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 설교 말씀은 바울이 전 인류의 죄에서 대해서 말씀한다. 로마서는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씀한다. 인간은 전적 부패했으며 타락했다.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음을 로마서는 말씀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는 역할을 할 뿐이지 구원받게 하는 역할은 할 수 없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Ⅰ. 몇 가지의 반론과 모든 인류의 죄성 3:1-18
1. 여러 가지 반론에 대한 사도의 답변(1-9)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누가 트집을 잡을 때 그 진리는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1] 첫째 반론: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그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있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사실 이 평등의 교리가 유대인들의 모든 특권을 부인하고 할례의식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않는가?
답변: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많은 특권과 영광을 받은(2절) 백성이다. 범사에 많으니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도 문이 열려 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이 문으로 가는 길이 더 넓고 평탄하다. 사도는 로마서 9:4,5에서 유대인들이 가진 여러 가지 특권들을 일일이 열거하지만 여기에서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 성경을 맡았다는 한 가지 특권만을 언급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시이다. 신탁(말씀, 하나님의 계시, oracle)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우리는 율법과 성경의 증거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탁들이 유대인들에게 맡겨졌었다. 구약은 와전되지 않고 처음 그대로의 순수한 상태로 조심스럽게 보존되도록 그들의 손에 맡겨졌었다. 유대인들은 먼저 그들 자신이 사용하여 유익을 얻고 그 다음에는 온 세상에 유익을 주기 위하여 그 거룩한 보물을 받았다. 그들은 구원의 수단을 받은 것이지 구원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첫째’라는 말과 함께 이 특권을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첫째 가는 중요한 특권이었기 때문이었다.
[2] 둘째 반론: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여전히 그의 복음에 대적하는 원수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는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3절).
답변: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사도는 그와 같은 발상에 깜짝 놀라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4절). 유대인들이 강퍅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마침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자기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애써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하는 세대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될 것이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모든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미쁘심(faithfulness)을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신용을 의심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사람들은 누구나 다 거짓말쟁이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라는(사람들에게는 믿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사도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께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신다는 시편 말씀(51:4)을 인용한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실 것이다. 둘째,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의롭게 여기고 또 그의 공의와 진리와 선하심을 주장하며 옹호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여기에 묘사된 대로 ‘판단 받으실 때에 밝히 드러나신다.
[3] 셋째 반론:육신적인 생각은 이 사실을 기화로 삼아 더욱더 죄를 짓고자 자신을 격려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명예를 빛나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신앙을 그처럼 혹독하게 형벌하신다는 것은 불의한 처사가 아닌가?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5절). 이러한 주장으로부터는 어떤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해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하는 것이다.
답변: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을 더럽히는 말들을 듣고 그에 대해 논의하기는커녕 깜짝 놀라며 당치도 않게 여긴다.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절). 비록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지라도 결코 죄 자체의 악함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죄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 뿐이다. 그 일을 위해 죄인이 이바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절대적인 주권자의 처사를 심리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코 항소가 있을 수 없는 최고 법정의 판결에는 어떤 이의도 제기되지 못한다.
[4] 넷째 반론:바로 앞의 반론이 여기서 되풀이되고 있다(7,8절). 그러나 바울은 그 반론의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에 대하여 충분히 답변 할 수 있게 한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졌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7절) 그러면 이것을 격려삼아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하지 않겠는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8절)’는 것은 죄인들이 자주 입으로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악을 행하고 있는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마음에 자주 떠올리는 생각이다. 바울과 그의 동료 사역자들이 이와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라고 말하였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귀신의 왕 바알세불과 결탁했다는 말을 들으신 것을 생각해보면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사역자들이, 그들 스스로 가장 혐오하는 일들을 가르치며 주장한다고 비난을 받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며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을 비방하는 것은 사탄이 오래 전부터 써오던 술책이다. “할 수 있는 한 한껏 중상을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궁지에 몰아 넣을 것”이라는 식이다.
답변:사도는 이제 더 이상 논박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일부러 악을 행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그 구실의 비호아래 피할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구실이 그들의 정죄를 정당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막연한 생각에 근거하여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죄를 짓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속에 죄를 짓고자 하는 충분한 의지와 음모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죄 받는 것이 옳다. 그들이 지금은 제멋대로 이와 같은 구실들을 둘러 붙일 수 있을지 몰라도 마지막 날에는 그 구실들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고 그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처사에 있어서 의롭다함을 얻으실 것이다.
