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헬라어 원어성경말씀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가다가 치유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앉은 뱅이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걸으라고 했더니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가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성 경: [행3:1] 페트로스 카이 이오안네스 아네바이논 에이스 토 히에론 에피 텐 호란 테스 프로슈케스 텐 엔나테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3시를 가리킨다. 단 6:11; 9: 21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제 삼 시(오전 9시), 제 육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구 시 (오후3시)를 정해 놓고 세 번의 기도를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구속력 있는 율법 규례가 아니라 나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루 구분 법에 의하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 시간이 되어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한다(출 29:39).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공식적 기도 시간은 (1) 이른 아침. (2)제 구 시, 즉 오후 예배 시간인 이 때 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오늘날도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다.
베드로와 요한 – (1)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 였다 (마 4:18, 21; 눅 5: 10). (2) 세례요한의 때부터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요 1: 37, 42) (3) 개심 후 함께 사도직을 받은 동료 였다( 1: 13; 마 10:2). (4) 특별히 예수께 인정받고 사랑을 입은자들이었다 (마 26:37; 눅 8:51; 9:28). (5)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행동을 같이하던 친밀한 친구였다(눅 22:8; 요 18:16). (6)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동역자였다(8:14).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인 베드로와 조용하고 차분한 요한은 성격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사람은 모든 면에서 함께 행동하였다(눅 22:8; 요 13:24,25; 18:16,17; 20:2). 따라서 이들은 12제자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며 지도자 (lwader)로 부각된 인물들이었다.
성전에 올라갈새 – ‘ 올라갈새’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바이논’은 미 완료 시제로서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어떤 동작 및 과정을 아주 시각적으로 인상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으까? 여기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유대인의 율법 의식을 따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기 보다는 그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서 올라갔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전의 위치가 지형상 높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종교상의 경건한 측면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11:2; 18:22; 눅 18:10; 요 7:14).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욱 24:49)고 하신 예수의 명령과 또 그들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리라'(1:8)는 말씀과도 일치 되는 것이다.
성 경: [행3:2]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우투 휘파르콘 에바스타제토 혼 에티둔 카드 헤메란 프로스 텐 뒤란 투 히에루 텐 레고메넨 호라이안 투 아이테인 엘레에모쉬넨 파라 톤 에이스포류오메논 에이스 토 히에론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투’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 태에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하나’ 가 된다. 이것은 그가 중간에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 부터 40세(4:22)가 되는 지금까지 하체가 마비된 고통을 지닌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성전에 들어가는… 구걸하기 위하여 – 그는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동냥하여 살아가야 했다. 더욱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매번 다른 사람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걸인(乞人)이었다. 한편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를 구태여 성전 문 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 매우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이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아는 걸인들이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걸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성전 문앞이야 말로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고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 미문(the Beautiful Gate) 이라는 이름은 외관상으로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분분하다.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 동편의 바깔 문인 슈산 문(Meyer, Alfird), 또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Knowling, Alexander) 의 양설이 주로 언급되나 후설이 보다 유력하다. 기원 후 5세기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또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그대로남아 있던 동문 혹은 슈산문(그 문이 수산 궁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을 본문의 미문으로 동일시하여 왔었다.
그러나 유머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와 미쉬나(Mishnah)의 문서인 ‘미도트'(Middoth 1:3, 4:2. 3:성전규모와 그 건축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의 기록에의하면 니카노르 문(Nicannor Gate)과 동일시하고있다. 이 문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가치상으로 볼 때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두는 자라 – ‘두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둔’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매일매일 반복되어 앉혀지는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성 경: [행3:3] 호스 이돈 페트론 카이 이오안넨 멜론타스 에이시에나이 에이스 토 히에론 에로타 엘레에모쉬넨 라베인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구걸하거늘 –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평상시 방법대로 구걸한다. 그런데 ‘구걸하거늘’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로타’는 미완료 시제로서 구걸의 행위가 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무엇을 받으려는 그때의 정황을 잘 묘사해 주는 누가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간절하고도 정중하게 한 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아무튼 그는 무엇을 구해야 진정한 삶을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은 가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종들을 향해서도 물질적인 적선(積善)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3:4] 아테니사스 데 페트로스 에이스 아우톤 쉰 토 이오안네 에이펜 블렙손 에이스 헤마스
