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성경공부에서는 사사기의 연대와 사사들이 활동했던 사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사들 중에서 크게 사역을 했던 삼손과 같은 사람들도 있고 삼갈과 같이 한 줄로 기록된 사사들도 있습니다.
사사기의 연대와 사사들의 활동 사역
Ⅰ. 사사기의 연대에 관한 고찰
사사기의 혼란스러운 상태가 몇 년 동안 계속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록한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의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비록 사사기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해도 그 대략적인 연대는 추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사 시대가 시작된 시기와 왕정 시대가 시작된 시기를 알면 사사기의 기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기의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기록들을 통해 사사 시대의 시작과 왕정 시대의 시작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인 것으로 대두되는데 이제 먼저 사사기가 시작된 연대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사사 시대의 시작에 관한 연구
사사 시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의 연대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출애굽의 연대가 B.C. 1446년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출애굽의 연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제Ⅱ권의 ‘출애굽 연대’ 부분을 참조할 것). 이렇듯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B.C. 1446년으로 생각할 때 그들이 ‘세렛 시내’에 도착했을 때, 즉 그들이 ‘시혼’과 ‘옥’을 정복한 후 요단 동편에 도착했을 때는 B.C. 1406년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정확한 연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사사기의 시작까지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나이에 대한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다시금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여호수아서의 증거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시내산을 거친 후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갈렙’의 나이는 40세였고(참조, 수 14:7),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의 1차 정복(수 1-12장)을 끝낸 때의 ‘갈렙’의 나이는 85세였다(참조, 수 14:10).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를 출발하여 가나안의 1차 정복을 마친 때까지의 기간은 45년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를 출발하여 ‘세렛 시내’, 즉 ‘시혼’과 ‘옥’을 점령한 요단 동편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간이 38년이었으므로(참조, 신 2:14) ‘세렛 시내’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1차 정복 사업은 45년에서 38년을 뺀 7년의 기간이 소요된 후였고 그 연대는 B.C. 1406에서 7년을 뺀 B.C. 1399년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의 연대를 결정한 후에 생각하여야 할 마지막 문제는 여호수아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죽음이 바로 사사 시대의 장을 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은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었다는 증거만을 제공해 줄 뿐(참조, 수 24:29) 그 외의 증거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론 가능한 사실들을 근거로 한 하나의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여호수아’의 나이가 ‘갈렙’의 나이보다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이 무리는 아니데 그 이유는 갈렙이 자기의 소유를 여호수아에게 청원할 때 매우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였으며(참조, 수 14:6-12), 이스라엘이 2차 정복을 시작할 당시, 즉 갈렙이 85세인 B.C. 1399년에 모세의 나이 90세, 또는 100세라고 생각할 때 여호수아가 죽을 때는 B.C. 1399년에서 10년, 또는 20년 후인 B.C. 1389년에서 B.C. 1379년 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사사 시대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때로부터 옷니엘이 최초의 사사직을 수행할 때까지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로 들어가는 준비와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기간에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장로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고 여호수아 시대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배반함으로 범죄 하기 시작했으며, 메소포타미아에 거하던 구산 왕 ‘리사다임’에게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사 시대의 실제적인 기간은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였던 ‘옷니엘’이 역사했던 B.C. 1373년에서부터 ‘사울’이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음 때의 B.C. 1043년까지의 약 330여 년 간으로 생각해야 한다(‘옷니엘’과 ‘사울’에 관한 견해는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거의 정확한 연대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들을 알기 쉽게 도표로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2. 사사기에 나타난 연대기적 비교와 증거
위에서 결정된 사사기의 연대적 기간인 330여 년의 기간은 사사기의 시작 연대를 추적하여 알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기가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의 통치 기간과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억압받은 억압의 기간들을 합친 연대기와 일치하여야 하므로 이제 사사기에 나타난 연대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사기에 기록된 사서들의 연대는 다음과 같다. 앞의 기간들을 합치면 모두 410년이 된다.
