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예수님이 길을 평탄하게 하고 있다. 요단강 근처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을 세례 요한이 성취하고 있다. 회개 말씀을 선포하여 죄인이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 우리는 회개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세례 요한의 사역(눅 3:1-14)
요한의 세려는 새로운 시대를 도입한다. 우리는 그 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야 된다. 요한에 대해서는 영광스런 것을 말했다. 그는 필경 하늘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자였고, 그것이 이 지상에도 놀라운 축복이라고 했다(1:15, 17). 그러나 우리는 그를 사막(광야)에서 잃어버렸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 그대로 머물렀다(1:80). 이제 마침내 그 여명이 돌아왔다. 그 날을 기다리던 자들에게는 새벽을 기다리던 자들 이상으로 기쁜 날이 돌아온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들을 관찰하자.
Ⅰ. 요한의 세례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출현과 같은 시기이다. 그 시기가 여기에 특기 되어 있는데, 이 점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묵과한 것이다. 그 때의 정확한 지시를 봐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1. 그 시기는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이방 정권의 연대를 빌어서 정해졌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피정복민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뜻이요, 따라서 메시야가 와서 영적 나라, 영원한 나라를 세우게 되고, 다윗과 유다의 온갖 현세적 권위와 통치권이 몰락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1) 로마 황제의 재위 연한으로 시기가 매겨졌다. 디베리우스 황제, 곧 12명의 가이사 중 세 번째 가이사요, 지극히 악독한 자요, 탐욕과 술 취함과 잔인성의 노예인 황제 재위 15년이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말을 빌면, 말하자면 그런 악독한 인간이 먼저 등장한 것은 언제나 사탄이 지배하고 군림하는 잔악하고 가증스런 도성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긴긴 투쟁이 있은 후 유대 민족은 근래에 와서 로마 황제의 일 개 현이 되었고, 이 디베리우스 황제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 때,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는 이렇게 이름을 떨쳤고 수많은 나라가 조공을 바쳐오던 그 나라가 이제는 로마의 보잘 것 없는 한 부속국이 되었고, 단순히 지배 받을 뿐만 아니라 짓밟히고 있다. 시정(市政)의 부조화는 얼마나 값비싼 결과를 초래하는가 !
율법수여자가 이제는 유다의 발 사이에서 떠났다(창 49:10 참조). 그리고 그 증거로서, 그들의 공적 활동은 로마 황제의 연한으로 날짜가 매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실로가 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2) 그 시기는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는 성지(聖地)의 상당한 부분을 다스리고 있던 그 총독들의 정부에 의해서 산정 되었다. 이것은 사실 그 땅의 노예성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총독들은 모두가 외국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민족의 슬픈 변화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민족의 “통치자들”은 “그들 자체”의 출신들이었었고(렘 30:21). 그것이 그들의 자랑이었었기 때문이다. “정금이 어찌 이리 빛을 잃었는고 !”
① 빌라도가 유대 총독이라고 했다. 즉 그가 대통령이나 행정장관이었다. 다른 학자들도 그의 성격을 말해 주고 있는데, 그는 사악한 인간이요, 양심도 없는 자라는 것이다. 그는 학정을 했다. 그러다가 수리아 총독 빌테리우스(Vitellius)에게 자리를 뺏기고, 로마로 호송되어 자기의 학정에 대한 답변을 해야 했다.
② 다른 세 기자들은 그들 “분봉왕”(tetrachs)이라고 칭했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 의하면, 그들이 지휘한 지역을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다. 분봉왕 한 사람이 완전히 헤롯 대왕의 정부 밑에 들어 있는 그 나라의 “4분의 1″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어떤 자들은 그 정부의 명예로운 요직에 앉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본다. 분봉왕들은 그 나라의 “제 4″의 자리요, 또는 “제 4급”의 통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즉 황제가 “첫째요,” “지방 총독”(proconsul)이 “둘째”요, “왕”이 “세째”이며, 이러한 “분봉왕”(tetrach)은 “넷째”라는 것이다(라이트푸트).
2. 유대 나라 가운데 있는 유대 정부에 의해서 시기가 정해졌다.
이것은 유대인은 타락한 민족이요, 그러므로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개혁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2절).
안나스와 가야바는 대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은 한번에 대제사장 한명을 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대제사장이 둘이 있다. 그들은 순번을 지키지 않았거나 남의 때에 마구 집전한 자들이다. 한 대제사장 1년을 직무하면, 그 다음 해는 다른 대제사장이 집무하게 되어 있었다(흑자들의 말이다).
