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화 자료 중에서 고난과 환난에 대한 설교예화를 통해서 설교가 더 풍성해지고 듣는 청중들이 설교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는 설교예화 자료입니다.
고난과 환난에 대한 설교 예화 자료
고난의 삶을 자청(?)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아는 많은 사람들 중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수하고 지금까지 우리의 기억에 남아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가까운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는 자신의 좋은 환경과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을 거부하고 스스로 빈민굴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한없는 고통을 당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또한 독일의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는 유복한 환경과 높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아프리카에 들어가 토인들을 돌보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멍청한 짓이라고 비난할지 모르나 그것은 주님을 좇기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짊어진 아름다운 고난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좇기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용기있는 신앙 ! 이것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첫사랑을 지키려는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피하거나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그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고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고난의 십자가는 축복의 십자가로 바뀌고 우리의 신앙은 더욱더 강하여 지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며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 25)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덴마아크는 1864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함으로 남부의 기름진 실레스비히와 홀수타인 두 주를 잃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국내 경제는 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패전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은 덴마아크를 존망의 위기까지 몰고 갔습니다. 전쟁에서 패전하여 돌아온 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길거리에서 술주정을 하며, 여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외국인에게 몸을 팔기도 했습니다. 덴마아크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패전, 전비 부담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배상, 국토의 손실, 덴마아크가 이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 역경에 도전할 것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룬트비히 목사였습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란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라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농민 학교를 세워 성경을 기초로 한 정신적인 자원을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그러한 역경을 극복할 힘을 얻었습니다.
생명의 방패(?)가 된 안경
최근에 나는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전 대통령인 테오도르루우즈벨트(Theodore Roosevelt)를 암살자의 총알로부터 어떻게 보호하여 주셨는지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대통령은 매우 근시 였고, 그래서 그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지니고 다녔는데 하나는 가까운 곳의 것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멀리 있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대대적인 정치 캠페인 동안 그가 밀워키(Milwaukee)시에서 연설하고 있었을 때쉬렌트라고 하는 남자가 그를 쏘았습니다. 루우즈벨트는 다쳤지만, 그의 연설을 끝마치겠다고 고집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의사가 그의 상처를 검사했을 때, 그는 대통령의 조끼 주머니 속에 있었던 강철 안경집이 총알을 그의 심장으로부터 빗겨 나가게 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 정말 놀랍군 ! ”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그 구부러진 안경집과 함께 그 안의 부서진 것들을 조사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생각하기를 두 벌의 안경을 갖고 다니는 것, 특히 그 쇠로 된 케이스에 담은 두껍고 무거운 안경은 귀찮은 것이라고 해 왔는데 오늘 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구하려고 그것을 사용하셨구나.”
50살의 세르반테스
소설, 우화, 시를 백편이나 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 용병으로 유럽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군대가 전쟁에 지게 되어 그는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했습니다. 이제 그는 먹는 것이나 주위의 간섭없이 글을 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끝내고 그것을 그의 동료 투옥자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또 다른 한 장을 끝내고 이 것 또한 그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는 그 책을 다 끝마치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돈키호테(Don Quixote)」였고, 그 작가의 이름은 세르반테스였습니다. 그는 그때 50살이었습니다.
고난의 삶이지만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도 기쁨을 찾은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것입니다. 삶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기쁨의 연속이니·.
고난과 축복
몇 년 전에 고기잡이 배들이 뉴잉글랜드의 동부 연안에 있는 한 작은 어항으로부터 출어하였습니다. 오후에 그들은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그 어선들 중 단 한 척의 배도 항구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들의 부인들,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애인들은 해변을 오르내리면서 손을 모아 하나님께 그들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상황에 공포는 더하여, 한 오두막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모두 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집을 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기쁘게도 모든 어선들이 연안에 있는 항구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망의 얼굴을 한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집이 불타버린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육지로 올라 와서 그의 남편을 맞이했을 때 그녀는 울며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는 망했어요. 우리 집과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어요.” 그러나 남자가 말하였습니다. “그 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모든 어선들을 항구로 무사히 인도한 것은 우리의 불타는 오두막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오 ! “
고난 속에서 피어난 기적의 꽃
세계 2차 대전 때에 불란서가 독일 나찌스 군대에게 패해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나갔던 30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 불가능해서 영국으로 건너오기 위해 해협으로 도망갈 때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하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때에 영국 왕 조오지 6세가 온 영국에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전 국민이 그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독일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국 편에는 도버 해협이 어떻게 잔잔하고 고요한 지 거울같이 맑아서 수많은 배가 29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일 후에 영국 군대를 비롯해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 놀라운 기적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의지하며 기도한 사람들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깨어 기도하십시오. 어떤 고난도 기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누사덕의 지혜
당나라 칙천무후는 중종, 예종을 다 제쳐놓고 정치를 마음대로 주름 잡는 세도가였습니다. 자기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탄압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능한 사람을 잘 써서 나라 일을 제대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누사덕이란 사람도 유능한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사덕은 사람됨이 부드럽고 너그러워서 다른 사람이 무례하게 대들어도 탓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누사덕의 아우가 대주 자사가 되어 가게 되었을 때 누사덕은 아우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모두 출세하여 경사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그만큼 남들의 시기도 있을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시기를 모면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고 걱정했습니다.