그러나 위의 연대표 중에서 구산 왕 리사다임으로부터 받았던 8년간의 압제 기간은 옷니엘 이전의 시대이므로 제외시키고(앞서 우리는 사사 시대의 실제적 기간을 옷니엘부터 사울까지로 보았기 때문에 옷니엘 이전의 기간은 제외시켜야 함), 가나안 족속의 야빈 왕으로부터 받은 20년의 압제 기간과 블레셋으로부터 받은 40년의 압제 기간은 ‘드보라’와 ‘삼손’이 사사로 활약하던 시기와 같은 시대의 사건으로 보고 제외시키면 실제로 사사기의 연대는 약 340여년이 되므로 앞에서 설정한 330여년의 기관과 거의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를 기준으로 설정한 연대기가 거의 정확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이스라엘이 당한 압제의 기간을 사사들의 활동 연대에 포함시키는 학설은 대부분의 성경학자들과 보수주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학설이며, 만약 압제 기간과 평화의 기간을 따로 생각하여 사사기의 연대를 410년간으로 생각한다면 사사기의 시작 연대는 B.C. 1453년,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이전에 이미 애굽에서부터 사사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모순 속에 빠지게 되므로 앞의 학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제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의 연대기를 도표로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참조, 사사기 도표4>.
Ⅱ. 이스라엘의 사사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14명이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사사로 인정되는 사람은 열두 명뿐인데 그 이유는 드보라와 함께 역사한 ‘바락’과 스스로 왕이 되어 3년 간 세겜을 다스린 ‘아비멜렉’은 사사들의 명단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제 사사기에 등장하는 열 두 사사들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옷니엘(삿 3:9-11)
‘옷니엘’을 뜻하는 히브리어 <laeynIt][; ; 오트니엘>은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은 능하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메소보타미아의 구산 왕 ‘리사다임’에게 8년간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최초의 사사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구산 왕 리사다임에게서 구출해 낸 일이 ‘옷니엘’이 행한 최초의 사역은 아니었다. 그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최초로 두각을 나타낸 일은 그의 ‘결혼’과 관련된 일이었다. 즉 ‘갈렙’이 아낙 자손이 살던 ‘헤브론’을 배당받고 그 지역에 살던 아낙의 세 아들들을 몰아낸 후 ‘드빌’을 정복하기 위해 자원자를 구할 때 그 일을 맡고 나선 자가 ‘옷니엘’이었으며, 옷니엘이 드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갈렙은 자신의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를 주어 결혼하게 하였던 것이다(참조, 수 15:13-19).
이러한 옷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신’을 부어 주심으로(참조, 삿 3:10) 이스라엘의 압제자 ‘리사다임’을 무찌르는 구원자로 세우셨고 사사 시대의 막을 여셨던 것이다. 한편 ‘옷니엘’의 신분에 대해서는 ‘갈렙의 동생’이라는 학설(Lange, Keil)과 ‘갈렙의 조카’라는 학설(Calvin, Matthew Henry)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두 가지의 견해 중 ‘갈렙의 조카’로 보는 학설이 더욱 타당하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의 수 15:13-19부분의 주해와 정인찬 편 ‘성서 대백과 사전’ 제6권 p. 350을 참조할 것).
2. 에훗(삿 3:12-30)
에훗은 ‘강하다’라는 의미로서 이스라엘을 모압의 ‘에글론 왕’으로부터 구출해 낸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이다. ‘게라의 아들'(참조, 삿 3:15)로 태어난 그에게서 다른 사사들에 비교되는 독특한 특징 세 가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의 신체적 특징이다. 즉 에훗만이 열두 사사 중에서 유일한 왼손잡이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신체적 특징을 후일에 그를 ‘왼손잡이 사사 에훗’으로 부를 만큼 그의 대표적 특징이 되었다.
