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장 헬라어 원어성경말씀은 믿음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있고 인간이 만들어낸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념입니다. 사람이 신념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롬10:17)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이해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가 되면 믿고 자신의 판단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은 성경을 평생 읽어도 모두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믿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 진 책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에 믿어지고 이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가 우선이 아니라 믿음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성경이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는 것을 믿어야 만이 그 다음에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지식과 철학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믿음은 어떻게 생기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실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은 것도 나의 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성경이 믿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됩니다.
그럼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구원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믿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이 절대적인 믿음인 줄 알고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낸 믿음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면 그렇게 된다고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라고 독려합니다. 물론 그렇게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믿음을 갖고 긍정적으로 살면 뜻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야차르’의 믿음입니다. 구원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흙으로 빚은 육체와 정신적인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야차르’의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될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살면 자신의 목표한 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열심히 자신의 ‘야차르’의 믿음을 가지고 목표를 세워 긍정적으로 살았더니 큰 재벌을 이룬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차르’의 믿음도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언이니
하나님은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에 관해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믿음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의 인물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은 아직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보편적 믿음을 말합니다. 물론 구약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편적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계시가 완성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보편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보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신비한 체험을 하여 환상이나, 환청을 들으면 이것이 믿음의 근거가 되어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과 세상의 보편적 믿음을 구분해야 합니다. 보편적 믿음은 ‘야차르’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라’의 속사람이 믿는 믿음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믿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속사람인 ‘바라’의 몸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선택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의 믿음입니다. ‘바라’의 믿음은 특별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입니다. ‘야차르’의 믿음은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일반계시를 보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인간의 의지로도 믿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일반계시의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야차르’의 몸이 받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바라’의 속사람이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오는 믿음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라’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지 않고 ‘바라’의 속사람의 믿음이 생겼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은 보편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는 일반적 은총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지 않아도 자신의 의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세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속사람이 온전하게 되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특별은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 얻을 믿음입니다.
롬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속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즐거워하되’ 헬라어 (쉬네도마이 4913 VIPNS1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포, 단수, 1인칭) ~와 함께 기뻐하다, 만족하다, 라는 뜻입니다. 보편적인 믿음으로는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법입니다. 겉 사람은 율법에 매여 있지만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즐거워하며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합니다. 보편적인 믿음인 ‘야차르’의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 복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겉 사람의 것을 많이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때에 속사람이 주님의 법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속사람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속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기뻐하고 좋아하지만 겉 사람은 세상의 권력과 재물과 권세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좋아한다는 것은 선택된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재물이 부족해도 권력이 없어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지금 현재입니다. 성경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속사람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 육체의 환경이나 형편에 상관없이 주님 한분으로 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얻을 믿음을 주셔서 속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속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야차르’의 육체의 믿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야차르’의 몸은 세상에서 좋은 집을 가지면 잠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속사람이 갖는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야차르’의 육체가 가진 것이 없어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낡아지기 때문입니다. ‘야차르’의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은 이 땅에서 호령하면서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살기는 합니다. 하지만 속사람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바라’의 몸은 비참한 상태로 계속해서 낡아지게 되어 마지막은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바라’의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야차르’의 몸은 고생스럽게 살아도 속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기 때문에 마지막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잘못된 ‘야차르’의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한다면 이 사람은 절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함으로 믿는 믿음은 ‘야차르’의 믿음입니다. 나의 행위로도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라’의 믿음은 나의 행위는 전혀 필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이루신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믿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1%도 들어가지 않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럼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편적 믿음과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보냈던 열두 명의 정탐꾼들입니다. 이 중에 열 명은 보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사십일 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갈렙은 정탐한 내용을 백성들에게 보고하는데 우리가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취하자고 말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된 땅이기 때문에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선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능히 이겨서 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선택받은 백성들은 ‘바라’의 믿음을 가지고 천국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곳이라고 생각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길이 없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민13: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열 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의 백성들을 우리가 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우리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보편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환경을 먼저 생각하고 보게 됩니다.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천국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탓하게 됩니다. 그 환경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거룩하게 생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의를 내세워 다른 사람들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천국을 악평하는 자들입니다.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어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히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나님은 창세전에 선택된 백성들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뜻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에게 천국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편적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의의 믿음으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선택적 믿음인 ‘바라’의 믿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야차르’의 믿음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속사람이 변화를 받아 구원받은 믿음인 ‘바라’의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