주제1: [예루살렘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 혹자는 베드로가 혼자서 말했음과 걸인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본문의 기적 행위가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으로 더불어’라는 표현은 후대에 와서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anechen). 그러나 이는 별 호소력이 없는 주장으로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 기적행함에도 똑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성령의 능력따라 행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은 행동파적인 기질이 있어 그의 적극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지난날 12제자와 함께 있을 때도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代辯者)역할을 서슴없이 하였었다(마 16:13 -16). 따라서 여기서는 누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활동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사실에 초점이 있을진대, 요한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이 기적의 사건에 참여한 것이다(J. Calvin, Lenski). 동시에 행동파 베드로와 사색가 요한이 함께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원문상으로는 ‘주목(注目)하여’의 헬라어 ‘아테니사스’란 말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데'(그리고’) 이하는 걸인이 마흔살이 되는 지금까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일이 전개됨을 보여 준다. 또 ‘아테니사스’ 란 말은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집중된 응시를 의미하며 1:10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자세히 쳐다 보다’로 번역된 말과 같은 동사다(눅 4:20). 그렇다면 왜 주목하여 보았을까 ? (1)13:9에서와 같이 사도가 집중적인 응시의 동작을 취한 것은 이제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필요한 내적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2)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이 사람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쳐다봄으로써 걸인으로 하여금 사도를 주시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즉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갖기 위해서이다. (3)내재하시는 성령의 지도와 그 역사하심을 따라 행동하던 사도들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구걸을 받자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에 의해서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Calvin). 여기서 (1)의 견해는 성경의 기적을 이적 설화로 취급하는 비판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으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2)와(3)의 주장은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주목하여’라는 말은 사람 마음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다거나, 어떤 상황의 내막을 발견하기 위하여 취하는 소위 투시 동작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Lenski). 결국 주님이 그들을 감동시켰을 때에 그들은 이 동냥하는 걸인에게 눈을 고정시킴으로 그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게 유도한 것이다.
우리를 보라 – 이의 헬라어 ‘블려손 에이스 헤마스’는 병들거나 아픈 것이 없이 영원히 사는 천국 복음에 대해 전파하는 사도들에게 단지 한 푼의 돈을 동냥하는 걸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단호하고 권위있는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이제 앉은뱅이가 돈 몇 푼을 구하는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訴願)하도록 요구한 말이다. 즉 자신에게 신기하고도 이례적(異例的)인 하늘의 축복을 소망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성 경: [행3:5] 호 데 에페이켄 아우토이스 프로스도콘 티 파르 아우톤 라베인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바라보거늘 – ‘에페이켄’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서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의를 사도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 앞에 ‘눈을'(투스 오프달무스)이란 단어를 첨가하면 더욱 생동감 있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걸인이 무슨 마음으로 또는 왜 쳐다보았을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자기에게 동냥을 주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 걸인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단순히 쳐다본 것이다(Haenchen). (2)보통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 까지 말한 그들에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 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쳐다본 것이다(Lenski).
(3) 기적을 일으킬 만한, 즉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았다(E. M. Blaiklock). 그 증거로 병고침받은 자들에게는 대개 믿음이 있었다는 점과(막 6: 34,36) 그가 고침을 받은 후 즉시 하나님을 찬미한 것을(8절) 제시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그의 믿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병고침을 베풀어 준 사례들을 생각할 때(요 9:1-12) 이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하겠다. 따라서 걸인의 신앙 행위는 기적이 일어난 후에 생긴 것이라고 보나 렌스키의 견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할 수 있겠다.
성 경: [행3:6] 에이펜 데 페트로스 아르귀리온 카이 크뤼시온 우크 휘파르케이 모이 호 데 에코 투토 소이 디도미 엔 토 오노마티 이에수 크리스투 투 나조라이우 에게이레 카이 페리파테이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앉은뱅이에게 보기 드문 기대감을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은과 금을 구하던 걸인으로 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곧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했기 때문에 낙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제 베드로의 이 선언을 통해서 돈 몇 푼이 아닌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빛을 기대하는 희망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있겠다. 따라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곧바로 선언되는 베드로의 선포는 앉은뱅이로 하여금 어떤 신기한 기대감(期待感)을 갖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베드로의 선언속에서 우리는 (1)물질의 소유에 초월해 사는 사도들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으며 예수의 말씀대로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과(마 10:9) (3)혹 물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의 필요를 따라’교회 공동체에서 공동 관리하였다(2:44, 45)는 추측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하며 사도들에게 물질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뜻따라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하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차원에서 그렇게 선포한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이 궁핍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를 금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교회의 역할이 물질적 도움보다는 영적 구원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본문의 앉은뱅이 또한 육신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다(7절). 다만 본 사건은 사도들의 궁극적 관심사가 신체보다는 영적 치유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은과 금,즉 세상의 보화들을 배설물로 여겨버린 자들이었다(빌 3:8). 여기서 ‘이름으로’라고 표현한 것을 먼저 주목해 보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및 본질 즉 그 사람의 존재를 대표해 주는 것이었다(주제 강해 창 25:19-16 ‘이름 짓기’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이름이란 그 사람 인격(人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믿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께서 크신 능력을 베푸셔서 병자를 낫게 하신다는 것을 선언하고있다. 이 사실은 12절과 16 절에서 더 뚜렷이 증거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사렛’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사적 예수인 나사렛 예수와 부활하신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한다(Martin Keil, Bultmann). 그러나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 될 수 없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는 말이 암시해 주듯 당시 나사렛은 천한 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야였으며 그 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걸으라 – ‘페리파테이’란 말은 시작과 계속의 개념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서 ‘걷기 시작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 명령은 주님이 뜻을 선포하는 말씀이므로 놀라운 권능을 동반하는 권위있는 선언이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문자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에 항변(抗辯) 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한 것을 보아 그가 베드로의 권위있는 명령을 듣고 믿었음알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명령과 함께 성령의 크신 역사가 순간적으로 불쌍한 걸인에게 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이 ‘걸으라’는 명령과 함께 성령이 얼어붙은 영혼을 혼들어 놓았던 것이다. 40년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다.
