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설교 말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롬4:1-25)

로마서 4장 설교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씀한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하신 의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의롭게 보았다.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

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아브라함 4:1-8

사도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는 이 문제를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에 호소하면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자기 자신도 그와 관련시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온 세상 사람이 찾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외에는 아무도 진정으로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더없이 귀중하고 값비싼 진주를 얻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즉 할례와 그의 외적 특권들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신 것이 그의 행위의 공로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1]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만한 소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랑할 것이 있다(2절). “그의 이름이 위대해졌으니 그가 자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 만하나 하나님에게서는 결코 받을 수 없다. 바울 자신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때때로 그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랑하는 것을 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랑할 수 있는 체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도 결코 자랑할 수 없다.

[2]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분명히 말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3절). 신앙에 관한 모든 논쟁에 있어서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위대하거나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성경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는지라’고 한다(창 15:6).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와 같이 의로 여기신 바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된 것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불신앙으로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고 난 직후에, 약속된 후손에 관하여 아주 주목할 만한 믿음의 행위를 보였을 때 말해졌다. 칭의를 얻는데는 완전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우세한 믿음 즉 불신앙을 이길 만한 믿음이 요구된다.

[3] 만일 그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빚으로’여겨졌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주장하는 요지이다(4,5절). 아브라함의 상급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시기 바로 직전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창15:1).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런데 만일 아브라함이 순종의 완전함 때문에 이러한 약속을 받을만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호로 전적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값없이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제자에게 즉 어떤 공로도 자랑할 수 없고 다만 살아있고 활동적이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에게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5절). ‘경건치 아니한 자’ 곧 이전에 불경건했던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그의 이전의 불경건함이 그의 믿음을 근거로 한 칭의를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절망할 일이 전혀 없다. 비록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의 죄를 없이해 주시지는 않지만 불 경건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하신다.

에베소서 새벽기도 설교문 예수님의 비밀을 깨달은 바울

[4] 사도는 다윗의 시편으로부터 이 사실을 더욱 예증하고 있다(6-8절). 이 시편에서 다윗은 죄의 사함을 사람의 복을 구성하는 요소로 언급하면서,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용서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용서의 성격:빚을 면제해 주고 죄를 덮어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를 그의 뒤로 던지시고 그 얼굴을 죄에서 돌이키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우리의 복의 근거가 우리의 무죄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심에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용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치 아니하심’에 있다(8절). 하나님의 받아들이심과 보상은 결코 빚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되받는 것이 은혜라고 결론을 내린다(6절).

2) 용서의 복됨:…한 자는 복이 있도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 말씀은 그 복이 어떤 복이며 또한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용서받은 사람들만이 오직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왜냐하면 바로 이 사실이 다른 모든 은혜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Ⅱ.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때와 이유 4:9-17

사도는 이 단락에서 아브라함이 언제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와 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를 살펴본다.

[1]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이었다(10절). 아브라함이 무할례의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 즉 의가 전가된 것이다. 사도는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 사실을 주목한다. 아브라함은 무할례 시에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할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치기 위한 것’이다(11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치는 의식을 제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특별한 은총으로서 ‘할례의 표’를 받았다. 여기서 성례와 할례의 성격을 살펴보자. ①성례의 일반적인 성격: 성례는 표이며 봉인이다. 성례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은총의 표이며 조건적인 약속의 봉인이다.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시고 또한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그에게 날인한다. ②할례의 특별한 성격: 할례는 구약에서 처음으로 시작되는 성례였다.

할례는 하나의 ‘표’로서 우리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원초적인 타락이 영적 할례에 의해서 끊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이다. 할례는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를 겉으로 느낄 수 있게 나타낸 표시’ 였다. 할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언약 특별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언약을 인치는 것이었다. 만일 그때 어린아이들이 은혜의 언약으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면-이것은 그들이 그 언약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인데-어떻게 이제 와서 그들이 그 언약에서 내쫓길 수 있겠는가!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이는 저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전에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그에게서 더욱 분명하고 충만한 은혜 언약의 섭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불린다.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말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처럼 믿음의 모범으로 서있다는 것을 말하며, 선조들의 특권이 그들의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선례로 서있다는 것을 말한다. ①그는 비록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조상이 된다. 아브라함 자신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결코 방해 거리가 될 수 없다.

이같이 바울은 불쌍한 이방인들의 의심과 염려를 미리 고려하였다. ②그는 믿는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자들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자취를 좇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문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범을 좇기 때문에 그들이 조상이 된다. 여기서 누가 진정으로 교회의 조상들의 후손인가를 보라. 그들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 곧 참된 후예들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계승의 행렬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아버지라고 떳떳하게 부를 수 있는 자들은 형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다.

[2]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다(13-16절).

1) 그가 받은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세상은 그들의 것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세상에서 약간의 땅도 거의 소유하지 못했을 지라도 실상은 세상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자였다. 그보다는 어쩌면 이 언약이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다. 여기서는 ‘그 후손’이라고 언급되었는데 그가 곧 그리스도이시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후사로 계신다. 아브라함이 세상의 후사로 있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이다.

2) 어떻게 그가 그 언약을 받았는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자기 본토를 떠날 때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제 이것은 믿음으로 되는 만큼 율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14,15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왜냐하면 율법에 철저하게 복종하여 한 점 흠 없이 순결하게 생명에 이르는 길은 완전히 막혔고 또 율법 자체 속에서도 막혔기 때문에, 만일 율법전체를 완전하게 준행해야 한다면 그 언약은 결코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15절에서 입증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즉 우리 속에 하나님의 진노를 이룬다. 흐르는 시내를 막으면 물이 불어나듯이 우리에 대한 진노를 쌓는다. 이제 우리가 진노를 이루는 율법으로써는 결코 상속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15절 후반부에서 율법이 어떻게 진노를 이루는가를 설명하나.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잘 알려진 사실이다).

