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목사는 예배마다 설교를 해야 하는데 이제는 설교의 홍수 속에서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성도는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다른 목사의 설교를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보통 미디어에 노출된 설교들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들은 미디어에 노출될 기회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설교의 위기에 목사는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책의 앞부분에 보면 어떤 평신도가 설교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 설교자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도 가면을 쓴다. 그는 선술도 안 마시고 다른 짓들도 안한 척한다. 그러나 하나의 확실한 사실은 목사 자신도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
우리는 흔히 설교와 예배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들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설교의 횟수 이전에 설교의 질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반작용의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평신도의 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정말 듣고자 하는 필요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혀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성숙의 욕구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설교들이 선포되지만 그것은 일방적이며 이해하기 힘든 다른 언어의 나열이며 서로를 지루하게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처럼 재미없고 비생산적이며 답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C.라이드의 “설교의 위기”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문제 제기의 차원에서 설교를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현재 상황에서 설교가 어떤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지적하면서 설교폐기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라이드는 결코 설교폐기론적 입장이 아니며 따라서 그는 설교를 변호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설교의 문제점을 여러가지 지적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설교의 상황이 바뀌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그는 대안을 다루기 전에 설교를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살펴보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설교를 파악할 때 현재 설교의 문제점들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보다 적절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커뮤니케이션으로써의 설교에 대해서 말하면서 설교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정말 설교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실험적인 대안들을 내놓고 있다.
설교를 “행동하게 하는 부름( A summons to action)” 이라고 정의한 것은 동감하고 긍정하는 설교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설교를 행동하는 부름이라고 정의할 때 설교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보다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선 설교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설교할 때 사용되는 단어나 어휘의 문제, 듣는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하거나 전혀 파악하지 못한 문제, 힘이 없는 설교의 문제, 상호 전달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전달됨으로 해서 생겨나는 단절의 문제, 또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삶에 구속되는 설교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매우 타당한 것이며 날카로운 지적이고 문제인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인식은 이미 보편화된 것이고 사실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와 인식 이후에 반드시 제기해야 할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설교는 회복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너무 길고 지루하고 필요와 동떨어진 시대와 걸맞지 않는 듯한 설교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설교가 복음을 전파하는 원초적인 양식이며 행동하게 하는 부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인지 어쩐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나 자기 만족 속에 도취된 것은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안을 때 우리는 대안 없는 문제 제기에 그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문제에 관해 대답하기를, 설교를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전달하는 유일한 기능으로는 생각하지 않지만 설교가 목사의 직무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설교가 하나님과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영혼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선포, 실증, 고취를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설교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우리를 먼저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망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물은 변한다. 그러면 하늘이 그의 입을 열게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한 버트릭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교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며 존속 될 것이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단순한 설교의 회복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은 올바른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설교가 예전의 영광스러운 자리에로 복귀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설교가 존속되고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방법이라는 사실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해결하고 고민해야할 문제는 그럼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권위구조와 커뮤니케이션 체제 속에서 어떻게 설교의 목적이 성취되는 설교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설교가는 설교란 무궁무진한 진리의 저장소에 바로 붙은 주류라고 하는데 현재 설교는 그렇지 못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또한 어?게 해야하는가?
