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학위 논문 중에서 모세오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모세오경을 고대의 고고학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세오경이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고고학이 뒷받침 해 주어야 한다. 박사 학위 논문을 통해서 모세오경은 역사적 배경이 있고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모세오경의 역사적 배경
한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모세오경 역시 다르지 않다. 모세오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두 종류의 역사적 배경을 구분해야 하는데 첫째는 그 책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 혹은 상황이며, 둘째는 그 책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적 배경, 혹은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그 책의 구성된 어떤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생각하게 된다.
오경 텍스트의 형성 과정과 시기 그리고 그 역사적 상황을 논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최종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간과 될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이는 본문의 의미가 문학적 구조, 그리고 독자의 상황 뿐만 아니라, 역사적 배경을 포함한 삼대 영역의 융합을 통해 역동적으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에 먼저 구약 텍스트가 형성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고고학으로부터의 증명들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부터 30여년 이전에 활약하였던 멜빈 그로브 카일(Melvin Grove Kyle)같은 사람은 비평 가운데서 고고학의 이러한 기능을 강조하였다. 첫째로, 고고학은 성경의 진정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둘째로, 이는 비평 학의 방법론을 위한 지침을 제공한다. 셋째로, 고고학은 각종 이론들을 시험할 수 있는 사실들을 제공한다. 그는 마지막 항에서 고고학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들과 신빙성 있는 문서들의 정확한 문서 비평들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오경의 문헌들은 고대 이스라엘 왕실에서 특별한 목적 하에 편찬되었고 분명히 성전이나 성소와 연관하여 예배와 설교 또는 고대 법규의 필연성이라는 특정한 삶의 상황들(Sitz im Leben)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승들(Traditions)은 고대 근동과 관계가 있는 후기의 필사본들(Manuscripts)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필사본들 특히 모세오경의 책들은 전승들로 불려 질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모세의 시대와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필사본 사이에 많은 세기들이 경과했기 때문이다. 이 필사본들에는(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비(非)히브리어 자료들이 거의 언급하지 아니하는 고대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언급들이 있다.
고고학에서 밝혀진 거의 무수한 사실들은 오경의 내용들이 분명하게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올브라이트(Albright), 라이트(Wright), 톰슨(Thompson), 프리(Free)등과 또 다른 사람들의 연구 결과는 카일의 주장을 확인하였다. 오경이 정확한 역사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스스로를 계시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경 텍스트의 성문화(聖文化)는 먼저 글의 발명으로부터 야기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글이 발명되기 전 고대전례는 주로 구전으로 전승되었을 수밖에 없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구약의 기록도 예외는 아니다. 오경 텍스트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이러한 구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계곡, 나일 계곡, 그리고 레반트 지방(The Levant : 동부 지중해 연안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세오경에 의해 대표 되는 시기에 나온 온갖 종류의 수천가지 비문들 중 아주 많은 부분이 모세오경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 같은 사실은 고고학이 밝혀낸 비문들 이외의 자료들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비문들과 다른 자료들은 우리에게 히브리인들이 살고 활동한 매우 귀중한 세계상을 제공해 주었다.
고대근동에 있어 기록된 글은 초기 메소포타미아와 후기 이집트 문명과 함께 발전되었다. 초기 약 B.C. 3000-2800년 동안 수메르에서는 젖은 점토 위에 갈대 바늘(Reed Stylus)로 새겨진 약 2천개가 넘는 설형문자(쐐기문자, Cuneiform)들이 차차 600여개의 음문으로 정립되었고 수메르 북쪽으로 아카디아 문명에서는 중앙집권 제도와 도시를 형성한 국가들의 활발한 통상, 그리고 조약, 법규, 역사적 기록 등의 필요를 따라 다양한 기록 문화가 발달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수메르인들 뿐만 아니라 셈족 계열의 주민들도 살고 있었다. 이 셈족은 그들이 세운 최초 제국의 도읍지의 이름을 따라 아카드 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수메르의 서북쪽 지역에서 살아온 반유목민이었는데 인구가 불어나면서 B.C. 4000년대부터 수메르 지역으로 밀려온 것이다.
B.C. 3000년대 중반에는 수메르 인구 가운데서 그들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북부 수메르에서는 우세한 분포를 보였다. 이 셈족은 수메르 문화의 본질적 요소들을 모두 이어받아 그것들을 자기 식으로 변용하였다. 그들은 수메르어와는 완전히 다른 셈어(아카드어)를 사용했지만 그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쐐기 음절문자를 이용했다.
모세오경과 관련하여 이때까지 발견된 비(非) 히브리어 이외의 언어로 된 비문들의 기록은 한정된 정도에서 오경의 내용에 도움을 줄 뿐이다. 창조, 인간, 언어의 혼란, 메소포타미아 계곡의 홍수에 대한 성경의 설화들과 성경 이외의 설화들 사이에는 어휘와 표현에 있어 어떤 유사성이 있다. 족장들의 결혼, 양자, 계약체결의 관습들에서와 토판들(Clay Tablets)에 보존된 법 문서들에서 발견되어진 몇몇 기술적(Technical) 용어들과 기초 개념들이 있다.
