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 헬라어 원어성경말씀은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씀한다. 복음이 아니면 인간이 예수님을 깨달을 수 없다. 예수님을 모르면 구원받을 수 없다.
성 경: [롬3:9] 티 운 프로에코메다 우 판토스 프로에티아사메다 가르 이우다이우스 테 카이 헬레나스 판타스 휘프 하마르티안 에이나이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우리는 나으뇨 – 본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지칭하는 바가 누구인지 규명해야 한다. (1) 유대인을 통칭했다고 볼 수 있는데,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다음 근거를 볼 때 이 견해는 옳지 않다. 본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역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을 가리킬 때 보통 3인칭으로 나타냈으며(1절;1:16;2:9;9:4;10:1;11:20), 2:1-29에서는 유대인이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었다. (2)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8절에서 사용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부터 18절까지는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므로 그리스도인도 그 죄의 보편성에서 제외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란 바울 자신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또는 더 넓게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나으뇨’에 대한 해석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헬라어 ‘프로에코메다’의 번역인데, 이 동사가 수동태와 중간태의 형태가 같고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동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우리는 나아지는가’로 해석되어 ‘우리는 나은 자로 판단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의미를 지닌다(Meyer). 그리고 중간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능동의 의미이든 수동의 의미이든 간에 ‘우리는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수동태를 취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현 실존이 죄의 보편성 문제에 있어서 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강조되지만, 중간태를 취하면 유대인과 비교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물음이 강조된다.
결코 아니라 – ‘우 판토스’는 고전 5:10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단순한 부정 이상의 ‘결단쿄 그럴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들은 1, 2절에 기록된 유대인의 유익이 범사에 많다는 진술(陳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 2절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유대인이 갖는 특이한 지위와 역할을 다루었고, 여기서는 유대인의 도덕적, 영적 상태를 언급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Harrison, 泉田昭).
더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영적 윤리적 상태에 있어서는 별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본 구절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판토스’는 보다 강한 부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부정어 ‘우’의 위치를 바꾸어서 ‘판토스 우크'(고전 16:12)를 취해야 한다(Murray).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아니다’, ‘터럭 만큼도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이다.
성 경: [롬3:10] 카도스 게그랍타이 호티 우크 에스틴 디카이오스 우데 헤이스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기록한 바 –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oral traditions)이라고 한정짓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언급하는 ‘기록한 바’는 선교 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여진다. 시가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이 초대 기독교에 수납되었다는 사실은 쿰란 문서들(DSS)을 통해 입증되었다(Kasemann). 바울은 여기서 시편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12절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시 14;3;53:3), 10절과 11절은 약간씩 변형하여 바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인용한 시편들과 본문을 대조하여 보기로 하자
의인은 없나니 – 문자적으로는 시 14:1보다 전 7:20(LXX)에 더 가까운데, ‘세상에 아주'(엔테게) 없다는 것을 ‘하나도'(우데 헤이스) 없다고 표현한 점만 다르다. 시편과 비교해 보면, ‘선을 행하는 자'(포이온 크레스토테타, 시 13:1<LXX>, ‘, 포이온 아가돈, 시 52:2<LXX>)라는 표현 대신에 ‘의인'(디카이오스)이라고 변형시켰고, 시편에 언급되지 않은 ‘하나도’ 없다는 표현을 첨가하여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이러한 표현 방식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의인’에 대해 혹자는 ‘올바른 도덕관을 갖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도 포함시키고 있으나(Matthew Henry), 타당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구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창 5:24, 6:8). 결국 죄에 오염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선’이나 ‘의’라는 개념과 거리가 멀다.
하나도 없으며 – 헬라어 ‘우데 헤이스’는 예외는 아무도 없다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바울이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몇몇 경건한 자들을 의로운 자들이라고 부렀기 때문이다(빌 3:6).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의’의 개념 조차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떠난 도덕적 규범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 묵시 문학 속에서도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하느님의 판단에 의하면 의로운 자가 없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라는 구절은 신약에 기록된 바울의 견해와 일치한다(Kasemann).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주장이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버렸고(빌 3:8)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 속에서 사용된 보다 권위 있는 구약의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롬3:11] 우크 에스틴 호 쉬니온 우크 에스틴 호 에크제톤 톤 데온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깨닫는 자도 없고 – 시 53:2에 대한 70인역(LXX)의 번역에 의하면 ‘깨닫는'(쉬니온)의 목적어로 ‘하나님'(톤 데온)을 최할 수 잇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시과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닫음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1:28 a).
성 경: [롬3:12] 판테스 엑세클리난 하마 에크레이오데산 우크 에스틴 포이온 크레스토테타 우크 에스틴 헤오스 헤노스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본절은 70인역(LXX)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시 14:3<LXX 13:3>;시53:3<LXX 52:4>).
