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설교말씀은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마온에 사는 나발과 아비가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나발의 재산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어려움에 처하자 사람을 보내서 나발에게 먹을 양식을 주어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미련한 자로서 욕심도 많았습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윗을 냉정하게 대접했습니다. 다윗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다윗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화가나서 군대를 보내어 나발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현명한 아비가일이 먹을 음식을 가지고 와서 다윗을 영접하므로 다윗의 화가 누그러졌습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나발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 후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마온에 사는 나발과 아비가일(삼상 25:2-8)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발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누구의 예표입니까? 바로 심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관점에서 풀어나갈 것입니다. 그럼 신앙생활을 하는 나는 나발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비가일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나발과 같은 자라면 빨리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아비가일과 같은 자라면 주님의 신부가 되어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삼상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비이쉬 비마온 우마아세후 바카르멜 비하이쉬 가돌 메오드 비로 촌 쉘로셰트 알라핌 비엘레프 이짐 바예히 비기조즈 에트 초노 바카르멜
성경은 우리에게 나발에 관하여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은 갈멜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부자인데 양이 삼천 마리가 있고 염소가 천 마리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멜에 있고’ 히브리어(카르멜 3760) 갈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케렘 3754) 포도나무, 포도원,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나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의 집은 마온에 있는데 생업은 갈멜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나발의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갈멜 산에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갈멜 산도 이스라엘 산지 중에 최고의 산으로 늘 푸르른 산입니다. 성경은 나발도 육적으로 이러한 인생을 살면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발은 심히 거부인데 양이 삼천 마리이며 염소가 천 마리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는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면서 키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양들은 겁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에 낯선 장소에 가기를 꺼려합니다. 특히 바위를 타고 넘어가는 것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염소는 겁이 없기 때문에 목자 앞에서 산 위에 있는 바위를 타고 넘어갑니다. 이것을 양들이 보고 배워서 염소가 하는 대로 따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소는 풀을 뜯어 먹어도 위에 나온 싹만 먹는데 양들은 뿌리 채 뽑아서 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다음 해에 싹이 나오질 못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소가 먹는 것을 양들이 보고 배워서 풀을 뜯어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근동에서는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여 키웠습니다.
삼상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비솀 하이쉬 나발 비솀 이쉐토 아비가일 비하이샤 토바트 세켈 비파트 토아르 비하이쉬 카셰 비라 마알랄림 비후 칼레보
이제부터 성경은 나발의 성격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나발의 아내는 아비가일인데 아내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반면에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발’ 히브리어(나발 5037) 나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나벨 5034) 미련하다, 쇠잔하다, 쇠약하다, 흩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나발의 이름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미련하고 자신의 고집만 피우면서 세상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선택 받지 못한 자의 표상입니다. 세상에서 열심을 다해 일을 했지만 영적으로는 늘 쇠약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은 자신이 쌓아 두었던 물질과 공로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안개처럼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의 욕심에만 눈이 멀어 영적인 것은 준비하지 않는 자들이 현재 나발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고집이 있고 행실이 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 히브리어(아비가일 26) 아비가일,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아브 1) 아버지, 라는 뜻과 히브리어(길 1523) 기뻐 날뛰다, 즐거워하다, 전율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성경에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을 예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나발은 다윗을 선대하지 않았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을 맞이하여 자신의 것을 가지고 선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맞이할 때에 기뻐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칠 정도로 전율이 흐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주님이 더 귀하고 좋기 때문에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아비가일입니다.
그럼 현재 나는 어떤 사람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나발과 같은 신앙입니까? 아니면 아비가일과 같은 신앙입니까? 나발은 영적인 것은 준비하지 않고 세상의 탐욕에 눈이 어두워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아비가일은 영적인 것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하는 신앙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아비가일과 같은 신앙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삼상25:4-6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4절 바이쉐마 다비드 바미드바르 키 고제즈 나발 에트 초노
5절 바이쉘라흐 다비드 아사라 니아림 바요메르 다비드 라니아림 알루 카르멜라 우바템 엘 나발 우쉬엘리템 로 비쉐미 리샬롬
6절 바아마리템 코 레하이 비아타 샬롬 우베티카 샬롬 비콜 아쎄르 리카 샬롬
다윗은 나발이 자기 양의 양 털을 깎는다는 것을 광야에 있을 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다윗의 이름으로 문안하고 나발에게 먹을 양식을 달라고 소년들을 보낸 것입니다. 다윗이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다윗’ 히브리어(다비드 1732) 다윗,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도드 1730) 가장 사랑하는 자,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재산을 다른 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었으며 나발의 재산을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함부로 나발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들을 향한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상25:7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7절 비아타 샤마이티 키 고지짐 라크 아타 하로임 아쎄르 리카 하이우 임마누 로 헤킬라미눔 비로 니피카드 라헴 메움마 콜 이메 헤요탐 바카르멜
