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의 42대 족보와 성령으로 잉태되어 여자의 후손인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하신 사건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시작하여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이 땅에 오셨다.
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1-17
우리는 주님의 족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족보의 제목(1)
그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그의 육신적 조상들에 대한 책 또는 그의 탄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족보는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즉 기원의 책이다. 구약은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써 시작한다. 그러나 신약은 그 세계를 만드신 분의 기원에 관한 책으로써 시작한다는 이점에서 그 영광이 구약의 영광보다 뛰어나다.
2. 족보의 주요 목적(1)
이 족보는 끝없이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불필요하게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칭호를 증명하고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로서 제시된 제보와 같은 것이다. 이 족보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라는 사실을, 즉 메시야가 나오게 되어있는 민족과 가계의 자손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들의 시대에 있어서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받은 위인들이었다. 즉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들에게서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창 12:3; 22:18; 삼하 7:12; 시 89:3; 132:11). 그런데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보통 이 칭호로 불리워졌으며 또 그렇게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한 사람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15:22; 20:31; 21:15). 따라서 이 복음서 기자가 입증하려고 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다윗의 한 후손이 아니라 그 어깨에 정사를 메게 될 바로 그 다윗의 자손이시며, 또한 단순히 아브라함의 한 후손이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가 될 바로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마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며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비록 그 성취가 오랫동안 연기되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할지라도 그 성취의 지연이 하나님의 약속을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약속을 단념하기 시작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영광이 될 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멸시받는 백성이 되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로마인들의 멍에를 지는 속국이 되었으며 다윗의 집은 어두움 속에 묻혀 버린 바로 그 때에 태어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이시기 때문이었다.
3. 족보의 특별한 계통(2-17)
이 족보는 역대기 초두에 기록된 족보를 따라서 아브라함으로부터 곧바로 내려온 직계혈통을 다루고 있다. 이 족보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성들은 다음과 같다.
(1) 형제를 가졌던 그리스도의 조상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대체로 동생의 계통을 이었다. 아브라함 자신이 그러하듯이 야곱, 유다, 다윗, 나단, 그리고 레사 등이 모두 동생이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그 조상들의 장자 신분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낮은 자를 높이시고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실로가 나오신 우다 외에 ‘유다와 그의 형제’라고 해서 그의 형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나 이삭의 아들 에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서 내어쫓김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야곱의 아들들은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이 족보에도 언급되었다.
(3) 유다의 쌍동이 아들들이 베레스와 세라는, 베레스만이 그리스도의 조상일지라도 유다의 형제들이 족보에 언급된 것과 같은 이유로 둘 다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
(4) 이 족보에는 네 명의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여자로는 단지 이 네 명의 이름밖에 없다. 이들 중 두 여자 즉 가나안 태생의 기생 라함과 모압 여인 룻은 본래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는 이방인들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구별이 없으며, 나그네와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시민권에 참여하도록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밖의 두 여자는 간음한 여인들인 다말과 밧세바이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께 지워진 수치의 표식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예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을 취하셨으며, 아무리 큰 죄인들일지라도 일단 회개하면 그들을 자신과 가장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이끌어 들이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5) 비록 여기에 여러 왕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을지라도 특별히 다윗 외에는 아무도 왕이라고 불리워지지 않았는데(6절) 그 이유는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시야는 그의 조상 다윗의 위를 계승한다고 말해지는 것이다(눅 1:32).
(6) 유다 왕들의 계보에 있어서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는(8절) 세 왕 즉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이 빠져 있다. 따라서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라는 말은 히브리어 용법에 따르면 웃시야가 요람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7) 어떤 사람들은 이 왕들의 계승에 있어서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뒤섞여 있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예를 들면(7,8절) 악한 르호보암이 악한 아비야를 낳고 악한 아비야가 선한 아사를 낳았으며 선한 아사가 선한 여호사밧을 낳고 선한 여호사밧이 악한 요람을 낳았다. 이 사실을 볼 때 은혜는 혈통을 따라 유전되지 않으며 죄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자신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고 보류하시기도 하신다.
