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성경인물 히브리어 원어성경 설교말씀은 에노스라는 인물입니다. 에노스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인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노스(에노쉬)(창4:25-26)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가인은 분노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대적하였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불신자들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겉으로 신앙 생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적하게 됩니다.
가인은 분노를 내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동생을 들판에서 쳐 죽이게 됩니다.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땅에서 농사하는 것이 효력을 내지 못하고 땅에서 방황하는 자가 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영역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놋 땅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성을 쌓고 자손들을 낳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손들은 모두가 죄악의 자손들이고 세상에서 자리 잡는 자손들의 조상들이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후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아벨이 죽임을 당하므로 끝이 난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 위하여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아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은 아담을 통하여 셋을 주십니다.
(창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아담이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아내와 동침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다시’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오드)입니다. 이 뜻은 증거하다, 증언하다, 증거를 삼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셨는데 가인에 의해서 아벨이 죽자 끝난 것처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키고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만들어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통해서 구속의 역사를 만들어 가려고 하시는데 사탄은 가인을 통해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셋을 통하여 다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시고 증거의 씨로 셋을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구원받지 못하도록 계속적으로 방해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시험에 빠지게 하고 우리를 환경으로 공격하고, 신앙과 믿음을 공격하여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가인처럼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말로 공격해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물질로 공격하고, 세상 권세를 가지고 공격을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험에 절대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끝까지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구속의 역사도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아내와 동침을 하는데 단순능동형으로 들어가서 즉시 완료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담은 아벨이 죽고 난 후에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위로를 받기 위하여 다시 아내와 동침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셋을 낳게 됩니다. 여기에서 ‘그가 아들을 낳아’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들은(히브리어 벤) 입니다. 이 뜻은 건축하다, 증축하다, 건설하다, 복구시키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벨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구속의 역사가 끊어지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새로운 아들을 주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건축하시고, 다시 증축하시며, 구원의 사건을 건설하시면서 복구해 나가시는 새로운 씨를 주시고 있습니다.
‘셋’ 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셰트) 관심을 가지다, 정렬되다, 세우다, 짓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셋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계획을 세우고, 정렬하시고, 짓게 되는 것입니다.
(창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자기의 모양’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데무트) 입니다. 이 뜻은 생각하다, 비교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형상과 비교할 만큼 같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담도 자기의 모양대로 낳았습니다. ‘자기의 형상과 같은’ 이라는 단어에서 ‘형상’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첼렘) 입니다. 뜻은 형상, 석상, 그림자,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실체와 같은 형상으로 아담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까지도 본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아’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얄라드) 입니다. 그런데 히필 사역능동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셋이라는 아들을 주심으로 낳게 됩니다.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은 아벨 대신에 셋을 얻게 됩니다. 셋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것인가를 아담은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도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담처럼 아벨이 죽고 나니 더 이상 소망이 없구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적인 소망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할 때에 항상 역사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공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죄악이 있어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다고 인정하다가 시간이 흘러가면 믿음이 떨어져 자신의 능력이나 세상의 도움으로 된 줄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약점입니다.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도 시간이 흐른 후에 아들을 낳는데 에노스를 낳게 됩니다.
(창 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게 되는데 여기에서 에노스를 낳는 것도 히필 사역능동형으로 즉시 낳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경건한 자들은 히필형으로 낳게 되고 불 경건한 자들은 칼형 단순능동형으로 낳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강권적으로 에노스를 낳게 하시는데요. 에노스를 낳은 후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보아야 합니다.
1. 낳았을 때에 심상치 않게 에노스를 낳았습니다.
창세기 5:6절에서는 히필형으로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서 에노스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창4:26절에서는 푸알형으로 강조수동으로 낳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이 있어도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이 푸알형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에노스를 낳을 때에 보통 힘들게 낳은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산고를 겪고 에노스를 낳은 것입니다. 아마도 산모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탄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데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모진 핍박과, 고난과, 모함과, 고통과, 치욕을 당하시고, 나의 영혼을 구원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에노스가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고통이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나의 생명이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그럼 왜 에노스가 탄생되고 나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을까요?
그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에노스를 낳은 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까요? 에노스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담의 족보에도 가인의 후손들은 빠져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노스’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에노쉬) 입니다. 이 뜻은 몸이 매우 약하다, 상처를 입다, 부패하다, 고칠 수 없다, 앓다, 재앙,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식의 이름을 재앙이다, 부패했다, 상처를 입었다, 병약하다, 라고 지을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이름을 짓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이름을 이렇게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노스를 보면 예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고 평생 약한 자와 함께 하셨으며 죄 많고, 병든 자, 힘없는 자와 함께 했으며,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천국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부르짖고 사업이 부도의 위기에 놓이거나, 자식이 병에 들거나, 가정의 불화로 위기가 오거나, 나에게 힘든 시련의 시기가 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호소하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풀어지고 잘 살게 되고, 만사가 편안해지면, 다시 하나님을 찾기보다 세상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더 믿음을 세우고 기도로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야 하는데 복을 받으면 결국 멀어집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은 절대 이런 신앙을 갖지 말고 더 복을 받고, 더 잘되고, 더 문제가 해결되면 더 열심히 주를 위해 살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예배드리는 신앙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어떻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까요?
‘사람들이 비로소’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할랄) 입니다. 호팔 사역수동형을 사용하고 있고 완료시제입니다. 이 뜻은 상처를 입히다, 풀다, 상하다, 수치를 당하다, 더럽힘을 받다, 찌르다, 깨뜨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사역수동형은 강제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도록 시킴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시킴을 받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보면서 이 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아무도 죄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어둠에 살다가 죽어갈 때에 혜성처럼 나타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상처를 받고, 로마군병의 수치를 당하시고, 자신의 몸이 더럽혀짐을 받고, 창과 채찍에 찔리시고 맞고 자신의 육신이 깨트려지는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라고 외쳤습니다.
(마 27:53-54)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때부터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에노스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불렀더라’ 라는 단어는 에노스에게 속하여 그때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구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롬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입으로 구원자라고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입으로 반드시 외쳐야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에노스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부르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멀어져서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길을 예수님이 다리를 놓아주심으로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의 길을 가고 세상의 길을 갈지라도 나는 오직 주 예수를 의지하고 믿고, 입으로 외치면서 오직 주의 길만을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