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박사논문에서는 모세오경의 기록자에 대한 비평 4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모세오경의 저자에 대해서 학자들이 각자 비평하고 있다. 문서 가설을 내세워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가 확실하고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서 성경을 기록했다.
모세오경의 문서설
스피노자, 사이먼, 르 클레흐 및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학자들은 오경의 형성을 적절히 설명하기 위한 자료들과 문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A.D. 18, 19세기에 하나의 이론이 발달되어 오늘날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을 문서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소위 문서 가설(The Documentary Hypothesis)이라고 부르는 오경의 발전에 관한 표준적인 설명은 A.D. 19세기 말에 그 명확한 형태가 형성된 이래 거의 1세기 동안 논의를 지배하였다. A.D. 15세기의 르네상스와 A.D. 16세기의 종교개혁, 그리고 A.D.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는 모두 오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에 흥미를 갖게 할 만한 지적인 환경으로 변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야기들 사이에 문체적 차이가 존재한다 해도 오경 안에서 동일한 문체와 용어를 사용한 부분들을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그러한 부분들이 본문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유형에 따라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사실은 오경 본문이 한 명의 전승 수집자나 편집자가 모은 여러 가지 근원적인 자료를 포함한 결과로 현재 형태에 이르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성경 본문의 배후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료들을 밝히려는 시도는 ‘자료비평’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오경의 배후에서 네 가지 독립 자료를 찾아낸 시도를 ‘문서 가설’(The Documentary Hypothesis)이라 부른다.
자료비평의 발달은 1689년에 캄페기우스 비트린가(Campegius Vitringa)라는 신학자는 모세가 고대의 자료들을 사용하여 족장들에 대해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성문화된 자료들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창세기에 사용된 자료들을 확인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프랑스인 의사 장 아스트뤼(Jean Astruc)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753년에 『모세가 창세기를 지을 때에 사용한 듯한 원래의 기록들에 대한 추측』(Conjectures About the Original Which It Appears Moses Used to Compose the Book of Genisis)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에 관한 논문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몇 가지 자료가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두 개의 명사, 엘로힘과 야웨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은 엘로힘이라는 명칭만 알고 있었던 저자의 자료를 반영하며 창세기 2장은 야웨라는 명칭에만 친숙한 저자가 기록한 제2의 자료를 이룬다. 아스트뤼는 엘로힘이라는 명사를 사용한 장들과 야웨라는 명사를 사용한 장들을 구분하여 정리했다. 또 창세기 14장처럼 이스라엘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자료들과 되풀이되어 사용된 자료들을 구분하여 정리했다. 모세는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서 이 네 종류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기록했다. 아스트뤼는 오경의 자료들을 확인하려 하면서 오경의 모세 저작 설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의 견해는 그러한 결론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영국의 정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그의 책 Leviathan에 오경에 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실었다(1651년). 그는 모세의 죽음이나 여러 시대착오적인 기록 등 모세의 저작 설을 부정할 만한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하비스는 오경 전체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신명기 11-27장은 모세가 썼으며 그것은 힐기야(Hilkiah)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 책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비스는 에스라가 오경의 최종 편집자라고 생각하였다.
베네딕트 스피노자(Bebedict Spinoza)는 비정통 유대인으로서 그의 책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가 1670년 출간되자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오경이 모세를 3인칭으로 말하고 있고, 그의 죽음을 기술하며, 후대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모세가 오경을 썼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야곱과 요셉 이야기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면서 이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두 자료들에서 가져와 결합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경의 주 편집자는 모세보다 900년 후의 사람인 에스라(B.C. 5세기)라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 오경 안에 여전히 중복과 모순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에스라 역시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마무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문서설이 출범한 그 첫 세기 동안 보여준 하나의 심각한 약점은 문서 설 신봉자들이 문서의 연대를 결정한 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오직 그들이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문서들이 모세이후(Post-Mosaic)의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신학적인 집안 출신의 프랑스 의사인 장 아스트뤼(Jean Astruc)은 모세의 오경 저작 설을 ‘지난 세기의 질병’(the sickness of the last century)이라고 묘사하면서 모세의 오경 저작 설을 부인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두 번의 인간 창조 기사(창1, 2장)나, 사라가 두 번이나 이방의 왕에게 넘겨진 기사(창12:10-20; 창20장)처럼 창세기 안에 있는 반복된 기사들에 주목한다. 둘째,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이름들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에 주목한다.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호와(Yahweh)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스트뤼는 이런 이름들은 동의어가 아니며 서로 다른 원저자의 성향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기준(criteria)을 사용하여 창세기를 두 개의 긴 자료와 두 개의 짧은 자료로 쪼갠다. 그는 모세가 창세기를 쓸 때 복음서 시놉시스처럼 네 개의 병행이 되는 칸(columns)에 이 자료를 배열하였다고 주장한다. 후대에 누군가가 그 자료를 조합하여 오늘날의 본문을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현재의 창세기의 특징인 반복과 비일관성이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모세가 어떻게 창세기를 저술하였는지에 대한 아스트뤼의 이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지만 중복과 하나님의 이름의 변경이라는 기준으로 책을 분석한 그의 원리는 후대의 논의에 기초가 되었다. 오경이 다양한 자료에 기초하고 있고 한두 편집자가 현재의 오경을 형성했다는 주장 역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자료의 성격과 그것들이 결합된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스트뤼의 시대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후인 1780-83년에 독일의 이성주의자 요한 아이히호른(Johann G. Eichhorn)이『구약개론』(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을 출판했다. 아이히호른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1-2장을 J(Jahwist) 자료와 E(Elohist) 자료로 나누었고 레위기의 배후에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논했다.