둘째는 그의 사사직 수행의 독특한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대적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에훗은 그 당시의 대적인 모압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대신 먼저 계략을 사용하여 모압의 에글론 왕을 죽인 후 10,000명의 용사를 죽임으로 대적의 항복을 받았던 것이다. 셋째는 사사 시대의 역사 중 가장 오랜 세월의 평화를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사사직 수행으로 도래한 80년의 평화 기간은 비교적 오랜 동안의 평화를 유지한 옷니엘과 드보라, 그리고 기드온 이후의 40년 평화 기간보다 무려 2배나 길었던 평화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3. 삼갈(삿 3:31)
삼갈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의미나 어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아낫’의 아들로서 소 모는 막 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인 이스라엘의 세 번째 사사였으나 그의 활동 연대나 신분, 그리고 그의 활동으로 인한 평화의 기간 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것이 없다.
4. 드보라(삿 4:4-5:31)
‘꿀벌’이라는 의미의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네 번째 사사인 동시에 유일한 여성 사사이다. 그녀는 랍비돗의 아내로서 본래는 여선지자였는데(참조, 삿 4:4-11)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 줌으로써 사사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다. 즉 가나안의 ‘야빈’ 왕이 이스라엘을 압제하자 바락으로 하여금 납달리 지파 자손과 스불론 지파 자손 중 10,000명의 군사를 모아 대적하게 하고 승리를 거둠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드보라의 사사직은 직접 감당한 것이 아니라 ‘바락’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역사하였으나 이러한 역사 속에서 바락은 자신의 불신앙 때문에 영광을 얻지 못하고(참조, 삿 4:9) 드보라와 ‘시스라’를 죽인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로 돌아갔던 것이다. 한편 드보라 사사 이후에 이스라엘은 40년의 평화 시대를 누렸다.
5. 기드온(삿 6:11-8:35)
‘찍어 넘김’, ‘나무 베는 사람’, ‘벌목꾼’이라는 의미의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로서 ‘여룹바알'(참조, 삿 6:32;삿 7:1-‘바알이 더불어 쟁론한다’는 뜻)과 ‘여룹베셋'(참조, 삼하 11:21-수치가 더불어 이김이라는 뜻)의 두 가지 별명을 가진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사사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부터 7년 간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 오브라에 있는 자신의 타작마당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심을 받았고(참조, 삿 6:11-18)
두세 번의 표징을 받은 후 확신을 가지고 사사의 사역에 임했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한 용사 300을 선별하였고, 항아리와 횃불이라는 기이한 방법,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방법으로 미디안을 물리친 후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숙곳’을 들가시와 질려로 징벌하였으며, 브누엘 망대를 부숨으로 미디안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는 커다란 역사를 행하였다. 이스라엘은 기드온 이후 40년의 평화 시대를 구가하였다.
6. 돌라와 야일(삿 10:1-5)
‘벌레’를 뜻하는 ”돌라’와 ‘깨우소서’를 뜻하는 ‘야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들 사사들의 활동이나 명성이 유명한 대 사사들의 그것과 같이 특이하거나 대단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적인 일과 함께 사적인 일이나 물질적 풍요로움에도 대단한 관심을 쏟은 듯한데 그 이유는 야일이 30명의 아들들을 두어서 30마리의 나귀에 태우고 다녔고, 30개의 성읍들을 차지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참조, 삿 10:3-5). 그러나 어떻든 이들 역시 이스라엘 열두 사사의 반열에 속하는 자들이었으며 ‘돌라’는 23년, ‘야일’은 22년씩 각각 평화의 시대를 영위하였다.
7. 입다(삿 11:1-12:7)
‘그가 여신다’라는 의미의 ‘입다’는 이스라엘의 가장 훌륭한 사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암몬 자손에게 18년 동안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출한 여덟 번째 사사이다. 그러나 그는 출생이 뚜렷하고 정당한 이스라엘의 다른 사사들과 달리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기생의 아들이었고(참조, 삿 11:1), 그러한 신분 때문에 길르앗의 다른 아들들에게 쫓겨 ‘돕’ 땅으로 가서 잡류들과 함께 거해야만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에게 고통을 당하자 장로들이 ‘입다’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입다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서 입다 개인에게 한 가지 슬픈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암몬 자손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대 제일 먼저 만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는 경솔한 서원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대상이 자신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입다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서원한 대로 딸을 하나님께 서원 제물로 드렸고 그 결과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길르앗 사람을 적대시하는 에브라임 사람들까지도 격파함으로 다시금 이스라엘이 평화의 시대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듯 입다는 비록 그의 경솔함 때문에 딸을 잃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서원에 대한 신실한 태도와 믿음의 순종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참조, 히 11:32). 한편 입다 이후 이스라엘은 6년 간의 평화 시대를 구가하였다.