(8) 바벨론으로의 이주는 이 족보의 계승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기간으로 언급된다.(11,12절).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멸절되어 없어져 버리지 않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백성들의 시내가 사해를 지나서 끊임없이 순수하게 흐르도록 보존된 이유에 대해서 어떤 암시를 제공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는 그들로부터 나오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9)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1절)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고냐란 요시야의 장자인 여호야김을 말한다. 여고냐는 ‘무자하리라'(렘 22:30)는 말을 들었는데, 이 말은 그의 후손 중 아무도 번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기에서는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사실상 스알디엘은 브다야를 낳았고 브다야가 스룹바벨을 낳았다(대상 3:19).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손자는 종종 아들로 불리워졌다.
(10) 이 혈통은 우리 주의 모친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지 않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로 이어져 내려온다(16절). 그것은 유대인들이 언제나 남자 쪽으로 족보를 따졌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마리아는 요셉과 같은 지파, 같은 족속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의 모친 쪽으로 보나 호적상의 부친인 요셉 쪽으로 보나 다 함께 다윗 가문에 속하였다.
(11) 이 모든 혈통들이 만나는 중심은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이다(16절). 이 사람이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끈질기게 갈망하고 그렇게 마음 졸이며 기대해온 그분이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육신으로 그와 한 혈통인 사람들보다 더 깊이 그리스도와 영광스러운 관계를 맺는다(마 12:5). 예수는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불리우는데 히브리어로는 이를 메시야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족보의 전체적인 요약이 17절에 나오는데, 전 족보가 특정한 기간들에 의해 14대씩 세 번으로 나뉘어 요약된다.
처음 14대에서는 다윗의 가계가 마치 아침처럼 새로 일어나며 두 번째 14대에서는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번성하고 세 번째 시기에 가서는 점점 쇠퇴하고 몰락하여 가난한 목수의 가계로까지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 빈궁한 목수의 가계로부터 나와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을 찬란하게 비추신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경위 1:18-25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은 꼬치꼬치 캐물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지으시는 ‘성령의 방법을 알지 못하며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전 11:5)도 알지 못할진대 하물며 영광스러우신 예수께서 어떻게 은총을 입은 처녀의 태속에서 형성되셨는가를 알 수 있겠는가! 사실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대부분의 경위는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만 거기에 없는 몇 가지 사실들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본다.
1. 마리아와 요셉의 정혼(18)
우리 주의 모친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히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약혼만 한 상태이다. 우리는 이같은 경우를 신명기 20:7에서 보게 되는데, 거기에 여자와 약혼하고 아내를 취하지 않은 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다만 약혼한 처녀에게서 나셨다.
(1) 마리아와 요셉의 정혼 사실은 먼저 결혼을 존중히 여기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을 보여 준다. 누가 정혼한 마리아보다 더 귀한 은혜를 받았겠는가?
(2) 요셉은 처녀 마리아의 명예를 지켜주었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는 수치를 당하였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임신은 결혼에 의해서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정당한 것이 되어야 했다.
(3) 마리아는 자신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맞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요셉은 홀아비였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은(마 13:55) 요셉의 전처의 자식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우리는 또한 이 사실에서 결혼은 급히 서둘러서 할 것이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 후에 해야 하며 결혼 전에 약혼 기간을 갖는 것이 좋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결혼하고 나서 후회하기보다는 결혼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훨씬 좋다.
2. 마리아가 약속된 씨를 잉태함(18)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실로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잉태의 사실이 이 처녀에게 얼마나 큰 당혹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녀 자신은 이 임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잉태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녀는 창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와의 딸들 중 마리아만큼 그렇게 고결한 성품을 가진 여인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녀는 가장 사악한 죄악의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될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그 사실 때문에 괴로와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유지한 채 자신의 변호를 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겼다.