또한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에서는 상형문자(그림문자, Hieroglyph)로부터 음성문자가 발달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방은 고대근동에서 문학적 활동이 비교적 저조했던 곳이다. 이는 아마도 나일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자연적 환경과 도시국가들의 경제활동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달한 파피루스(Papyrus)나 토판(충적토)과도 같은 정보 기록의 매체가 팔레스타인에서는 후기에 도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이에 따라 구전이 더 오래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은 히브리어 문자의 발전과 더불어 구전과 다양한 기존 문서들의 결합과 편집과정을 통해 기록된 정경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오경의 형성시대는 셈어(Semitics) 문자 발전과 평행을 이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창세기 설화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들은 B.C. 2000년대에 통용되던 여러 관습들에 비추어 왔다. B.C. 15세기 동부 티그리스 지역에서 우세한 주민이었던 후리 족(Hurrian)의 관습법을 반영하고 있는 누지(Nuzi) 문서는 특히 여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문서는 다소 후대 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또한 히브리인 족장들이 결코 유랑한 적이 없었던 지역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당시 널리 통용되고 있었던 오래된 법률 전승을 구체화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미 B.C. 18세기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 상부 지역의 셈족 주민들은 후리 족과 상당히 뒤섞여 있었으며 수 세기 후에는 후리 족이 거기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주민들이었다.
고대 우가릿과 페니키아 문자와 더불어 중간청동기(B.C. 2100-1500) 북서쪽 셈어 설형문자로부터 파생된 고대 히브리어 문자는 원래 모음이 없는 자음기호(Unpointe-d Text)로 완전한 표음문자가 아니었다. 현재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문자 기록은 석회암 조각에 기록된 게제르 달력(Gezer Calendar)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기원전 일천년경으로 측정하고 있다.
아람어도 아마 동부 시리아나 서북 메소포타미아에서 국지적으로 발달했던 방언에서 생겨나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여러 지역과 그 변두리에 살던 종족들이 이 언어의 사용자들과 동맹을 맺거나 아람족의 영향 아래 들어옴에 따라 점차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아람어를 채택한 ‘아모리족’은 ‘서부인’을 의미하는 아카드어로서 족장시대와 그 이전부터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의 온갖 다양한 서북 셈족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그 후손들이 나중에 아람어를 사용하게 된 종족들과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후대 아람족의 선조들은 동일한 종족과 언어 군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히브리 서술의 단편 소재들은 후기청동기(B.C. 1550-1200)까지는 구전으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고 그 문자가 통상적으로 상용화 된 후에도 표음문자가 아니므로 기호의 어음과 발음이 구전에 의해 전승될 수밖에 없어 그 정확성이 모호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자음 기호법이 어느 정도 통일성을 가지고 정착한 것은 B.C. 1세기에 이르러서였으며 히브리어 성경의 모음 체제가 완성되어 자음에 완전히 부가된 것은 약 A.D. 9-10세기에 이르러 갈릴리 티베리아스(Tiberias)의 마소라(Massorah) 학파들을 통해서이다.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은 B.C. 2000년대 전반기나 그 이전에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이 민족을 이루게 된 것은 좀 더 후대였다. 이 점에서는 외적 증거와 성경이 일치하고 있다. 성경은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살다가 그 후 모세의 인도를 받아 시내 산으로 가서 거기서 그들을 독특한 민족으로 만든 언약과 율법을 받은 경위를 말해 준다. 그에 이어서 한동안의 유랑 끝에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점령하였다.
역사상의 사건들이나 율법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생활과 여행에 관한 수많은 증거들과 표지들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장막에 거하였다. 이들은 성막을 짓고 예배의 양식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전체 과정 속에서 항상 가나안 입성이 소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명기의 모세의 연설들은 그의 생애 말기에 적절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예측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언어와, 문화와, 환경들이 처음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변화되어 왔다. 모세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도 처음에는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문자가 생겨나면서 후대들을 위하여 문자로 남기게 된 것이다. 고대근동지역의 문화와, 배경과, 언어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모세가 오경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본 결과 모세가 확실하게 오경을 기록했으며 모세 당시에는 히브리어 자음만 있고 모음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며 상형적인 문자로 의미와 뜻을 가지고 전달하는 문자였다.
그래도 그림으로 모든 뜻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세 당시의 히브리어 언어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었다. 히브리어는 현재까지 자음 22개가 변하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히브리어 자음이 변하거나 빠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모세오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며 무오하고 변하지 않는 말씀이라는 것을 확증해 준다.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모세가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모세오경은 철저하게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모세 오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 배경에 녹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많은 토판문서를 발견하면서 더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고대근동에서 처음으로 글을 사용한 사람들은 수메르인들이다. 인간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고 자신들의 문화를 글로 남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들을 토판에 문자를 사용하여 기록해 놓았는데 이런 글들이 모세오경에 나오는 글들과 유사하다. 이런 것들을 토대로 볼 때에 모세오경은 허구가 아니며 하나님의 진리이며 사실이라는 것을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