2. 인류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보편적인 죄에 대한 사도의 주장(9-18)
“우리는 나으뇨? 이말은 곧 유대인인 우리가 저희보다 나으냐는 것이다. 혹은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의로우냐는 것이다. 결코 아니라.”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믿지 않는 무리들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가? 슬프게도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 모두 ‘죄 아래 있다.’ 즉 죄책 아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자들이다(19절). 사도는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하였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선언하였느니라(9절). 이 말은 법적 용어이다.
그는 여기서 구약 성경으로부터 몇 구절을 끌어내어 이 고소와 유죄선고를 더욱 예증한다. 10,11,12절은 시편 14:1-3에서 인용되었고, 나머지 구절들은 70인역 성경에 기록된 시편 14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편 14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옛 세상을 보신 것처럼(창 6:5) 굽어 살피셨다. 친히 만물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망치고 난 지금 다시 보시니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악하였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보자.
[1] 습성적이 두 가지 면
1)사람들에게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습성적으로 빠져있다. 의인은 없나니. 즉 정직하고 선한 미덕의 원리를 가진 사람은 “없되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만일 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내셨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했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의인 노아를 지켜보셨다. 우리에게 타고난 의란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11절). 잘못은 지각이 타락한 데서 생긴다.
그런데 신앙과 의에는 충분한 지식이 있어서 만일 사람들이 그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진다면 그들은 좀더 나은 상태에 있고 좀더 나은 행동을 할 것이다. 죄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즉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소원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12절). 일단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사람들은 이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즉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올바른 사람은 세상에 전혀 없다는 것이다.
2)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악한 것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다 치우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길 안에서 행하도록 지으시고 또 그를 올바른 길에 두셨지만 사람이 그 길을 버렸다.
[2] 실제적인 면
1) 사람들의 말에 있어서(13,14절): 사도는 특별히 다음 세 가지 점들을 지적한다. ①잔인하다. ‘저희 목구멍은’ 해를 끼칠 기회만을 기다리는 ‘열린 무덤’이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그 무덤을 열어 놓지는 않지만 몰래 악을 꾀하고 있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즉 치료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 있다. 그들은 그 악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망쳐 놓는다. ②속임을 베푼다.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들은 이범에서 자기들이 마귀의 자식임을 드러낸다. “그들이 속임을 베풀어 왔다”는 말은 그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③저주가 가득하다. 즉 하나님을 비난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고 형제에게 악을 비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죄들을 지음으로 그들이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2)그들의 행동에 있어서(15-17절):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그들에게는 ‘파멸과 고생’이 따른다. 파멸과 고생이 그들의 동무이며 마침내는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이르고 만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고 그들의 죄 자체가 그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다. 자기 죄의 노예가 되는 것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은 진정한 평화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평화에 관한 일들을 알지 못한다.
3)이 모든 악의 뿌리(18절):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실제적인 모든 신앙 생활에 관계된다. 악한 자들은 이것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법칙들을 따르며 다른 목표물을 겨냥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선도 기대할 수 없다. 일단 두려움이 버려지고 나면 기도를 하지 않게 되고 이어서 모든 것이 곧 파멸에 이르고 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기서 짤막하나마 인류의 보편적인 타락과 부패상을 살펴보았다.
Ⅱ.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3:19-31
바울은 이상의 모든 사실로부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며 그것을 그의 강론의 요약으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절). 위에서 살펴본, 그와 같은 타락의 세력에 지배되어 있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든지 하나님의 인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을 얻어야 한다. 사도는 여기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의 죄를 논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논한다.
[1] 그는 율법의 행위로 칭의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의 죄부터 논의하기 시작한다(19,20). 그 요지는 아주 분명하다. 즉 우리가 깨뜨려 버린 율법으로서는 결코 칭의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의 죄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1)그는 특별히 그 죄를 유대인들에게 돌린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19절). 이 유죄 판결은 다른 모든 민족에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에게도 내려진다. 그 이유는 그 판결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너를 정죄하여 유죄를 선고하는 것을 네가 안다.” 이는 모든 입을 막으려 함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자들은 마침내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또한 입을 다문다.
2) 그는 그 죄를 온 세상에 널리 일반적으로 적용한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심판아래 죄가 있게 하려 한다”는 말은 곧 유죄가 입증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죄상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은 두려운 말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입고 나올 의를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23절).
이 말은 곧 인간이 최고 목표가 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마치 사수가 표적을 맞추는 데 이르지 못하고 달리는 선수가 상을 얻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이르지 못하게 됨으로 상을 얻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철저한 실패자가 된다. 이 사실을 좀더 생각해 보면 첫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이런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이름을 더럽힌다.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앞에서는 무죄를 자랑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려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범죄하였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잠잠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가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셋째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영광의 시작인 칭의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에게 입혀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인 성화에 이르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흠 없는 결백으로 천국에 이를 수는 없다. 그 길은 막혔다.
