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예배 장례 찬송가] 찬송가 360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발인예배 장례 찬송가 중에서 오늘은 찬송가 360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라는 찬송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다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하늘로 부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가야 합니다.

찬송가 360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

마 16:24-25, 눅 9:57-62

서론 : 예수님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유대 광야에 나타나셔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다(마 4:17). 그러면서도 따르는 제자들을 택하여 사도를 삼으셨다. 어떤 때는 먼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가운데, 주님은 특히 열두 사람을 엄선하여 제자를 삼았는데, 그들이 곧 12사도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무리가 따랐기 때문에 70인 제자를 파송 보낸 일이 있었고(눅 10:1-16), 500여 형제(확대된 예수님의 제자단인 것 같다. 고전 15:6)가 있었으며, 5,000명 군중이 떡을 얻어 먹었다.

예수님의 3년 간 성역 어간에 많은 무리가 따랐는데, 한번은 길 가실 때에 “혹(어떤 사람이라는 뜻)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나선 자가 있었다. 계속하여 3인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데, 그들의 정신과 각오가 아직도 불완전한 실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교훈하신 것이 곧 누가복음 9:57-62의 말씀이다.

1. 세 사람의 각각 다른 경우

(1)어디로 가시든지 저를 좇으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가볍고 경솔하게 나선 자라고 보겠다.

그는 자신하여 나섰고, 열심은 있어 보이나 분별력이 없는 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비참했으며, 그 고생이 어떠했는가? 그런데, 그는 이런 일을 상상도 못하였고, 덮어놓고 예수님 따르는 일이 화려해 보이고 자랑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나섰던 모양이다.

이왕 따르려면 비상한 각오와 결심이 필요하다. 즉, 똑똑히 판단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거부하시거나, 또 못 따를 것이라고 단안을 내리심이 아니라, 중도 실패하지 말고 끝가지 따를 결심을 단단히 하라고 하심이다.

바울의 선교 여행을 따라나섰던 수행원 중에서 마가라는 청년이 고생을 견디지 못하여 버가에서 후퇴하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행 13:13). 그것 때문에 2차 선교여행시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고, 나뉘어지는 일까지 생겼다(행 15:36-41).

(2)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소서.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하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예수님 따르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급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죽은 자를(더구나 부친)장사하는 일은 중요한 일 중에도 중요한 일이므로, 예수님도 이것이 잘못이라고 하심이 아니다. 이는 공과 사를 분간해야 하며,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예를 들면, 임금을 섬기는 자가 부친상을 당했어도 왕의 허락없이 귀가할 수 없으며, 군대에 종군한 군인이 전시에 부친상이라고 하여 휴가 주어 귀가시키지 않는다.

때는 비상시이므로,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일보다 죽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더욱 급선무임을 말해 준다. 이는 세상적 관념을 염두에 두고, 망설이고 주저하며 핑계하는 자들을 독려하시는 교훈이다.

(3)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또다른 한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이는 세상 육신의 일에도 관심이 있고 천국 사업에도 책임감을 느끼는 자에게 권고하신 말씀이다. 여기에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본다고 함은, 예수를 믿고 일단 따르기로 하여 직분을 맡아 수고하는 직분자들이, 더구나 과거 육신에 속했던 일들을 회상하고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주를 따를 때, 육체적인 인정에 이끌려 가족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2.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이미 주의 부름을 받아 따라나섰고, 또 미지근한 태도와 소극적인 정신을 취하다가 일단 경책을 받으면서도 주를 계속하여 따라야 할 형편이므로, 어디든지 주와 함께 가야 한다.

주님 따라가는 길이 비록 험하고 협착해도 주님이 앞서 가시었으므로, 죽음의 구렁이로 몰아 넣을 까닭이 없다. 이미 고생을 각오하고 나섰으니 주님의 뒤만 잘 따르면, 넉넉하게 갈 수 있는 길이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예수님의 피땀 흘린 동산에까지 들어가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베드로·야고보·요한은 다른 아홉 제자와 달리 특별 초청받은 격으로 겟세마네 동산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고 권고까지 받았으나, 그들은 졸다가 못내 자고 말았다.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이란 지역적인 장소에 간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피땀 흘려 기도해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또, 그들은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가야 할 터인데,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하실 때 따라갔던 제자는 오직 요한 한 사람이다. 죽음의 자리 동참을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동참까지는 하였으나, 예수님의 무죄를 증언 한 마디 못하였으니, 이는 부끄러운 동참이다. 오히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살인 강도가 회개하고, 자신의 당한 일은 당연하거니와 예수님은 의롭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십자가에 죽이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할 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39-43)고 축복해 주셨다.

예수 나를 오라 할 때 겟세마네 동산까지, 심판하실 자리까지 따라가는 자라야 영원한 천국에까지 인도함을 받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병원입원환자 심방 찬송가 529장 큰 무리 주를 에어싼 중에

결론 :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겟세마네 동산이나 골고다 언덕까지 주를 따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오순절 기도 운동에 참가하여 큰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다. 오히려 그는, 그 후부터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를 인도하는 책임자가 되었고, 말년에 그는 로마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네로 황제 박해시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으니, 이는 결국 죽음의 자리까지 동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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