3. 요셉의 당혹과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근심(19)
요셉은 그렇게 착한 여인이 그런 엄청난 일을 범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앗다. 그러나 그 죄악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사악하듯이 또한 그 사실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하였다.
(1) 요셉은 극단적인 해결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녀의 일을 여러 사람들 앞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를 신명기 22:23,24의 법대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요셉이 여기에서 보여 준 정신은 그와 비슷한 경우에 성급하게 ‘그녀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는 가혹한 선고를 내린 유다의 정신과는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요셉이 이 일에서 행한 것처럼 그렇게 일들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얼마나 훌륭한가! 우리가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좀 더 신중을 기한다면 그런 일들에 좀 더 자비와 절제를 보이게 될 것이다. 물론 엄격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요셉의 그런 관대한 처사를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는 말이 나온다. 즉, ‘그는 의로운 사람’이어서 그녀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경건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자비를 베풀려고 하였고 용서받은 자답게 용서하려고 하였다. 우리들도 죄를 범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해야 한다. 우리의 법의 준엄함을 조절하는 양심적인 법정을 공평한 법정이라고 부른다. 잘못이 드러난 사람들일지라도 어쩌면 잠깐의 실수로써 죄를 범했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온유한 마음으로 대함으로써 그들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이러한 극단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그는 한 가지 방법을 궁리해 냈다. 그는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 즉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써 줌으로써 그 문제를 조용히 끝맺으려고 하였다.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 부득이하게 행하여야 할 책망들은 소리 없이 치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사려 깊음은 허다한 죄를 가리울 것이며 아무리 큰 죄일지라도 계속해서 그 죄를 짓지 않는 한 덮어 줄 것이다.
4. 요셉이 주의 천사로부터 설명을 들음으로써 이 곤경을 면함(20,21)
그가 이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그에게 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고 그의 마음을 평안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은 경솔한 자가 아니라 생각이 깊은 자이다. 그가 곤경에 처해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스스로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에게 조언을 해 주셨다. 그의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서 어찌할 줄을 모를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오시는 때이다. 그 메시지는 주의 천사에 의해 요셉에게 전해졌다.
그의 백성을 곤경으로부터 구출해 내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천사들의 사역을 사용하시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이것이다. 즉 천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을 위하여 봉사하는 영들이라는 것이다. 이 천사는 요셉이 잠들었을 때 꿈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우리의 마음이 평온하고 차분히 가라앉았을 그때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통지를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때이다.
(1) 요셉은 여기에서 그의 약혼을 성사시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비천한 목수에게는 그의 고귀한 혈통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즉 “요셉아 네 자신을 생각해 보라. 너는 바로 메시야가 나오게 되어 있는 다윗의 자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한 모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두려워 말라 당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다. 당신은 당신의 고귀한 혈통을 즉 새로운 혈통을 잊지 말라.” 그 다음에 요셉은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된다(20절).
(2) 요셉은 천사로부터 자신의 정혼한 아내가 거룩하게 임신하게 된 사실에 관하여 알게 된다. 그녀의 임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그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듣는다. 첫째로 그녀가 잉태한 것은 자연적인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지으신 성령께서 이제는 세상의 구주를 잉태케 하셨으며, ‘보라 내가 임하노라’고 구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에게 약속된대로 ‘그를 위하여 한 몸을 예배하셨다'(히 10:5).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모친의 본질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녀의 태의 열매’ 라고 불리셨다(눅 1:42). 알렉산더의 모친처럼 공연히 신적 능력에 의해 아이를 잉태한듯이 꾸미는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 주의 모친 외에는 결코 아무도 그러한 잉태를 하지 못했다.