3)더 나아가 그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러한 유죄 판결을 율법의 탓으로 돌린다(20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유죄 판결을 내릴지언정 결코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 율법의 바른 용법과 의도는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치료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병을 조사하는 것이 곧 병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9절에서 율법의 이 같은 용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이 말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면 첫째로 ‘아무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의 본성 속에 남아 있는 부패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는 어떤 칭의도 영원히 방해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양심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한 즉 그의 앞에서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2] 그는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만 기대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21-28). 그렇다면 전혀 소망이 없는가? 죄 때문에 그 상처가 치료될 수 없는가? 아니다.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나타났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복음 안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라고 일컬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의로써 그가 정하시고 마련하시며 받으시는 의이다.
1)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그 의가 나타났다. 복음에 나타난 칭의의 길은 대로인데 그 길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것은 ‘율법 외’의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의는 완전한 의이다.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의이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므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모든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바라보게 한다.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그 대상으로 모시는 믿음에 의해 얻어진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그 의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 의는 모든 자 곧 ‘믿는 모든자’에게 미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에 똑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이 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스스로를 배척하지 않는 자들을 결코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데, 그들에게 주어질 뿐만 아니라 면류관이나 의복처럼 입혀지기도 한다.
2)그러나 이 의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 하는가?
①이 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낸다(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바울은 그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라는 말은 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 없이’ 저거 주어진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는 값없이 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막대한 희생을 치루시고 그것을 사셨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사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값없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대리 지불이 마련되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②이 의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우심의 영광을 드러낸다(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25절).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목제물이시다. 그 분이야말로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의 속죄가 이루어지는 은혜의 보좌이시다. 그는 우리의 화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분으로서 화해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화목제물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셨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다. 진노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를 제의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사랑의 지혜 가운데서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시도록 ‘예정하시고’ 범죄한 세상에 그를 화복 제물로 내놓으셨다.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한글 개역 난외주를 참조하라-역주) 우리는 이 화목 제물에 관여하게 된다. 거기에는 치료 연고가 마련되어 있는데 믿음이란 이 연고를 상처난 영혼에 갖다 바르는 행위이다. 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을 바라본다. 피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이 피 외에는 다른 어떤 피도 실제적으로 용서를 가져오지 못한다.
㉣믿음으로 이 화목제물과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은 모두 ‘전에 지은’ 그들의 죄에 대해 ‘간과하심’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로 세움을 받으신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함이시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의리의 죄가 간과된 것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때문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포도원에 그대로 있는 것은 주인의 선함과 농부의 중재 때문이다. 죄인이 언제나 지옥 이쪽 편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 바울은 이 사실을 매우 강조하여 말한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26절).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데 먼저 화목 제물 자체에서 나타내신다.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죄의 값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전가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서 죄를 찾으시고 처벌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우리의 죄를 지셨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 화목 제물에 근거하여 용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치르신 보상을 받으시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를 베푼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그는 의로우시다. 즉 자신이 하신 말씀에 신실한 분이시다.
③이 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27절). 만일 칭의가 율법의 행위로 이루어진다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면류관을 우리의 머리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법’은 영원히 자랑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믿음은 의지하고 자기를 비우며 자기를 부인하는 용기로써 모든 면류관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려놓게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의 법’을 말하고 있다. 믿는 자들이라고 해서 법 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믿음도 하나의 법이며 활동하는 은혜이다.
사도는 이상의 모든 사실로부터 이러한 결론을 끌어낸다(28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 칭의의 특혜가 미치는 범위를 보여준다(29-31).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들 고유의 특혜가 아니라 이방인들도 가질 수 있는 특혜이다. 이는 그가 차별이 없다(22절) 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실을 주장하고 입증한다(29,30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29절).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고 또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은혜의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편들어 어떤 차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나 실제로는 ‘말미암아'(by)나 ‘통해서'(through)나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아무 차별이 없다.
그는 마치 이 교리가 율법을 폐한 것처럼 생각하는 반론을 미리 제거한다(31절).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우리가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율법이 헛되이 주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율법이 바른 용도를 세우되 율법을 바른 기초 위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존속을 굳게 한다. 비록 우리가 언약처럼 율법에 의해 구원받지는 못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법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그리고 중보자의 손안에 있는 규범으로 인정하고 복종한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폐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굳게 세울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