8. 입산과 엘론, 그리고 압돈(삿 13:8-15)
이들 역시 돌라와 야일처럼 이스라엘의 소 사사들에 속하는 자들이었기에 그들의 신분이나 적국, 그리고 압제 기간이나 활동 연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단지 ‘입산’만이 30명의 아들들과 30명의 딸을 둔 자였다는 사실과 ‘입산’이 7년, ‘엘론’이 10년, ‘압돈’이 8년 동안의 평화 시대를 누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9. 삼손(삿 13:2-16:31)
‘옷니엘’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는 ‘삼손’을 끝으로 그 막을 내린다. ‘태양의 사람’, 또는 ‘태양의 자녀’라는 뜻의 삼손은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출생하기 이전부터 나실인으로 지정된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라나 그는 나실인이 지켜야 할 세 가지 금지 사항, 즉 포도주를 멀리하라는 규례와(민 6:3,4),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규례(민 6:5), 그리고 시체를 가까이 말라는 규례(민 6:6) 모두를 어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는 과정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은 먼저 그가 블레셋 여인을 만나러 딤나로 내려가다가 사자를 죽이고 돌아올 때 그 사자의 몸에서 꿀을 취함으로(참조, 삿 14:5-9)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나실인의 규례를 어겼으며, 둘째는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술좌석을 마련함으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자 말라’는 규례를 어겼고, 셋째는 들릴라의 유혹에 이끌린 삼손이 나실인의 마지막 규례인 ‘머리를 깎지 말라’는 규례를 어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애 중에도 그는 세상의 어떤 누구도 발휘할 수 없는 괴력으로 여러 가지 공적을 세웠는데 맨손으로 사자를 죽인 일(삿 14:6)과 맨손으로 30명을 죽인 일(삿 14:15-20), 그리고 300마리의 여우를 사로잡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을 불살랐으며(삿 15:3-5), 나귀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쳐 죽인 일(삿 16:4-20)과 죽을 때 수천의 사람들을 성전에 깔려 죽게 한 일(삿 16:22-31) 등 놀랄 만한 일들을 해내었던 것이다. 이렇듯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던 기간은 20년이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삼손이 행한 사사직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다른 모든 사사들의 행동이 국가적이요 군대를 동원한 행위였음에 반해 삼손의 행위는 개인적이요 개인의 힘에 의존한 사역이었다는 점이다.
10. 사사들의 비교 도표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의 열 두 사사를 비교하여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참조, 사사기 도표5>.
Ⅲ. 이스라엘 사사들의 도덕적인 문제
1. 문제 제기
사사기를 연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사사기의 중심인물들, 즉 사사들이 다른 시대 때의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대조하여 볼 때 어떤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결점이 다른 시대의 인물들에 비해서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야곱, 모세 및 다윗의 결점들은 사실 그대로 언급되어 있으되 그것이 저들의 뛰어난 신앙 인격에는 손상을 끼치지 않는 상태에서 언급되어 있으나 사사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훌륭한 인격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대신에 그들의 인격적 결함에 대한 언급이 훨씬 많이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자기들의 공적에서 사람들로부터 얻는 인기와 칭찬을 그 나름의 즐거움으로 삼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듯 많은 인격적 결함을 소유한 사사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자로 직접 선택하시고 그들 중 대부분이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사사들의 도덕적 문제에 관한 가장 큰 논지는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들에게서 어떻게 이러한 도덕적 결함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2. 도덕적 결함의 실제
사사들의 도덕적 결함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사사 ‘에훗’은 대적과 결투에서 정정 당당한 정면 승부를 피하고 ‘암살’의 방법을 취하여 ‘암살자’ 또는 ‘자객’으로 묘사되어 있고(참조, 삿 3:12-30),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말뚝으로 박아 죽인 행위로 인하여 칭찬을 받았으며(참조, 삿 4:17-21),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를 멸하는 와중에서 가족의 원한을 깨끗이 해결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참조, 삿 8:18-21),
‘입다’는 길르앗 형제들에게 추방당하여 돕 땅에 거할 때 ‘잡류'(산적들의 무리)의 두목으로 언급된 동시에 암몬 자손을 치러갈 때에는 경솔한 서원을 하여 자신의 딸을 희생 시키는 인격적 결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사들의 인격적인 결함은 ‘삼손’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는데 그는 자신의 방탕한 성격 때문에 나실인의 세 가지 규례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 여자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정욕적인 자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3. 사사들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세 가지 해답
