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 예수님 말씀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한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했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성화에 관한 말씀보다는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구원은 삯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많이 했든 별로 안 했든 동일하게 주신다. 믿음으로 받는 것이 구원이다.
Ⅰ. 포도원의 품군 20:1-16
포도원의 품군에 대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의도로 기록되었다.
1. 우리에게 천국을 나타내려는 의도(1)
그 나라의 법들은 비유들로 감추어지지 않고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대한 개념이 그 나라에 대한 의무보다 설명이 더 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비유가 의도하는 바이다.
2. 특별히 천국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려는 의도(2-16)
그리스도는 19장 끝에서 이 천국에 관하여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다.
(1) 이 비유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여 준다. (1)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을지지 않으셨다. 이것이 비유가 나타내고자 하는 위대한 진리다. (2) 나중 된 자로서 신앙적 확신이 적었던 많은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먼저 된 자로서 신앙적 확신이 훨씬 더 많았던 다른 사람들보다 지식과 은총과 유익을 더 많이 얻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보다 발이 빨랐던 요한이 그리스도의 ‘무덤에 먼저 왔지만(요 20:8) 무덤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요한보다 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요한보다 늦게 무덤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그리스도의 ‘무덤에 들어가 보게'(요 20:6) 되었다.
이처럼 ‘자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혹자는 이 비유가 제자들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즉 이 비유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열심을 지키도록 주의를 주려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그들의 선한 시작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겉으로는 먼저 된 자들이라도 속으로는 나중 될 것이다. 종종 늦은 나이에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일찍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을 앞지르는 경우가 있다.
(3) 성도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 보상은 나이가 많은 것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엡 4:13)에 따라 주어진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 순교를 당하고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과 동일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믿음이 충만한 사역자들도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마찬가지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이 본문에 나타난 비유를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대하게 된다. 하나는 품군들과 맺은 계약이며 다른 하나는 품군들과의 계산이다.
1) 품군들과의 맺은 계약(1-7절) : 그리고 이 계약은 보통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품군들을 고용한 사람 : 집주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위대한 집 주인이시다. 집 주인이신 하나님은 하셔야 할 일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하게 될 종들도 거느리고 계시다. 그러나 관대하신 하나님은 품군들을 고용하여 그 품군들을 게으름과 빈곤으로부터 구하고 그들 자신을 위한 노동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 주신다. 품군들을 부른 곳 :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까지 온종일 놀고 섰던 장터에서 고용되었다. 인간의 영혼은 언제든지 일을 하기 위하여 고용될 준비가 확고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영혼은 ‘죄에서 종노릇'(롬 6:6)하거나 ‘의에게 종'(롬 6:18)이 되어 모든 피조물들처럼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마귀는 유혹을 통하여 돼지를 먹이기 위한 품군들을 그의 들판에서 일하도록 고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복음을 통하여 그의 포도원을 정돈하고 지키기 위한 품군들을 그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고용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고용될 때까지 온 종일 놀고 서 있는 신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진다. 장터란 군중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유희가 벌어지며 아이들이 노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장사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끄럽고 분주한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장터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① 품군들이 할 일 : 품군들은 포도원에서 일을 하기 위하여 고용되었다. 그런데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포도원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심고 물을 주며 보호를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 포도원에서 품군들로서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각기 지켜야 할 우리 자신의 포도원 곧 우리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포도원은 하나님의 포도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지켜지고 정돈되어야 한다.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나태해지면 안되고 빈둥거리는 자들이 되어서도 안되며 다만 열심히 일을 하는 품군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에 빈둥거려서는 안될 것이다.
지옥으로 가고자 하는 자들은 빈둥거려도 되겠지만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자는 바쁘게 생활해야 한다. ② 품군들이 받을 대가 : 집 주인을 품군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고 있다. 첫째, 그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있다(2절). 한 데나리온은 하루 동안 일한 대가로 받는 임금이며 하루의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한 대가로 받는 보상이 노동이나 빚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보상을 받을 때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그는 상당하게 줄 것을 약속하고 있다(4-7절). 하나님은 분명 품군들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뒤로 미루어 지불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 품군들은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로 인해 어떤 손실도 입지 않을 것이다. ③ 품군들이 고용된 기간 : 품군들은 하루 동안 고용되었다. 집 주인의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은 하루분의 일이었다. 인생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한 날과도 같다.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하루와 같은 짧은 시간의 노력은 영생을 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하는 시간이 아주 적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속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도록 자극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단지 하루만 일한다는 것도 우리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어두움이 다가오면 휴식을 얻을 뿐 아니라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견뎌야 하며 그것은 잠간 동안이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품군들이 고용되었던 여러 시간들을 주시해야 한다.
이 사실은 보통 영혼들이 그리스도에게 개심하는 인생의 여러 단계들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나올 때 그 부름은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름을 받고 포도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보내진 자들에 해당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때 맞추어 일을 착수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중년이 되어서야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제 삼시와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만난 사람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권능은 바울처럼 쾌락과 세상적인 일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개심할 때 더 증대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든 연령에 맞는 일을 가지고 계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데 잘못된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지나간 생애를 통해 우리가 죄를 범해온 것으로 족하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나님은 기꺼이 고용되기를 원하는 어떤 사람도 되돌겨 보내지 않으신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열 두 시간 가운데 한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은 제 십일 시에 즉 인생의 날이 거의 다 가버린 노년기에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고용되었다. “살아있는 동안은 희망이 있다.” 늙은 죄인들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비록 늙었다 해도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선 아주 늦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늙은 죄인들도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어떤 일도 힘들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게으른 습관에 물들었던 사람들도 일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늙었을 때에도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제가 있다고 해서 늙을 때까지 회개하는 것을 미루어선 안된다. 진정 이들은 제 십일 시에 포도원으로 보내졌지만 그 전까지는 아무도 그들을 고용하지 않았거나 고용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2) 품군들과의 계산. 첫째, 계산한 시간 : 날이 저물매 보통 때와 같이 낮에 일했던 품군들이 불려져 임금을 받았다. 저녁 시간은 하루의 일을 계산하는 시간인 것이다. 신실한 품군들은 죽을 때 그들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받을 보상은 그들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그들이 죽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일을 하도록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죽음은 그 신실한 품군들이 그들의 데나리온을 받도록 그들을 포도원 밖으로 불러낸다. 따라서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을 때에도 기쁨이 넘칠 것이다.