C.라이드는 상황이 바뀌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첫째는 새로운 권위 구조이며, 둘째는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것이다. 설교상황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매스 미디어의 발전은 설교 환경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설교자라는 권위가 여전히 독보적이고 중심적이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 목사들이 여러가지 분야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기는 쉬운 일이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사회적 환경(context)이 변해 버린 것이다. 설교자라는 이름만으로 권위를 주장하고 유지하기는 이제 어려워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제는 교회 안에 있는 유능하고 탁월한 사람들의 경험과 은사들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나눌 수 있도록 기회와 장이 여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설교자라는 권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변화된 설교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목회가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목회라고 강조하며 오늘날에 와서는 설교자들이 그를 부르시고 맡기신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이러한 방법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하지만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다음으로 그는 대중 전달 매체에 의한 사람들의 사고 구조와 사고 과정 자체의 변화에 대하여 지적함으로써 설교 환경이 변화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은 듣는 설교가 아니라 보여주는 설교를 요구하며, 획일적인 방법의 의사 소통이 아니라 다양한 접근법의 상호 의사 소통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자기 스스로 생각할 능럭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든지 교회 밖에서든지 자기의 은사가 존중되는 커뮤니케이션 구조로의 전환을 요구하며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 교회 밖으로 빠져 나가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라이드가 지적한 이러한 교회 설교 환경의 변화는 광범위하며 중요한 변화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설교를 새로운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는 설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 한 개인(전달자)이 다른 개인들(듣는 사람)의 행위를 수정하기 위하여 자극제(보통 언어)를 전달해 주는 과정” 이라는 규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의를 사용할 때는 일반 학문에서의 정의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평가한 후에 사용되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커뮤니케이션은 몇 가지의 단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단계에 대한 연구가 설교를 검토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단계들을 이렇게 집약될 수가 있다. 첫 단계는 전달(Transmission) 로 전달자가 자기 메시지를 전할 때 일어나게 된다. 다음은 듣는 사람이 그 메시지를 들었을 때 발생되는 접촉(Contact) 이다. 다음은 듣는 사람이 처음 전달자에게 정보를 반영해 보이는 것에따라 되돌아오는 과정인 피드백(Feedback)이며, 이해(Comprehension)는 전달자가 전하는 메시지로써 의미하는 바를 ?는 사람편에서 정말 잘 이해할 때 이루어지게 된다.
다섯번째 단계는 받아들임(Acceptance)으로 어떤 사람은 전달자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듣고 이해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완전히 거부해 버릴 수도 있고 받아 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메시지를 들은 사람이 받아들였다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내면화(Internalization)이다. 마지막은 행위(Action)로써, “행위는 영향을 미쳐야 의미의 전달이 이루어 진다”는 것으로 전달된 메시지가 행동하는데 까지 도달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있어서 이러한 단계를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 설명되든 간에 복음을 전달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실제로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으로 빚어내야 하는 결과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을 때,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다르게 행동한다고 하면, 우리는 앞에서 개관한 일곱 단계를 완성하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에 관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에 관한 것은 ” 그 사람의 말과 행위 전체가 메시지를 구성한다. 말고 행동 사이에 내적인 모순이 있을 때 그 행동이 말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매개체가 갖는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설교를 파악해 볼 때 설교는 일방적인 독백으로 일관된다고 하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그래서 무엇이 이해되었고 무엇이 이해되지 않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의 연속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설교의 양과 회수가 너무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으로써의 설교는 목사가 너무 오래 자주 설교함으로써 설교 그 자체를 무디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설교는 고립된 사건으로써가 아니라 개인적인 접촉과 소집단 관계, 공동의 경험과 공동연구, 시청각 교육과 세계를 위한 봉사와 공동 참여 등을 포함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계속해서 이 책에서는 나름대로의 개선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설교와 토의, 설교 세미나, 소그룹 활동들, 설교를 교체하는 다양한 모델들, 재교육 모델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설교의 위기에 대한 문제 제기와 문제 인식에 관한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의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시대에 있어서 항상 이렇게 적응하고 대처해 나가는 생명력 있는 설교로써의 인식 전환은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안 제시하는 데 있어서 조금 약하다고 하는 것이다. 설교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측면에서 설교가 단순히 전달이라는 단계에 머물러 버렸음을 지적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한 설교가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접촉하고 원활하게 피드백이 되고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서 내면화 될 뿐만 아니라 행동하게 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그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대안 제시가 너무 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의 사례들을 보여주었지만 우리 상황에 맞추기에는 거리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이 책에서 제시해 주는 커뮤니케이션의 입장에서 설교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한국 설교의 문제점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한국 설교는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인식에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설교가 시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따라 가야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대의 변화에 어느 정도 신축성과 탄력성을 가지고 맞추어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태의연한 권위주의와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는 우선 시대 상황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 전제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