그는 홍수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가 J자료와 E자료에 매우 일치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자료들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상이한 명사들 외에 특징적인 단어와 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주려 했다. 따라서 문학 양식은 자료들을 확인하기 위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다. 아이히호른은 처음에는 모세는 이 자료들을 편집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출판된『구약개론』에서는 모세의 관련성을 배제했다.
19세기 초 단편 가설을 선도한 두 명의 유력한 학자는 스코틀랜드의 사제 알렉산더 게데스(Alexander Geddes)와 독일 학자 요한 세베린 파터(Johann Severin Vater)다. 게데스는 오경이 모세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서 유래한 단편들을 편집한 책으로서 솔로몬 시대(B.C. 10세기)에 한데 모았다고 주장한다. 파터는 게데스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킨다. 그는 자료의 연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 자료들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기(B.C. 587년)직전 유다(Judah)에서 하나로 합쳐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데스는 단편 가설(fragmentary hypothsis)에서 오경은 솔로몬의 시대에 무수한 단편들을 활용한 편집자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개의 자료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의 명칭들을 사용했지만 다른 판단 기준들도 필요했다. 많은 단편들 중에는 모세의 시대 또는 그 이전의 것도 있었다. 게데스는 여호수아서도 자신의 연구에 포함시켜 동일한 편집자가 여섯 권의 책 모두를 종합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도 ‘육경’(Hexateuch)이라는 개념을 지지한다.
보충가설은 1830년대와 1840년대 독일에서 유행하였으며 당대의 주도적인 학자로는 에발트(G. H. A. Ewald)와 드 베테(W. M. de Wette)가 있었다. 그들은 일련의 층들(layers)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초기의 것은 출애굽기 21-23장에 나오는 십계명과 율법들이다. 이것에 엘로힘(Elohim) 혹은 하나님(God)이라고 부르는 모든 자료들이 편입되었다. 다시 이것에 여호와(Yahweh)층이 추가되고 끝으로 신명기가 덧붙여졌다. 신명기를 추가한 사람이 전체 오경의 편집을 책임졌다고 본다.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오경의 확장(growth)에 관한 문서가설을 확립한 독일 학자로서 그는 네 가지 주요 자료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Yahweh)로 부르는 J자료(Yahwistic source)다. J자료는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전반부까지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민수기의 짧은 단락들도 이 J자료에 속한다.
다음으로 오래된 자료로는 하나님을 엘로힘(Elohim)으로 부르는 E자료(Elohistic source)다. 이 자료 역시 대부분 J자료와 병행이 되는 생생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5-50장의 야곱과 요셉 이야기는 J와 E로 쪼개진다. E자료는 창세기 15장 이전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J자료와는 달리 E자료에는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없다.
셋째 자료는 대부분 신명기다. 이 자료의 장르와 문체 때문에 이 자료는 큰 내러티브 자료들인 J와 E로 구분된다. 신명기는 율법에 관한 일련의 설교다. 신명기에는 율법 준수를 촉구하는 권면들과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긴급한 호소와 불순종의 위험에 관한 경고, 등으로 가득하다. 신명기의 특징적인 하나님의 명칭은 “여호와 우리/너희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각각 여호와(Yahweh)나 엘로힘(Elohim)으로 부르는 J와 E자료와, 신명기 자료를 구분해 주는 기준이 되고 있다.