다윗이 나발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고 또한 갈멜에 있는 동안에는 나발의 재산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잃지’ 히브리어(파카드 6485 VNAMZS 동사 닢알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보응하다, 잃다, 돌보다, 징벌하다, 라는 뜻입니다. 나발의 양과 염소가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것은 다윗이 얼마나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대근동에는 강도들이 많습니다. 광야에서 은거하면서 살다가 남의 재산을 노략질하려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다윗의 군대들은 나발의 적들에게 보응하여 갚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늑대나 사자들로부터 나발의 재산을 지키면서 돌봐준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나발의 양과 염소가 광야에서 남아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나발의 재산은 벌써 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산을 돌보아 주시고 증식하게 하시며 복을 주셔서 흑암의 세력들로부터 재산과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삼상25:10-11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10절 바야안 나발 에트 아비데 다비드 바요메르 미 다비드 우미 벤 이샤이 하욤 라부 아바딤 하미트파리침 이쉬 미페네 아도나이브
11절 비라카히티 에트 라히미 비에트 메마이 비에트 티비하티 아쎄르 타바히티 리고지자이 비나타티 라아나쉼 아쎄르 로 야다이티 에이 미제 헴마
우리는 나발의 행동을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사환들이 나발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을 했지만 나발은 다윗도 모르고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 떡과 물과 고기를 못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나발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표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입니다. 현재 나발이 다윗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도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원수로 갚고 있는 것입니다. 나발은 너무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자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을 모욕하고 믿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삼상25: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바요메르 다비드 라아나샤이브 히기루 이쉬 에트 하리보 바야히기루 이쉬 에트 하리보 바야히고르 감 다비드 에트 하리보 바야알루 아하레 다비드 키아리바 메오트 이쉬 우마타임 야쉬부 알 하켈림
다윗은 화가 나서 칼을 차고 부하 400명을 데리고 나발을 치려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예표입니다. 주님은 구름타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하고 모욕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나발은 선택받지 못한 자가 되어 마지막 날에 심판받을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삼상25:18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바타마헤르 아비가일 바티카흐 마타임 레헴 우쉐나임 니빌레 야인 비하메쉬 촌 아사오트 비하메쉬 시임 칼리 우메아 치미킴 우마타임 디벨림 바타셈 알 하하모림
반면에 아비가일은 어떻게 합니까? 떡 200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100 송이와 무화과 뭉치 200개를 가지고 다윗을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자들이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는 모습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러 가는 모습입니다.
떡과 무화과 뭉치를 200개를 준비했습니다. 떡과 무화과 뭉치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떡은 히브리어(레헴 3899) 빵, 이라는 뜻입니다. 무화과 뭉치 히브리어(데벨라 1690) 말린 무화과를 압축하여 만든 떡입니다. 아비가일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준비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200의 숫자적 의미는 완전에서 부족한 수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아비가일이 이렇게 준비했지만 이것은 당신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들도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신부인 우리가 신랑을 맞이할 때에 준비하는 믿음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완전해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양과 볶은 곡식을 다섯 마리와 다섯 세아를 준비합니다. 양과 볶은 곡식도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볶은 곡식은 불에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고난당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 받고 나왔을 때에 선택받은 자들에게 곡식으로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5의 숫자적 의미는 은혜, 기적,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이 이렇게 양과 볶은 곡식을 준비함으로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믿음을 주고 있습니까? 마지막 날에 재림하실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는데 멍청하게 준비 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양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볶은 곡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매일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말씀 안에서 영의 양식을 먹으면서 준비하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 후하게 대접을 하고 죄악의 용서를 받은 후에 어떻게 됩니까?
삼상25:39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바이쉐마 다비드 키 메트 나발 바요메르 바루크 아도나이 아쎄르 라브 에트 리브 헤리파티 미야드 나발 비에트 아비도 하사크 메ㅔ라아 비에트 라아트 나발 헤쉬브 아도나이 비로쇼 바이쉘라흐 다비드 비이다베르 바아비가일 리카히타흐 로 리이샤
나발이 죽고 난 후에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기의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새로운 신랑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멍청하고 미련한 자와 함께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나발은 어떻게 됩니까?
삼상25:36-38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이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은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36절 바타보 아비가일 엘 나발 비힌네 로 미쉬테 비베이토 키미쉐테 하멜렉크 비레브 나발 토브 알라이브 비후 쉐코르 아드 메오드 비로 히기다 로 다바르 카톤 비가돌 아드 오르 하보케르
37절 바예히 바보케르 비체트 하야인 미나발 바타게드 로 이쉐토 에트 하디바림 하엘레 바야마트 리보 비키리보 비후 하야 리아벤
38절 바예히 카아세레트 하야밈 바이고프 아도나이 에트 나발 바야모트
나발은 다윗의 심판이 오는 줄도 모르고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집에서 배설하여 만취 상태에서 마음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의 심판이 다가오는데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세상에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미련한 나발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나발과 같이 세상에서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도 무시하는 신앙생활을 하실 것입니까? 모든 물질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된 것인데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드리지 않고 자신의 욕심에 빠져 사는 신앙은 안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아비가일처럼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매일같이 먹고 마시면서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온다는 말을 듣고 빨리 나가 맞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