그 아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나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해도 탓하지 않고 내 손으로 닦겠습니다. 만사를 그와 같이 하자면 형님의 걱정을 끼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네 얼굴에 침을 뱉을 때에는 그 사람이 화가 났을 때이다. 그런데 네가 네 손으로 그 침을 닦으면 상대방은 점점 더 화가 날 것이 틀림없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버려 두면 자연히 마르게 되는 것이니까. 그럴 때는 웃으면서 침을 그대로 받는 거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고난을 웃음으로 이기는 지혜를 배웁시다. 분노를 삭일 때 앞에 닥친 어떤 고난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어떻게 단련되야 합니까?
고난은 우리에게 닥쳤을 당시 크나큰 마음의 상심이 되지만 이것을 슬기롭게 극복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해주는, 세상 세파에 밀려다니지 않도록 도와주는 힘이 됩니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됩니까? 수많은 풀무질과 망치질로 강하여 지는 것입니다. 고난을 수용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아픔은 우리를 강한 신앙인으로 서게 만들 것입니다.
여기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아비시니아의 전도사였던 램비(Lambie)박사는 아프리카에서 물살이 빠르고 다리가 없는 시내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을 건널 때 발이 휩쓸려 가거나 물 아래로 깊이 잠기고 바위에 던져지게 죄어 부딪쳐 죽게 되는 위험이 따릅니다. 램비 박사는 원주민들에게서 이 물을 건너는 방법을 알아 냈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돌을 등에 지고 물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 돌의 무게는 그의 발을 시내의 바닥에 단단하게 유지해 주어서 그는 휩쓸려 가지 않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램비 박사는 이것을 응용하였습니다. 위험스러운 물을 건너는 동안 적은 항상 우리를 넘어뜨리려하고 우리에게 돌진하여 생명을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는 짊어질 바닥짐이 필요한데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되긴 하지만 우리가 넘어져 휩쓸려 가지 않도록 해줍니다.
고난 속에 발견한 주의 섭리
-웨즐리의 순교여행시절 –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즐리는 수없이 닥치는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줄 아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웨즐리가 어느 날 마차로 바퀴자국이 가득 찬 좁은 길을 따라 선교 여행을 하고 있던 중에 마차가 진흙 속에 처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마을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몇 사람이 도와서 마차를 움직이려 하는 동안 한 기독교인이 마침 그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웨즐리는 잠시 그와 말을 주고 받았고 이 기독교인이 매우 빈궁한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농사꾼인데 농사가 흉작이어서 집세를 낼만한 돈도 없고, 당장 자식들과 길거리에 쫓겨나게 되었음을 절망스럽게 호소했습니다. 이에 웨즐리는 “당신이 얼마나 빚을 졌나요? 나는 우리가 그것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주님은 분명 내가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그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에게 돌아서서 외쳤습니다. “자, 나는 이제 우리의 마차가 왜 진흙에 갇히게 되었는지 알았다. 우리의 멈춘 걸음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을 돕도록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신 것이다. “
자신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속에서 바라보고 실천하는 웨즐리의 믿음은 참다운 이웃사랑의 표본입니다.