3) 왜 그 언약이 그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는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16절). ①이것은 ‘은혜’에 속하고 ‘율법’에 속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빚이나 공로에 속하지 않고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이다. 은혜가, 받아들이는 믿음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믿음은 특별히 주시는 은혜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명예를 은혜, 곧 값없는 은혜에 돌리실 것이다. ②그 약속을…굳게 하려 하심이라. 첫 번째 언약은 확실하지 않다.

사람이 그 언약에 계획된 은혜들이 길어져 버렸다. 이제 새 언약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확실하게 전달하는 또 다른 길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길이며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며 그가 안전하게 지키시는 길이다. ③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하심이라. 만일 그 약속이 율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었을 것이다. 믿음으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뿐 아니라 영적인 후손도 그 언약에 관계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참된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언약을 고안하셨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7:5을 주목케 하는데 거기에 그의 이름이 ‘큰 아비’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이유가 나온다.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곧 모든 신자들이 아브라함을 그들의 모본으로 삼으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다.

Ⅲ. 아브라함의 믿음 4:17-22

[1] 그는 어떤 하나님을 믿었는가(17).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믿음을 붙드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제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살펴보자. (1)’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아브라함은 그와 그의 아내가 거의 죽은 상태 가운데 있을 때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수 있는 분으로 여겼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수 있다. 늙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실 수 있으며 ‘허물과 죄로 죽은’ 이방인들을 거룩한 영적 생명에로 살리실 수 있다(엡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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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죄인들의 칭의와 구원,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아내로 삼으심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은혜로운 부르심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 권능과, 지배를 나타내며 또한 다른 모든 지주가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에도 믿음을 받쳐 주는 막강한 지주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전능을 의지하는 것이 참으로 믿음이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자 앞에서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가(18-22).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18). 그에게는 바랄 수는 없으나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소망이 있었다. 그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소망을 일으키고 지지해 주는 감각과 이성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아무리 따져도 그로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소망에 불리한 그와 같은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의 믿음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함으로 생겨난 것을 바라고 믿었다. 이는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18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은혜를 통해 그로 하여금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을 수 있게 하셨다. 믿는 자의 조상이 될 그가 신앙에 있어서 보통 이상으로 특출해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믿은 바이었고, 그것이 저에게 의로 여겨졌다. 그는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19절). 그의 몸은 이제 기력을 잃어서 전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특별한 어떤 복을 계획하실 때에는 흔히 그 복 자체에 사형 선고를 내리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을 개의치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각을 거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오직 그 약속의 신실함만을 생각하였고 이것이 그의 믿음을 유지케 하였다. 그 약속을 거스리는 모든 난관들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 육신적인 이성의 지혜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믿음이 연약하다는 증거이다. 그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20절).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약속에 관해서 속으로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고 그 약속에 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하기 위해 머뭇거리지도 않았으며 오직 영혼의 결단으로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그 약속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그 약속에 대해 논의할 여지가 있는 문제로 생각지 않았다. 그는 믿음이 없음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흔들리는 것은 전적으로 불신앙 때문이다. 우리가 흔들릴 때 약해지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 그는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신앙의 힘은 그의 의심을 극복한 승리에서 드러났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특별히 하나님의 신실함에 영광을 돌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어떤 것도 위대한 신앙만큼 칭찬하시는 것을 결코 듣지 못한다(마 8:10; 15:28).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이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큰 믿음을 영예롭게 하신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21절). 즉 그는 ‘철저한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인내했다. 이 말은 모든 돛을 다 달고 입항하는 배를 두고 사용하는 은유이다. 아브라함은 의심과 두려움의 폭풍우를 보았고 그 약속을 반대하여 일어나는 시험들을 당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항해사로 약속을 나침반으로 삼고 대담한 모험가처럼 바람과 구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항해사의 지혜와 신실함만을 의지한 채 돛이란 돛을 다 달고서 용감하게 항구로 향하였다. 그는 의기양양한 승리자처럼 집으로 향하였다. 그의 전적인 확신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해 있었다.

우리의 동요는 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불신으로부터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능히 이루실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22절). 그가 하나님의 약속에 그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자비롭게 받아들이셨고 그에게 응답하셨으며 그의 기대를 넘어 그를 의롭다고 하셨다. 이 사실은 왜 믿음이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선정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Ⅳ. 이 칭의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한다. 4:23-25

그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칭의는 우리의 본보기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결론짓는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23절). 그 사실이 기록된 것은 단지 언아브라함을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칭찬하거나 그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어떤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 성도들에 대한 기사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지도하기 위한 선례와 거울(고전 10:11)이 되고 또 우리에게 교훈을 (롬 15:4)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특별히 아브라함에 관하여 이 사실이 기록된 것은 ‘우리도 위한’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의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 기록은 족장들을 위할 뿐 아니라 세상 끝에 오는 우리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이다.

1. 우리의 공통적인 특혜(23,24)

그 특혜가 즉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것이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23절).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이 자비가 계속될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두시는 동안에는 지금처럼 그 칭의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미래 동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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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의 공통적인 의무(25)

이러한 특혜의 조건이자 의무는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의 바른 대상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시는 장차 올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고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계시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가 믿음의 문제를 바꾸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능력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그는 이 사실을 25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25절). 그는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사실상 범죄자로서 죽으셨다. 그러나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보상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예수는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는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고 부활로 우리의 채무가 소멸되었다는 증서를 받으셨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특별히 강조한다.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도 그리스도이시다(34절). 이제 모든 문제를 살펴 볼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의지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본 장과 전 장에서 우리의 모든 위로의 원천이며 위대한 근원으로서 확증해 온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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