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장 헬라어원어성경말씀은 율법주의를 자랑하는 유대인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율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율법주의 신앙은 항상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의를 무시한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성도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1.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
롬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보라’), 혹은 ‘에이 데'(‘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만약’)는 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는 ‘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유다이오스)은 ‘히브리인'(헤브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출 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출 19:5)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 받은 특권 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마 3:9).
롬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요청된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은 ‘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은 ‘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롬2: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 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because)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Black).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포시스’는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Barmby).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를 ‘본질'(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Black).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를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Calvin)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Matthew Henry)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진리가 거짓된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urray, Barmby) 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사 42:19;56:10;마 6:23;요 1:5;고후 4:4;요일 2:11).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라고(시 169:105)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롬2: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재'(고전 14:20;엡 4:14) 또는 ‘어리석은 존재'(잠 22:15)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 받은 자들이라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갈 6:3, 4) 본 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2. 율법을 강요하면서 지키지는 않는 유대인
롬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요 9:34),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마 23:3).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마 23:23-2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롬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계 2:22)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과 ‘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 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를 암시적으로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신 7:25).
롬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학자들 사이에는 본 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Cranfield)은 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 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 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는 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본 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 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율법을 범함으로 – 이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절)이 곧 율법을 범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 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롬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 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J. Murray).
롬2: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경고했던 것이다.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