우리는 처녀 마리아가 스스로 자기에게 내려진 명예를 선포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그 사실을 심중에 숨졌으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 사실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두번째는 그녀가 세상의 구주를 낳으리라는 사실이었다(21절). 이 사실은 그 아들에게 붙여질 이름에서 드러난다.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 즉 구주라고 부르리라.” 예수란 요수아와 같은 이름으로서 헬라어에 맞추기 위해 단지 어미가 변화된 것이다. 70인역에서 요수아는 예수라고 불린다(행 7:45: 히 4:8). 그리스도는 우리의 요수아로서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며 우리 신앙 고백의 대제사장이시다. 즉 두 가지 이름 모두에서 그는 모세를 대신하여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친히 우리를 위해 해 주시는’구주이시다. 요수아는 호세아라고 불렸으나
모세가 여호와의 첫 음절을 따라 붙임으로써 ‘여호수아'(민 13:16)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런데 이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지는 자 곧 메시야는 여호와이시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이 구원이 있다. 또한 그가 구주시라는 사실은 그 이름을 부르게 되는 이유에서 암시된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되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책으로부터 구원하시며 그의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들을 진노와 저주로부터 그리고 이 세상과 저세상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자기 죄에서 떠나 그의 백성으로서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자들은 구주께서 이루신 위대한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된다(롬 11:26).
5.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 말씀의 성취(23)
유대인 가운데서 글을 쓰고 있는 이 복음서 기자는 다른 어떤 복음서 기자보다도 이 점에 더욱 유의한다. 여기에서 구약의 예언들은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 즉 이제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이루어진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주신 한 징조에 대한 약속이었다(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산헤립의 침략으로부터 약속된 구원을 바라도록 격려하면서,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다윗의 집에서 나올 메시야를 기대하도록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1)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징조는 메시야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이다. 즉 ‘처녀가 잉태할 것이요’ 그녀에 의해서 그가 ‘ 육신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알마라는 단어는 마리아가 자신에 대하여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 고 고백한 것처럼(눅 1:34) 엄격한 의미에서 ‘처녀’를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황후’ 나 ‘왕비’에게서 태어나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그가 외적인 영광과 화려함 속에서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영적 순결을 가르치시기 위해 처녀에게서 나시고자 하셨다.
(2) 이 징조에 의해 입증된 진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23절).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다. 이 이름은 신비하면서도 매우 귀중한 이름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성육신 하시므로 우리와 평화롭게 화해하실 수 있으며 우리를 언약 가운데로 불러들이시므로 자신과 연합케 하신다. 유대 백성들은 그들과 함게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말해서 그림자와 모형으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섬겼었다. -그것은 복되신 ‘세키나’ (하나님의 현현)였다-와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본성의 빛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를 초월해 계시는 분으로서 알며 율법의 빛에 의해서 우리는 그를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안다. 그러나 복음의 빛에 의해서 우리는 그를 임마누엘로서, 즉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관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안다. 이 사실 가운데, 즉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속에 그가 이루신 구원이 존재한다. 이것이 곧 그가 계획하신 바인데, 그 한 가지는 우리에게 큰 행복이 되는 사실로서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게함이요 다른 한가지는 우리에게 큰 의무가 되는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함이다.
6.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24)
잠에서 깨어 일어난 그는 꿈에서 받은 감동으로 말미암아 ‘주의 사자가 그에게 분부한 대로 행하였다.’ 그는 마리아를 그의 아내로 데려 왔다. 하나님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경우들에 있어서 섭리의 어떤 암시나 양심의 갈등 그리고 신실한 친구들의 조언에 의해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각각의 방법으로써 하되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적용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시를 받아야 한다.
7.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25)
마리아는 맏아들을 낳았다. 그때의 주위 사정은 누가복음 2:1 이하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 속에서 그 형체가 조성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장차 이루실 선한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은혜로 계획된 바는 분명코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요셉은 비록 그의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엄숙히 결혼식을 올렸을지라도 ‘그녀가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였다.’ 우리 주의 모친 마리아의 영구적인 처녀성에 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다. 제롬은 이 사실을 부인하는 헬비디우스에게 심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성경으로부터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휫비 박사는, ‘그녀가 맏아들을 낳기까지 요셉이 그녀와 동침치 아니하였다’는 말을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그가 율법(출 21:10)에 따라 그녀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그에게 지시된 분부대로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