다 치우쳐 – 히브리어 본문(MT)에서는 본 구절이 시 14:3에서는 ‘사르'(*)로, 시 53:4에서는 ‘사그’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역(LXX)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엑세클리난’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엑세클리난’은 ‘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1:21)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도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한편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은 ‘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여진 부사 ‘하마’는 ‘모든’, ‘다'(판타)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등의 의미도 갖는다(행 24:26). 즉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 혹자는 본 구절을 ‘인간이 애정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alvin). ‘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선’을 의미하는 ‘아가도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1:31)라고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
성 경: [롬3:13] 타포스 아네오그메노스 호 라크뤼극스 아우톤 타이스 글롯사이스 아우톤 에돌리우산 이오스 아스피돈 휘포 타 케일레 아우톤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본절은 시 5:9;14:3에서 인용된 것이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 팔레스틴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으며 그 입구는 돌로 막게 되어 있다(요 11:38, 41). 따라서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려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은 그 목구멍이 어떠한 것도 삼킬 만큼 넓다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 외식(外飾)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4)고 비유적으로 책망하신 적이 있다. 인간은 입을 통해서 온갖 더러운 것을 토해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불이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듯이 인간의 혀도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조차 죽일 수 있는 지옥 불과 같다(약 3:5, 6).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 시 5:9의 인용으로 히브리어 사본에서는 ‘혀로 아첨했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70인역(LXX)은 이를 ‘혀를 유창하게 만든다’고 의역하였고, 본문의 원어도 이와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Lenski). ‘속임을 베풀며’의 헬라어 ‘에돌리우산’은 ‘속이다’, ‘사기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돌리오오'(*)의 미완료형 ‘에돌리운’에서 ‘뉘’대신에 ‘오산’이 붙어 반복적인 의미의 미완료형이 되었다. 즉 계속해서 속이고 사람을 죽이는 혀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타인을 살리는 말이 나올 수 없고 오히려 죽이는 독이 가득할 뿐이다(약 3:8). 이것은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함과 같고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약 3:12).
성 경: [롬3:14] 혼 토 스토마 아라스 카이 피크리아스 게메이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본절은 시 10:7의 의미를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시 109:17-19) 깨달아야 한다. 몇몇 주석가들은 저주와 악독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저주하는 주체인 가해자와 악독을 당하는 피해자로 구분한다(Hendriksen).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을 대표적으로 ‘저주와 악독’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 구절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뒷바침해주는 시구이고(Harrison), 문맥상 강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롬3:15] 옥세이스 호이 포데스 아우톤 에크케아이 하이마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그 발은 – 본문은 잠 1:16의 앞 부분과 동일하지만 다음 구절(16, 17절)이 사 59:7, 8의 인용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 59:7 상반절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선포한 후에 13절과 14절에서는 ‘말’에서 비롯되는 악행을 설명했으며, 본절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한 악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입의 말과 악행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타락하여 부패해진 자연인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선’도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 있다(벧전 3:21).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피를 흘린다는 것은 악행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피’ (하이마)는 성경에서 ‘생명의 원천'(요 1:13) 또는 ‘생명의 좌소'(고전 15:50;히 2:14)를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쏟아버리다’, ‘피를 쏟아내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에크케오’의 단순 과거 부정사 ‘에크케아이’와 함께 쓰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의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빠른지라’로 번역된 분사 ‘와세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날카로운’, ‘예리한'(계 1:16;2:12;19:15)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본절에서만 ‘빠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빠르다’를 뜻하는 헬라어 ‘타키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단어 ‘와세이스’를 쓴 것 같다.
성 경: [롬3:16] 쉰트림마 카이 탈라이포리아 엔 타이스 호도이스 아우톤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파멸과 고생 – 직접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혹자는 이 표현을 인간의 지독한 잔인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Calvin), 이미 2:9에서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환난과 곤고’와 ‘파멸과 고생’은 모두 영혼이 지옥의 형벌 가운데 있을 때 나타날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그 길에 있어 –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라는 뜻이 된다. 본절은 앞절의 결론으로서 피흘리는데 빠른 발을 가진 ‘그들의 길에’ (엔 타이스 호도이스 아우톤) 파멸과 고생이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간 데 마다 남겨진 흔적’으로 파멸과 고생을 이해하였으나 그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미래에 주어질 형벌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인류의 잔혹한 피흘림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결국 그 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런 파멸(破滅)을 초래하게 된다.
성 경: [롬3:17] 카이 호돈 에이레네스 우크 에그노산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혹자는 ‘평강의 길’을 현실적인 평화 내지 이웃과의 화목으로 해석한다(Matthew Henry).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평강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사 9:6, 7) 인간들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는 약속(학 2:9)이 성취되었다(5:1). 이 평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다. 이 길은 (1)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요 14:6) 동시에 (2) 모든 사람들과 함께 화평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마 5:9;딤후 2:22). 또한 (3)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가야 할 길과는 대조를 이루는 길로서 성도들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동시에 나타내는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은 결코 이 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또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얻을 수도 없다.
성 경: [롬3:18] 우크 에스틴 포보스 데우 아페난티 톤 오프달몬 아우톤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본절은 시 36:1 하반절의 직접적인 인용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시 14:1a)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11절에서 17절까지의 인용 구절들에 언급된 부패상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레이(Murray)는 본절을 보다 자세히 해석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평가의 중심부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계산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Calvin)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사악함을 견제하는 굴레이므로 그 경외심이 사라질 때 온갖 종류의 방탕한 생활에 거침없이 탐닉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신 10:12;수 4:24;24:14;사 50:10), 그러한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시 31:19;103:13;147:11;잠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