고통의 가치
주전 500년경 희랍의 비극 극작가 에스키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 ” 독일의 시인 쉴러도 비슷한 의미로 “행복한 사람은 고통을 배워야 한다. “고 쓴 일이 있습니다. 분명 인간생활에 있어서 고통은 여러 가지 뜻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알기 쉬운 것도 아니고, 얻기 쉬운 지혜도 아닙니다. 약 100년 전에 레치탐이라는 사람이 의학에 대해서 쓸 때에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고통의 모든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참으로 위대한 일일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인간 생활의 수수께끼 같은 일은 사람은 항상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상태이지만 동시에 고통없이는 살 수 없고 생의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약 1500년전 성 어거스틴은 이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다룬 일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놀랍게도 고통이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잘못된 상태를 깨닫기 위한 중요한 표시가 된다는 의미로의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몸에 다친데나 병든 부분이 있다면 아프게 느껴져야만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아픔이 없는 병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아픔이 더 견디어내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죽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영적인 죽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이것은 과연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에 빼놓을 수 없다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
4세기에, 수많은 고행주의자들이 유혹을 물리치고자 은자와도 같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고행들 중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성 아셉시마스(Ascepsimas)는 온몸을 수많은 사슬로 묶어서 손과 발로 엉금엉금 기어다녔습니다. 수도승인 베사리온(Besarion)은 그의 육체가 편안히 잠을 자는 것마저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는 누워서 잠을 자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카리우스(Ma-carius) 2세는 늪 속에 발가벗고 6개월 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결국 6개월 후에, 그의 몸은 모기에게 너무 많이 물려서 마치 나병환자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성 마론(Maron)은 속이 빈 나무 줄기 속에서 11년 동안 생활하였습니다. 다른 고행 자들도 동굴이나 야수의 굴, 물이 말라 버린 우물, 심지어는 무덤에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불결함, 악취, 벌레들, 그리고 구더기로 인해 고통받는 것조차도 정신적으로 유익하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곧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교인
24명의 미 의원들은 이집트에서 10명의 크리스찬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체포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집트 대사관에 유감의 뜻이 담긴 서신을 발송했습니다. 미의원들은 이 서신에서 “투옥된 크리스찬을 즉각 석방하고 종교나 신앙에 근거한 차별행위나 인신공격을 즉각 중지할 것.”을 공식으로 요구했습니다.
투옥된 크리스찬들 중 6명은 1970년대에 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온 사람들이고, 나머지 4명은 이집트에서 있는 C.C.C훈련에 참석했다가 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온 사람들입니다.
「연합통신」은 국민적 연합을 ‘현저하게 해칠 정도로’ 기독교, 회교, 유대교를 모욕하는 사람에게 최고 5년의 징역과 750불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1972년에 제정된 법에 이들이 저촉되어 투옥되었다고 믿을만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크리스찬들은 실제로는 이 법이 기독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회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지 못하게 하는 데 변칙 적용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국제사면위」 간부 칼린 윈델(Carline Win-dall)의 말은 이집트 당국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양심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인권과 정치적 권력에 관한 국제협약’은 모든 사람에겐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강령을 선포했으며, 이집트 당국은 1982년 1월19일 이를 정식으로 인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당국은 이 강령을 인준한다고 해놓고 스스로 이를 어기고 있습니다. “
현재 미국 전체에 산재한 인권단체들은 미국인들에게 근처에 있는 이집트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 투옥된 이집트 크리스찬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근세시대의 명성
근대의 영성은 초대, 중세의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동시에 영성의 폭이 한층 광범위해졌습니다 국가적인 문화와 전통의 특징인 나타나고, 영성생활의 대중화, 개인현상과 또한 훈련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내놓게됩니다. 성서연구를 영성훈련에 중요한 방편으로 응용하게 되면서 성경의 말씀을 시적으로 표현하게도 됩니다. 스페인의 영성가로서는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와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 십자가의 성 요한(StJhon of the Cross) 등이 대표적입니다.
스페인의 영성은 매우 추상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습니다. 로욜라는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노예와 주인관계이며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명을 다하는 기사(knight)로서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영성의 표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절대적 순명(acatamie-nth)이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상상적이며 관조적입니다.
르네상스에 영향을 받은 이태리의 영성은 보다 실용주의적이며 실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내적인 심성을 명상하는 데 전심을 쏟으면서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랑스의 영성은 프란시스 데 살레스(Fran-tis De Sales)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경건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영혼을 위한 한 가지 길을 제공함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발견하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Salesian방법이라고 알려져 있는 간단한 명상 방법을 가르쳤는데, 영적 꽃다발(Spiritual Nosegay)이란 특색 있는 표식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꽃다발인데 그 당시 남녀들이 외출할 때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안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Jean-Jacaues Olier는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성찬예식과 거룩한 마음의 헌신과 로사리오(Rosary)의 기도를 요구했는데 로사리오의 기도는 내적 신학을 중심으로 단순성과 반복성을 띤 미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영성은 의식에 뿌리를 박은 매일의 예배를 드리는 일과 특히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독일의 영성은 독일적 신비주의의 전통을 갖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중세 기의 마지막 인물로서 칼빈처럼 합리주의적 인문주의가 아닌 독일 수도승의 전통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엑크하르트와 테일러에 심취해 있었는데 루터의 오직 믿음을 통한 은총의 구원이라는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도 독일의 디오니시우스적인 신비주의적 전통에 기초해 있는 것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중세에 있었던 개인의 실존적 차원의 영성이 지양되는 반면에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현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개인전도와 신비적, 미래지향적인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영성에 비교하여 존 웨슬레(John Wesley)의 영성에는 보다 사회복음적인 봉사와 현세적인 경향이 두드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