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논문 중에서 모세오경과 고고학에 대해서 알아보자. 모세오경은 모세가 기록한 성경책으로서 고고학적으로 기본 바탕을 가지고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고대 근동의 문화
나일강 유역의 구릉지대로부터 북부 이라크의 고원지대에 걸쳐 발견되는 특이한 부싯돌이 구석기 시대 전기(前期)와 구석기 시대 후기(後期)에 걸쳐 인류는 오랜 세월 동굴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인류는 전적으로 수렵과 식량 채취에 의해 살았다. 인류가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적 단계로 첫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겨우 빙하 시대 말기가 끝나고 혹독한 기후가 누그러졌던 대략 B.C. 9000년경이었다. 이때에 인류는 야생 곡물들을 경작할 수 있고 짐승들을 식용으로 사육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이행은 이른바 중석기 시대(B.C. 8000년경 이전)에 시작되었다.
이 문화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계절에 따라 또는 지속적으로 거주하기 위하여 조잡한 촌락을 이루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여리고의 가장 초기의 촌락은 이 시대에 속하며 그 촌락은 늦어도 B.C. 8000년경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고대근동은 세 지리학적인 지역들과 이들을 묶는 활 모양의 비옥한 땅 즉 ‘비옥한 초생 달’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의 땅은 보통 아주 거칠고 인간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땅이었다. 그 비옥한 땅은 북쪽으로는 지날 수 없는 산맥들과 남쪽으로는 넓은 사막을 접경해 있다. 그러나 초승달 안에는 평지와 풍부한 물이 있어 이 지역을 인류 문명의 발생지로 만들었다. 고대근동의 지역들은 바로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애굽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오래 전부터 중요한 강 문화들로 특징되었다.
가장 오래된 정착 촌락으로 알려진 것들 가운데 흥미를 끄는 것은 여리고 유적의 하부 지층들에서 발견된 주거지이다. 여리고는 적어도 B.C. 8000년경에 처음으로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성읍은 여러 지층에 걸쳐 있고 그 건조물은 서로 다른 차이를 보여 주는 두 가지 단계로 구분되는데 이는 토기 류가 발명되기 이전의 신석기 시대의 두 가지 연속적인 문화를 보여 준다. 집들은 두 단계의 거주 사실에 걸맞게 서로 다른 두 가지 진흙 벽돌로 지어졌다. 두 단계 가운데 후기에는 집의 바닥과 벽은 석회로 칠하고 윤기를 냈으며 색칠을 한 경우도 흔했다.
고대 인류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인류 문명은 티그리스 강 북쪽의 작은 언덕에서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신석기 시대(the Neolithic Age, B.C. 약 7000년)에 처음으로 곡물을 심고, 짐승들을 길들이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한다. B.C. 3100년경 남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 사람들이 쐐기 모양의 문자를 발명하였다. 이 쐐기 모양의 글(cuneiform, 쐐기문자)은 보통 서기관은 이 진흙으로 된 평판들을 햇빛에 말리거나 가마 불에 구워서 내구력이 있는 쐐기문자판을 만들었다.
고대 역사를 보면 메소포타미아에는 많은 민족들이 유입되어 왔고 종종 세력의 변화가 있었다. 수메르 사람들을 뒤따른 민족들은 다양한 국적의 셈족 사람들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농경생활로의 이행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예는 북부 이라크의 고원지대에 있는 야르모(Jarmo) 유적의 하부 지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도구들과 그릇들은 돌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야르모는 하나의 정착 농경사회였다. 촌락 생활은 B.C. 6000년대를 거쳐 B.C. 5000년대까지 발전을 계속하였는데, B.C. 5000년대에는 거의 모든 곳에 촌락과 성읍들이 세워졌다. 이 시기 동안에 토기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초기 인간 문명을 가능케 했던 지리학적인 특징들이 나일 강을 따라 아프리카의 동북 해안에도 존재했다. 이집트가 갑작스럽게 문명국가가 된 것은 메소포타미아가 나일 계곡에 준 영향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확실치는 않으나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왕조 출현 이전의 이집트는 본질적으로 그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두드러지게 고립되어 있었다. 사막과 바다에 의해 아시아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뱀 모양의 긴 나일 강 유역은 이 나라 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왕조 출현 이전의 이집트인들은 아마도 역사 시대의 이집트인들의 조상들인 함족(Hamitic), 셈족(Semitic), 니그로(Negroid)의 혼혈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농업에서 장족의 진보를 보여 온갖 종류의 곡물, 과실, 야채, 그리고 아마(亞麻)까지 재배했다.
이집트인의 최초의 정착은 B.C. 5000년경에 시작되어 나일 계곡을 따라 농업 사회로 발전되었다. 이 민족은 곧 그들의 땅을 관개하는 방법을 배웠고 B.C. 4000년대 말에는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발달된 다신교였다. 이집트의 종교를 원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집트의 신들 가운데 많은 신들이 동물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토템신앙(totemism)의 본질적 특징들은 결여되어 있었다. 동물은 신비로운 신(神)의 힘이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신의 위세는 그 신의 제의를 거행하는 도시의 위세에 따라 기복이 있었지만 서열이 높은 이집트의 신들은 지방 신들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 걸쳐 숭배되었으며 우주적 통치권이 부여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이나 나일 강 유역의 문화에 조금이라도 비길 만한 문화가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B.C. 3000년대에는 이 지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진전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는 대체로 에블라의 전성기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은 모든 점에서 발견된다. 그들의 언어는 이스라엘 시대의 가나안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의 선구인 듯한데, 성경 히브리어는 그 방언이었다. 에블라의 언어는 이 유형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전 지역에 걸쳐서 여러 가지 방언으로 말해졌던 것 같다.
필자는 고대 근동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시대가 발전해 가면서 언어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인간들이 수렵생활을 할 때는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지만 인간들이 점차 땅을 경작하고 정착화 되면서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확실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농경시대에 들어오면서 정착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경작한 양식을 서로 팔고 사는 물물교환이 형성된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언어이며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확실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글자라는 문자가 생겨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사용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문자의 발전은 문명의 발전과 상호 연관성이 있게 되었다.
문자의 발전은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도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문자의 발명이 문화를 급속도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어떠한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문자의 발명은 인간에게 획기적인 삶을 가져다주었다. 말로만 표현하던 것을 글로 남김으로서 자신들의 문화를 후대들에게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모세오경도 문자가 발명되었기 때문에 후대들에게 전수될 수가 있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방식으로 전수되었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됨으로 인하여 성경을 문자로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전수하게 된 것이다. 문자의 발명이 성경을 전수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