품군들은 부름을 받고 나서야 그들의 임금을 받으러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휴식과 보상을 얻기 위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정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주님의 시간에 의지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주님의 시간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계산한 방법 : 그 계산은 일괄적으로 지불되었다. 그들은 각자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비록 천국에서 받는 영광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모든 그릇이 다 한결같이 크고 넓지는 않더라도 천국에서는 그 모든 그릇이 차고 넘칠 것이다.
하루 일 가운데 십분지 일밖에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루분의 임금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불해 주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은혜와 절대 주권으로 말미암아 준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롬 6:14) 때문에 아주 적은 봉사를 하더라도 성실하게 한다면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풍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임금을 균등하게 받음으로써 불만이 생긴 사람들의 특별한 탄원을 살펴보자.
① 불만이 생김(11,12절) : 먼저 포도원에 들어온 자들은 집 주인을 원망하였다. 천국에서는 어떤 불만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선 종종 천국과 천국의 일들에 관하여 기대와 약속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만이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만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품군들은 그들의 주인과 다투었을 뿐 아니라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들의 임금이 충분치 않아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중 들어온 자들의 임금이 그들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자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종일 수고와 더위를 참았나이다. 그런데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으며 그것도 아주 시원할 때 일하였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저희를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징표를 우리는 아주 적게 받으며 남들은 아주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의 의식 속에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공적을 과소평가하고 우리 자신의 공은 과대평가하고 싶은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이 품군들처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기 때문에 그들이 천국을 홀로 차지해야만 할 듯이 너무 자랑하지 말라는 암시를 베드로에게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아주 높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② 불만이 제거된 : 여기서 집 주인이 주장한 세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인은 불평하는 자에게 어떤 잘못을 했다고 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13절). 집 주인은 여기서 불평하는 한 사람을 친구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따지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경우 부드러운 말과 확고한 논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잘못도 하실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거나 무엇을 억제하시든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신다 해도 그것은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것이지 우리를 부당하게 대우하시는 것은 아니다.
원망을 갖고 있는 자에게 그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는 원망을 가진 자에게 계약 조건을 말해 준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즉 너는 나와 약속한 대로 받은 것이다.” 우리가 종종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 세상에 있는 데나리온을 약속한다. 그래서 그들은 ‘금생에서 저희 분깃'(시 17:14)을 선택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저 세상에 있는 데나리온을 약속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약속한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에게 계약에 대한 의무를 요구한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14절). 만일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사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받은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어떤 점에서 우리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대해 주신다 해도 우리는 불평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받아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주인은 원망하는 자에게 그가 시기했던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품삯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둘째, 원망하여 불평을 털어 놓았던 그는 주인과 다투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준 것은 절대적으로 그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은 앞에서 그의 공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여기에서 그의 주권을 주장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15절). 그러므로 주인이신 하나님은 기뻐하는 뜻에 따라 축복을 주시기도 하고 제한하시기도 하는 것은 그가 섭리를 전적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점에서 정당화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우리의 귀중한 것을 가져가실 때에도 우리는 이 일에 대한 불만을 누구려 뜨려야 한다. 그가 그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의 뜻대로 하실 수 없겠는가? 그가 그것을 취하였으나 그것은 본래 그가 주신 것이었다. 우리는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처럼 하나님의 손 안에 들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권리를 요구하거나 그와 더불어 논쟁을 해서는 안된다.
셋째, 그는 자기의 동료가 더 일찍 포도원에 오지 않았던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일찍 부름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주인이 그에게 종일 일한 대가를 지불한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5절). 시기심의 백성은 악한 눈이다. 눈은 종종 이런 죄의 출입구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불쾌하게 여기며 그들이 상처 받는 것을 바라고 그들의 그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악한 눈이다.
이러한 시기심은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으로서 선을 행하실 뿐 아니라 선행을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기하는 것은 한 번에 두 가지 계명을 직접적으로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그 뜻대로 묵묵히 따라야 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우리가 그 행복을 기뻐해야 할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③ 비유에 대한 적용(16절) : 비유를 시작케한 구절(마 19:30)을 통하여 이 비유가 적용되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자랑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여 가라 앉히시려고 여기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다.
첫째, 그들의 신앙을 계승하는 자들이 그들보다 신앙적으로 앞설 수 있으며 또 그들은 그 계승자들보다 지식과 은혜와 경건에 있어서 뒤질 수 있고 번성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품군들이 어떻게 제 십일 시에도 포도원에 들어갈 수 있으며 또 그 때의 성령의 역사가 어떤 때보다 더 충만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둘째, 제자들은 그들 자신이 마지막 날에 위선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기'(마 22:14)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청함을 받지만 그들은 그 청함을 거절해 버리고 만다(잠 1:24). 단지 청함만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선택받은 그리스도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