 옛 사람을 헐고, 산 돌로 세워진 신령한 집에 주님이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새 성전을 건축한 사도의 승리를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니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 : 20).
자기 몸에 성전을 건축했던 사도들의 영성을 전수받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초대 교회는 베드로의 위대한 영성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땅의 일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위대한 교회를 세우는 목회자의 영성을 보게 됩니다. 반석이 깨지고 산 돌이 된 베드로의 위대한 영성이 교회에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것은 결국 순교자가 된 데에서 찾아집니다. 목회자가 가야 할 길은 순교자의 길입니다. 목회자의 최고의 영성은 순교자의 영성입니다. 이러한 영성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순교는 십자가와 부활을 몸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셋째, 목회자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칼잡이들입니다. 칼을 들고 짐승을 잡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말씀의 칼을 들고 교인들의 짐승의 근성을 잘라야 합니다. 칼로 죽이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만날 때마다 동물의 근성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불태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자기 피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간 거룩한 제사장이십니다. 자기 몸을 친히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집에서 신령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린 자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셨고 사도들도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양치는 자들인데 그릇된 목양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을 사업적으로 기른다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고 살찌워 털을 깎고 젖 짜먹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털 깎고 젖을 짤만 하면 다들 가버려요”라고 하면서 섭섭하다고 합니다. 그래, 자네는 양을 길러서 젖을 짜 먹고 털을 깎아 쓰려고 길렀는가?” 우리는 젖과 털을 탐하는 목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양은 젖을 짜먹고 털을 깎아 가지기 위한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양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죽였습니다. 양치는 자는 털을 깎고, 젖을 짜 사업을 확장하려고 양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양을 죽이기 위해 기르는 것입니다.
신령한 목회는 양들에게 신령한 것을 먹이고, 신령한 집에서 살게 하다가 결국 신령한 제물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제물은 스스로 죽는 제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희생 제물이 되셨듯, 이제 목회자는 스스로 주의 제단에 순교의 제물로 자원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지자들 대부분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아벨,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많은 사람들이 양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그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털을 깎거나 젖을 짜기 위해 양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제물이 되도록 길렀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부흥될 때 목장이 번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한 마리라도 제물 될 사람이 없으면 그 목장은 실패라는 것을…. 털 깎고, 젖 짜고, 새끼 낳고, 그래서 번창하기 위한 목장이 아닙니다. 제물 삼을 양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인들을 보면서 ‘신령한 살이 찌고 신령한 털이 자랐으니 저 양이 제물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아, 저 사람 헌금 잘 내고, 저 사람이 젖을 잘 내는 것을 보니 이제 살맛이 나는구나’이렇게 생각했다면 회개할 일입니다.
베드로 목자에게서 신령한 젖을 먹고 자란 스데반은 주의 제단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순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신앙적 열정과 헌신의 절정이 스데반에게서 나타납니다. 초대 교회가 모이고, 기도하며, 성령이 충만하고, 기적이 나타나며 남녀의 무리가 수만 수천이 되는 것에 순교자들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스데반의 순교는 베드로의 신령한 목회에 나타난 최고의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무릎을 꿇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자기 몸을 제물로 삼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제물이 되어 양을 살려야 합니다. 양은 마지막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목표는 평신도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목사도 세우고 장로도 세웁니다. 목사는 소모품입니다. 목사는 죽으라고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성을 가진 목사의 의식입니다. 자신을 소모시켜서 양을 살찌워야 합니다. 죽음으로 양의 양식이 되어준 목자만이 제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을 길러 털을 깎아 옷을 해입고, 젖이나 짜 먹는 목자에서는 결코 제물될 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사에 나오는 위대한 순교 사화입니다. 로마 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인자하여 그의 목회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빈민 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식스투스 감독이 사형장에 끌려 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 가면서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단으로 나아가실 때 늘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지금은 저를 데려 가지 않으십니까?”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대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당시에 식스투스 감독의 교회 수석 집사로 거대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식스투스는 수천 명의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와 불구자들을 살리는 민중적 목회를 하는 감독이었습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알게 된 로마 시장은 교회의 모든 재산을 상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연기하도록 허락받고 교회당의 모든 보물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수천의 민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으로 올라오면서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때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당 문을 활짝 열고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의 무리를 가리키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목회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돈 많은 사람이 등록하면 보물이 들어 왔다고 생각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을 보면 걸레처럼 여기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나 저나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들이 바로 나다. 이들이 바로 나다. 이들이 바로 보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식스투스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은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로마 황제 앞에서 숯불로 달구어지는 수난을 당합니다. 그는 불에 타 마지막 순교의 제물로 죽어갔습니다. 신령한 목자가 있는 곳에 순전한 양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령한 목자가 있는 곳에 신령한 교회가 있습니다. 신령한 베드로에게 신령한 스데반이 나오듯, 신령한 목자가 될 때 신령한 교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영성은 베드로로 하여금 순교의 길을 기쁘게 걷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위대한 목회자의 영성은 순교자의 영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땅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도 갈릴리 바다로 고기잡으러 갔습니다. 연약한 베드로였습니다. 제자로서도 실패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르며 배웠으나 주님을 닮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의 삶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 못하던 일들이 성령을 받으므로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서 신령한 세계를 알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령한 젖을 공급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반석은 깨져 산 돌이 됐고 신령한 집이 세워졌습니다. 신령한 제사장으로 자기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간에 세 가지면에서 영성을 개발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영성을 개발하여 신령한 젖이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영성을 개발함으로 교회가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영성이 개발되어 하늘나라 면류관을 쓸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