성 경: [행3:7] 카이 피아사스 아우톤 테스 덱시아스 케이로스 에게이렌 파라크레마 데 에스테레오데산 아우투 하이 바세이스 카이 타 스퓌라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신유(神癒)를 베푸는 자의 신비한 능력을 치유받는 환자에게 전달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 없이 믿고 확신하여 손수 불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인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을 더욱 북돋아 주기 위하여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 된다(John Joseph H. Mayfield).
발과 발목이 – 앉은뱅이가 치유될 때의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특수한 단어들은 한결같이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로서 그의 전직이 의사였음을 여실히 드러낸다(Kowling). ‘발’의 헬라어 ‘바세이스’는 ‘발바닥’ 또는 ‘발 꿈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목’의 헬라어 ‘스퓌드라’는 ‘ 복사 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 의학적 용어이다(Henry Alford).
곧 힘을 얻고 – 이것은 앉은뱅이가 걷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기 때문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제 당장 발과 발목에 기이한 힘이 생겨 정상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치유받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반 법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성 경: [행3:8] 카이 엑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테이 카이 에이셀덴 쉰 아우토이스 에이스 토 히에론 페리파톤 카이 할로메노스 카이 아이논 톤 데온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뛰어 서서 걸으며 – 본 구절에 대한 헬라어 ‘여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테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는 뛰어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한것은 사도가 그에게 명령한 그대로 일어나 걷고 뛰기 시작했으며 또한 계속해서 걸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는 (1) 베드로의 말이 허풍(虛風)을 떠는 빈 발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실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과 그 능력의 놀라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기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6)라는 메시야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적(sign)이 된 것이다. (2) 40여년 동안 불구의 앉은뱅이 신세로 침상을 떠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기운차게 표시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앉은뱅이였던 그가 꿈만 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어 걷게 되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맨 처음 들어간 곳은 성전이었다. 이는 자신의 치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기서 ‘뛰기도'(leaping up)의 헬라어 ‘할레스다이 뛰어 오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마치 놀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또는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힌 새가 풀려나 창공을 날아가듯이, 혹은 개집에 매여 있던 개가 풀려나 사방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듯이 신바람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 100:4)라는 시인의 노래는 새롭게 얻은 몸으로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여 사도의 뒤를 따라 성전에 들어가는 이 사람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니 –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치료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으니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미함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이렇듯 찬송은 은혜를 입은 자가 마음에서부터 드리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고 입술의 제사임을 본다(히 13:15).
성 경: [행3:9] 카이 에이덴 아우톤 파스 호 라오스 페리파툰타 카이 아이눈타 톤 데온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모든 백성이… 보고 – 기적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획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 앉은뱅이 걸인은 수 년 동안의 구걸로 인해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원(身元)이나 치유 사실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성 경: [행3:10] 에페기노스콘 테 아우톤 호티 후토스 엔 호 프로스 텐 엘레에모쉬넨 카데메노스 에피 테 호라이아 퓔레 투 히에루 카이 에플레스데산 담부스 카이 에크스타세오스 에피 토 쉼베베코티 아우토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기이히 여기며’의 헬라어는 ‘담보스’로 어떤 행위를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움 등을 말한다. 그리고 ‘놀라니라’의 ‘에크스타시스’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 상태를 말한다(막 1:27 ;10:24, 32; 14:33; 16:5,6; 눅 4:36). 이처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심히 놀라게 하는 것은 기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첫 단계의 모습으로서 기적 자체가 갖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놀라움의 반응이 그 이적을 일으키신 분께 대한 믿음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적이 시사하는 바인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서도 단지 그 이적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출4:2-9; 요 11:40- 42 ;롬 15: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