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장 짧은 설교문은 이단과 이단 사상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거짓 이단에 대하여 경계해야 할 것을 권면했다. 율법주의 신앙자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이 받을 수 있다.
Ⅰ. 제명과 훈계 1:1-4
1. 서신의 제명(1-3)
바울이 신임장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구주 하나님에게서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명령을 받은 자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며, 영생에 대한 우리 모두의 소망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참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그가 디모데의 회심의 매개자가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디모데가 자기를 아들이 하듯 섬겼기 때문이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아들과 같은 직무를 행함에 있어 전혀 부족하지 않았으며, 바울 역시 그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돌봄과 애정에 있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2. 축복(2)
교회들에 보내는 바울의 모든 서신들에 있어서 사도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다 그러나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개의 서신과 디도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되어 있다. 사역자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긍휼이 더욱 필요하다. 만일 디모데가 풍성하고도 계속적인 긍휼을 필요로 했다면 우리 사역자들은 더욱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3. 바울이 디모데를 이 직무에 임명하는 목적(4)
그가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사역자들과 성도들 모두가 온전하도록 돌보는 일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교훈에 다른 것을 덧붙이지 않게 하며, 변색하지 않게 하며, 그들에게 전파된 그대로를 잘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사도 시대에는 기독교를 더럽히기 위한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디모데에게 이 직무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만 할 뿐 아니라 바른 교훈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가르치도록 해야만 했다. 다른 교훈은 성도들의 신앙을 더럽게 하고 넘어뜨리게 할 것이다. 이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4절).
의심쩍은 변론은 교회를 바로 세워주기 보다는 오히려 끌어내리는 것이 된다. 경건한 교훈은 모든 논의에 있어서 사역자들이 지행해야 할 목표이다. 경건한 교훈이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께 나아온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훈 받는 것도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똑같은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역자들은 논쟁을 피해야 한다.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진리에 대해서까지라도 논쟁은 믿음 실행 순종으로 이루어진 신앙의 활력을 좀 먹는 것이 된다.
Ⅱ. 율법의 참된 목적 1:5-11
여기서 사도는 율법의 용도와 복음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1. 율법의 목적과 용도(5-10)
그것은 사랑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1〕하나님의 율법의 주된 의도와 방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또한 서로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대적을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그르칠 뿐 아니라(마 5:44), 그 목표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 대체된 계명인 복음을 의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되 그것을 단지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데만 사용한 자들은 그 율법의 최종 목표가 복음 전파이며 또한 청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깨뜨린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죄악된 사랑으로부터 청결해져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선한 양심’에서 일어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여기서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불리워진다. 그것은 숨김이 없는 사랑이다. 그것에 의해서 행해지는 믿음은 비슷한 성질을 띠어야 하며 순수하고 신실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율법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들은 무익한 말다툼으로 빗나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목표를 잃어버리게 될 때 그가 취하는 모든 걸음은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특별히 신앙에 있어서 다툼이 있다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무익한 다툼 외에는 거의 어떤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2〕율법의 용도(8절) : 유대인들은 그것을 부당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자신의 의를 세우는 데에 그것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율법을 바른 용도의 위치로 환원시키고 오용하지 않도록 하라. 이는 율법이 아직까지 생활 규범으로서 대단히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죄된 것과 의무가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서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하겠다. 율법이 주는 두려움이라면 그것이 사람들의 손을 묶고 사람들의 혀를 구속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율법은 주로 옳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크건 작건 그 정도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온갖 죄인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9,10절).
2.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복음의 영광과 은혜(11)
하나님의 많은 영광이 그의 창조와 섭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복음 가운데 더욱 크게 나타난다. 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취기 때문이다. 그래서 11절에 ‘영광의 복음’이라고 했다. 바울은 이 영광의 복음이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큰 명예와 큰 은혜로 여겼다.
Ⅲ.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한 언급과 찬양 1:12-17
1.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림(12)
사람들에게 사역을 맡기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다. 사역자들이 사역자들을 만들 수는 없다. 하물며 사람이 스스로를 사역자로 만드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 일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역을 맡기기 위해 부르신 자들을 그 일에 적합하게 만드신다. 즉 그는 자신이 자격을 준 자를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을 맡기기 위해 부르신 자들에게 능력 뿐 아니라 충성심까지도 주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믿을만한 종들이다. 사역에 대한 부르심은 큰 은혜라고 하겠다.
2. 바울의 회심에 대한 자신의 설명(13-17)
〔1〕회심 전의 바울은 어떠했는가? 종종 크고 뛰어난 봉사를 위해 예정된 자들은 회심 전의 자신들을 버린다. 만일 진실로 회개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지 못할 정도로, 혹은 그를 위해 우리가 일하지 못할 정도로 중대한 죄란 없다. 진실로 회개한 정도로 중대한 죄란 없다. 진실로 회개한자들이라면 자신들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선한 사도는 종종 자신의 이전 삶이 어떠했는가를 고백하였다.
〔2〕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큰 은혜.
1) 그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긍휼을 입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한 것은 알고 한 것 보다는 죄가 가볍다고 하겠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행하는 죄도 죄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무지는, 비록 죄를 무효화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정상 참작의 구실은 될 것이다. 죄인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의 바닥에는 불신이 깔려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바울은 긍휼을 입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14절). 즉 그의 영광의 목음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한다.(15절). 우리는 여기서 복음 전체의 개요를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임하셨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것은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복된 소식이다. 또한 그것은 너무 좋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그것이 미쁜 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가장 큰 죄인이었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이 그러한 자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핍박자는 가장 좋지 못한 죄인들 중에 드는 사람이다. 바울은 그런 자였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엡 3:8)로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부르고 있다. 죄인 중의 괴수가 성도들의 우두머리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 바울이 하나님께서 찾은 긍휼.
① 이는 회개하고 믿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16절). 지극히 진노케 한 자에 대해 그가 아주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의 한 보기였다.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절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본을 위해 예정된 것이었다.
② 그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할 만한 고백을 집어넣지 않고서는 자신의 편지를 계속해서 써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긍휼에 대해 보답할 의무를 느끼는 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로 넓힐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의 위대하심을 표명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애정어린 배려들은 그에 대한 우리의 고귀한 생각들을 결코 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들을 넘치게 하신다. 우리를 다투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스런 속성들에 대해 넘치는 찬양을 하도록 만든다.
Ⅳ. 디모데에게 다시 권고함 1:18-20
바울은 디모데에게 확고하게 그의 사역 가운데 나아갈 것을 훈시하고 있다(18절) 전에 디모데를 지도한 예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디모데에게 이 직무를 맡기게 하였다고 하겠다. 사역이란 죄와 사단에 대한 선한 싸움이다. 사역자들은 부지런하고 용기 있게 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전에 디모데를 지도했던 예언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의무를 활발히 다하도록 분발시키는 동기가 된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품은 선한 소망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환기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19절). 선한 양심을 버리는 자들은 곧 믿음의 파선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둘 모두를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전에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었던 두 사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들로서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훼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사단의 왕국에 속한 것으로 선포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반대로 역사하실 수 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되었다. 이는 그들로 훼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사단에 의해 더욱 훼방하는 자들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자. 이는 만을 우리가 한번 이것들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정체하지 않게 되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