한 사람은 대제사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자”(Sagan) ─ 유대인들은 그렇게 불렀다 ─ 요, 대제사장이 유고 시에 그를 대리해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할 수 있었다. 또 어떤 자의 말에 의하면, 하나는 대제사장이었고, 아론을 상징하는 자이며, 그가 곧 “가야바”(Caiaphas)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시”(nasi) 곧 산헤드린 공회의 두목이요, 모세를 상징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오직 한 분의 대제사장이 있으니, 모든 자들의 한 주님이 있으며, 모든 심판은 바로 그에게 위임되어 있다.
Ⅱ. 요한의 세례의 기원과 성향을 보자.
1. 그 기원은 “하늘로부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고 했다(2절).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충분한 사명과 지시를 받았다.
이 표현법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게 대해서 쓰여졌던 말과 같다(렘 1:2). 요한도 하나의 예언자이기 때문이요,(물론 예언자 이상이기도 하다) 또 그에게서 오랫동안 끊어졌던 예언이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즉 그의 아버지에게처럼 천사를 통해서인지,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서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전해진 그 말씀은 그에게 만족을 주었으니, 우리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는 요한을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로 천사가 그의 아버지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게 하기 위함이다. 천사는 당시 사가랴에게 아들이 있게 될 것을 다짐해 주었었다.
주님의 말씀은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 하나님이 “준비”한 자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가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감옥”에서도 “매이지” 않듯이, “빈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그발 강가에서 포로가 되어 있던 에스겔에게까지 그 길을 찾아갔고, 밧모 섬에 가 있는 요한에게도 찾아갔다.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다. 이제 그의 나이 30에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성전의 관습에 따라서 성전 일을 맡아 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물론 그는 30이 되기 전에 성전에서 미리 5년간 후보로서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를 보다 더 영광스런 사역에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이 그를 호출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성전의 공문서에는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사가랴의 아들 요한은 집무를 시작하니라.”
2. 요한의 세례이 범위와 목적은 자기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떠나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3절).
먼저 “그는 요단 부근 각 지방에 갔다.” 그곳은 자기가 거주하던 인근이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제일 처음으로 차지한 지방이다. 거기서 제일 처음으로 복음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다. 요한은 그 나라의 가장 고적한 지역에 거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자기가 거주하던 사막을 떠나 주들이 사는 지역으로 갔다. 은거 생활을 “지극히 즐기던” 자들도 하나님이 군중 속으로 부르시면 또한 유쾌한 마음으로 은거 생활을 “바꾸고” 나와야 되는 법이다. “그는” 빈들에서 “나와” “각 지방으로” 들어갔다. 또 어떤 특징 되는 징표, 곧 새로운 “세례의 전파”를 가지고 갔다. 어떤 종파나 파당이 아니라 “신앙 고백” 곧 현저히 구별되는 뺏지를 달고 갔다.
그 표적 또는 의식은 그 자체로 보면, 유대인들 사이에서 늘상 사용되고 있던 “물로 씻음”이었다. 개종자들이나 어떤 위대한 스승에게 가려는 자들은 그런 의식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의 의미는 “죄를 떠나 회개”하는 것이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는 모든 자들은,
(1) “자기들의 죄를 회개해야”하며, 자기들의 잘못을 “슬퍼해야”하고, “또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할 의무를 지게 된다. 죄를 뉘우침으로써 그들은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정직”하려고 애써야 했고, 다시는 죄 짓지 않기로 “약속하고,” 약속한 “선을 행하도록” 애써야 했다. 요한은 장로들의 전통이 부여했던 그런 의식 준수 자체로 사람들을 구속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촉구했고, 그들의 행실을 바꾸고 “그들의 모든 죄에서 떠나고” “새로운 심령을 가져” 새로운 삶을 살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이제 시작된 이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을 이전과는 달리 신앙이 있고 경건케 하며, 거룩하고 성스러우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명철하고 자비로우며, 의롭고 정직하며, 사랑하고 친절하며, 범사에 선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2) 그 세례를 통하여, 그들은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이 준 세례는 그들에게 죄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도록 하는 의무를 주었듯이, 한편으로는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을 은혜롭게설득해 주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여 너희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하여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 하리라”(겔 18:30). 구약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어진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일이다.
Ⅲ. 요한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 성경 말씀을 보자. 다른 복음서 기자들도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이사야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사 40:3).