넷째 자료는 제사 자료(Priestly source)다. 이 자료는 대략적으로 아스트뤼의 창세기의 A자료와 상응하며 이와 함께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예배에 관한 모든 자료와, 제사장들이 관심을 가졌을 만한 문제들과 관련된 자료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창세기에서 족보들이 이 자료에 속하며, 1장과 17장과 23장 역시 안식일과, 할례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들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이 자료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은 1870년 그의 저서『이스라엘 역사 개론』에서 오경의 JEDP 문서가설을 총괄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성경의 객관적 의미와 보편적 진리를 얻기 위한 해석학적 방법으로서 텍스트의 의미를 역사적 배경, 즉 본문 뒤에 있는 (behind the text) 역사적 층들의 재구성을 통해 찾으려 했다.
벨하우젠에 의하면 오경 중에서 초기에 작성된 부분들은 J문서와 E문서로 구성되었다. J문서는 기원전 850년경에 유다 출신의 사람이 기록했는데 그는 윤리적·종교적 관심사들뿐만 아니라 전기(傳記)도 강조했다. 반면에 E문서는 B.C. 750년경에 북 왕국에서 배출된 것이며 설화 체 양식을 사용함으로써 객관성을 나타낸 듯하다. 벧엘, 세겜(창28:17; 31:31; 33:19),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조상인 요셉을 강조한 것은 E문서가 북 왕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도움을 준다. B.C. 650년경에 어느 편집자가 두 문서를 결합했다.
D문서는 B.C. 621년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했거나 기록한 책으로서 많은 권면과 율법이 섞여 있는데 그것은 므낫세 왕의 악한 통치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수도 있다. D문서는 B.C. 550년경에 편집자에 의해 J-E문서와 결합되었다.
마지막은 P문서인데 법적이고 예식적인 자료의 주요 편집자요 편찬자는 에스라였지만(B.C. 450년경), ‘성결법전’, 즉 레위기 17-26장의 저자는 에스겔이었다. 계보, 기원, 제사, 성막에 대한 묘사 등은 모두 P문서에서 다룬 주제였다. ‘제사장 문서’는 최종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나머지 세문서(J, E, D)와 결합되어 하나의 연속적인 설화를 이루었다.
문서설이 의지하고 있는 주관적인 기초 때문에 그 이론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학자들은 각각의 문서들이 과거에 독립하여 존재했었다고 주장하지만 추정되는 문서들 중에 실제로 발견된 문서는 하나도 없었다.
문서설의 마지막 결점은 각 문서들의 연대, 특히 P자료의 연대의 불확실성과 관련된다. 쿠에넨과 벨하우젠이 주장한 것처럼 P자료가 연대적으로 가장 후대의 것인지에 대해 사이러스 고든은 창세기 6장(비평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P자료)에서 노아의 방주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한 부분은 오경보다 먼저 기록된 메소포타미아의 문학 작품인 길가메쉬 서사시에 수록된 배의 규모와 대등하다는 것을 관찰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예헤즈켈 카우프만(Yehezkel Kaufmann)은 P자료가 신명기나 바벨론 포로기보다 앞선 것이라고 입증하는 많은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의 증거는 JEDP라는 순서의 정확성에 대해 의심을 제기한다.
문서설의 인기와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에 크게 반대했다. 독일에서 모세 저작 설을 지지한 주된 인물은 헹스텐베르그(E. D. Hengstenberg)였다. 그의 저서인『오경이 저자 친필 저서임』(The Genuineness of the Pentateuch)은 1847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헹스텐베르크의 제자 두 사람이 자료 비평을 공격하여 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리츠 드레히슬러(Moritz Drechsler)는 창세기가 저자의 친필 저서라는 사실과 통일성을 다룬 저서를 출판했고 카일(C. F. Keil)은 19세기 후반에 가장 두드러진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필자는 현재까지 발전해 온 문서 설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벨하우젠의 문서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문서가설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확실한 정보도 없으면서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서 설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의 의견과 주장에 대하여 필자는 논설하였다. 문서설의 시발점은 프랑스 의사인 장 아스트뤼로부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집안의 배경이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스트뤼가 모세오경을 기록한 배경에 대하여 모세의 저작 설을 부인하였다. 성경자체를 부인하는 행위이며 기록자가 여러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상을 후대에 많은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 문서 설을 체계적으로 신학화한 사람이 율리우스 벨하우젠이라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문서가설에 힘을 실어 주었지만 지금은 문서가설에 대하여 등을 돌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데도 억지로 자신들의 이론을 꿰어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모세오경의 구속사를 연구하면서 문서가설의 이론을 넣은 것은 모세오경을 연구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문서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인정하지 않으며 성경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이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현재 많은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으며 모세오경을 모세가 기록한 책이라고 믿고 있다. 앞으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문서가설의 위상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