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장 원어성경 설교말씀은 예수님이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갔는데 열매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저주받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열매를 많이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나?(막11:12-14)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겉옷을 주님이 가시는 길에 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앞과 뒤에서 따르면서 호산나 찬송을 외쳤습니다.
막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많은 군중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구약의 시편을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118:25 여호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구하고 있는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이제 구원하소서: 히브리어 호쉬아나)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즉시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유대인들은 주님을 따르면서 구원자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높이고 찬송했습니다.
막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주님을 따르던 자들은 주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들은 주님을 버렸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맞이하고 찬송해야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릿돌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시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예수님이 건축자들에게 버려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창녀, 어부, 병든 자들이 주님을 맞이함으로 그들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이해야 할 건축자들은 주님을 몰라보고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천한 자들이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저물었을 때 열두 제자를 데리고 베다니로 나가셨습니다.
막11: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어가시고 아침이 되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배가 고프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체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먹을 것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때 멀리서 잎사귀가 풍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막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님이 멀리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습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있는지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직 무화과 열매가 맺지 않았을 때 주님이 찾아가셔서 열매를 찾고 있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주님의 의도를 발견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후에 베다니에 오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더 나아가 믿음 생활을 하는 신자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시장하셔서 열매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열매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화과 때가 아닌데 주님이 찾아가셔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하면 주님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먼저 무화과 열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무화과는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히브리어 파그 6291) 덜 익은 무화과입니다. 유월 절기 때가 되면 팔레스틴에는 3월에 무화과나무에서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무화과 열매가 열립니다. 이때 일찍 열리는 푸른 열매가 파그입니다. 주님은 시장하셔서 이 파그의 덜 익은 무화과 열매를 얻기 위해서 가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히브리어 테엔 8384) 완전히 익은 무화과 열매입니다. 5월이나 6월에 열리는 상품성이 있는 무화과 열매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찾았던 파그의 무화과 열매가 없으면 테엔의 정상적인 무화과가 열리지 않습니다. 무화과 잎사귀만 무성하지 진정 열매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상품성 있는 열매가 열리지 않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는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무화과나무처럼 잎사귀만 무성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무화과의 파그 열매를 원하셨지만 그들의 심령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겉으로는 열심히 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심령에 영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창녀와 어부와 병든 자들은 파그의 무화과 열매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보잘것없은 인생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 심령에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송하던 자들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들보다 더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다윗의 뿌리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시장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셨습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건축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버렸습니다.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했던 자들은 주님을 버렸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교회에 오셔서 덜 익은 무화과 열매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풍성하여 자기만 자랑하고 교회의 사이즈만 자랑하고 있다면 주님은 실망하실 것입니다. 잎사귀만 풍성하고 파그의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막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영적으로 타락한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들의 율법주의 신앙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잎사귀만 풍성한 자기 자랑만 하는 율법주의 신앙을 심판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에 주님을 보내주셔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나의 신앙이 어떤 신앙인가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처럼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풍성한 율법주의 신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 덜 익었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이 내 안에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완전히 익은 테엔의 무화과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파그의 덜 익은 열매가 현재 없다면 그 사람은 테엔의 무화과와 같은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무화과나무가 죽는 것처럼 불 못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시장하여 필요하실 때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은 주님이 부활시켜 주실 때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나에게 파그와 같은 작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영원한 영생의 열매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지금 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으면 무화과 때가 되었을 때 테엔의 상품성있는 무화과 열매가 열리듯이 마지막 날에 영원한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원하시는 작은 믿음을 세워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