위에서 제기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당시의 도덕적 부패상이다. 사사기의 시대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수준이 낮은 시대였다. 그때는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숭고한 수준을 지녔던 모세의 율법들이 거의 다 잊혀진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배교 행위와 그로 인한 성적 타락이 횡행하는 문란한 시대였다. 따라서 본래부터 선지자로 활동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생활하다가 사사로 세움을 받은 그들이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론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구약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사들에게 부어 주신 성령은 그들의 도덕적 결함을 치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자신의 사역자로 사용하기 위하여, 즉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부어 주신 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나타난 삼손의 괴력과 하나님께 자신의 도구로 사용했던 이방 나라들, 즉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바사 왕 고레스를 각각 자신의 ‘종’과(참조, 렘 25:9; 27:6; 43:10) ‘나의 목자’, 또는 ‘나의 기름 받은 자’라고 칭한 데서 잘 알 수 있다(참조, 사 44:28; 45:1).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이 언제나 거룩의 생활과 관련되는 신약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구약의 성령의 역사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의 도덕적 성품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반드시 끼치지 아니하고도 그들을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로서, 또는 계시의 방편으로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약 사사들이 본래부터 완벽한 자들이거나 능력이 많은 자들이었다면 사사들의 공적은 필경 사사들 자신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자, 나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대적을 물리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더욱 크게 드러났던 것이다.
4. 사사들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결론
사사들의 도덕적 수준은 우리가 본받거나 흠모할 만한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많은 도덕적 결함을 노출하였고, 삼손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져버림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어 자신의 뜻과 섭리를 대행하는 대리자로 삼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게끔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사 시대의 역사를 살펴볼 때 단순히 사사들의 도덕적 결함이나 단점을 보고 ‘왜?’라는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주인공인 하나님의 구원과 역사 섭리에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Ⅳ. 사사기에 나타난 하나님
사사기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나 영웅도 사사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사사기에서 묘사하고자 하는 진정한 주인공은 주 여호와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사사기 전체에서 ‘주’라는 호칭이 178번,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62번이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사사기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사사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첫째, 사사기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사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능자요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관자이셨으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부드러우시고 끝없는 은총을 내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둘째, 사사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불같이 진노를 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심판은 단호하였다. 셋째, 사사기는 하나님을 ‘역사의 감독자’로 묘사하였다. 그의 역사하심을 벗어난 사건은 없었고, 그의 눈과 손을 벗어난 역사도 없었다. 모든 역사는 그분의 손에 의해 움직여졌으며, 그분의 감독 하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넷째, 사사기는 하나님을 ‘질투의 하나님’으로 묘사하였다. 사사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여러 차례 자신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리고 음란이 우상을 좇자 불같이 진노로 자신의 질투를 발하셨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네 가지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사사기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역사의 감독자,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모습들은 모두 하나의 주제에서 일치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사기를 연구할 때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백성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그 사랑을 갈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Ⅴ. 사사들의 통치력이 미친 범위
마지막으로 사사기에 대해 생각해야 할 문제는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기의 이스라엘 통치력이 미치던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적국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사사들의 활동 기간이 겹치기도 했기 때문에 그 정확한 경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통치력이 미치던 범위에 대해서는 규정지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본서 역시 그 정확한 경계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추론 가능한 경계선을 추론해 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