그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쓰여진 말씀이다.” 즉 이사야가 하나님께 들었던 말씀이요,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한 바이며, 그의 말은 다가오는 후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그런데 그 말씀 속에 장차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으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바로 그 음성이 요한이다. 아주 분명한 음성이요, 큰 음성이며, 알아듣기 쉬운 음성이다. 그는 외쳤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다닐)길을 평탄케 하라”고, 요한의 임무는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그 길을 만드는” 작업이다. 즉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기질을 조성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께 영접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누가는 마태나 마가가 인용한 것보다 더 긴 인용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도 요한의 사역에 적용시키고 있다. 즉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리라”는 말씀이다(5, 6절). 하몬드(Hamnond) 박사는, 이 구절은 유대 민족이 그 불충실성으로 인하여 당하게 될 황폐를 예고한 말씀으로 풀이한다. 즉 그 땅은 로마 군대들의 개척자들로 인하여 평평한 땅이 될 것이요, 그 군대들에 의해서 폐허로 변할 것이며 그 결과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과 회개치 않은 자들 안에 현저한 구별이 생기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요한의 사역의 성질과 ─ 그의 사역이 서론적 역할을 한 ─ 그리스도의복음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1. 겸손한 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은총으로 “부요해질” 것이다.
즉 “낮은 데” 있고 “습한” 곳(겸손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상징-역주)에 있는 “모든 골짜기들은 가득 차게(메워)” 되리라는 것이다.
2. 교만한 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낮아지게 되리라.
“자기 자신들의 기초” 위에 서 있는 “자신(自信)감에 넘치는” 자들과 “자기 자신들의 꼭대기” 위로 올라가는 “스스로 기만당하는” 자들은 경멸을 자초하리라. “모든 산들과 작은 산들이 낮아지리라”고 했다. 그들이 회개하면, 티끌로 돌아간다. 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된다.
3.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전향하게 되리라.
“굽은 길”과 “굽은” 심령들이 “곧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아무도 곧게 할 수는” 없지만(전 7:13), 하나님은 스스로 은총을 통해서 죄인들이 굽게 한 것을 다시 곧게 하시기 때문이다.
4. 하늘 가는 길을 막고 방해하던 난관들이 사라지리라.
“험한 길이 평탄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은 “큰 평화”를 가질 것이니, “아무 것도 그들을 범하지 못하니라.” 그 복음은 하늘가는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찾기” 쉽고 “평탄케” 하여 “다니기” 쉽게 만든다.
5. 그 큰 구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완전히 드러난다.
그것에 대한 소식이 멀리까지 퍼진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했다(6절). 즉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보게 된다. “모든 자들이 그 구원을 본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 앞에 놓을 것이요, 그것은 그들에게 제공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람들 중 다소가 그것을 “보고” 향유하리라. 그 특권을 누릴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만들고, 사람들을 평등케 하고 그리스도와 은총의 길을 막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복음이 인간의 마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닦아지면,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을 영접 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Ⅳ. 요한이 자기의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준 일반적인 경고와 권고를 보자(7-9절).
마태 복음에 의하면, 요한은 바로 이 말을 “그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에게한 것으로 되어 있다(마 3:7-10). 그러나 여기서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들에게” 말하고 있다(7절). 이것은 사실상 요한이 자기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준 설교의 요지였다. 그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요지를 변경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왔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던 설교와 똑같은 설교를 하였다. 그는 “중요한” 인물이라 하여 아첨하거나 “다수”라 하여 찬사를 보내며 아부하지 않았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했던 그대로, “무리”들에게 죄를 책망해 진노의 경고를 보냈다. 그들이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그처럼 나쁜짓들을 범했기 때문이다.
1. 인류를 부패시킨 그 죄책은 그들이 “독사의 자식들(generation)”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독약에 피해를 받은 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독약이 되었다. 이 사실은, 지상에 인류를 존속시키며 “독사의 둥지”(지구:역주)를 파멸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크게 드러내어 준다. 하나님은 한 번 물로 그런 일을 행하신적이 있으며, 앞으로 불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2. 이 독사의 자식들은 다행스럽게도 “다가오고 있는 진노를 피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는데, 전에도 그러한 죄인들이었다면 진노가 그들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수효가 많아 “무리”라고 하는 사실이 그들의 안전을 조금도 보장해 주지 못하며, 그들을 모두 처단하라고 하여 하나님이 “치욕”을 겪거나 “손해”를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미리 우리 자신을 살핀다면, 이러한 진노에 대한 경고를 받을 것이요, 그것을 피하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3. “다가오고 있는 진노를 피하는” 길은 “회개”하는 수밖에 없다.
회개의 세례를 받는 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다가오고 있는 진노를 피하라는 “경고를” 자기들이 받았고, 그래서 자기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장차 올 일을 두려워하여 소돔에서 도망 나왔다는 것을 고백한다.
4. 회개를 고백한 자들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려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8절).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회개의 고백은 했지만, 다가오는 진노를 피할 수 없느니라.” 회개는 그 열매를 통해서 진실한 회개인지 아닌지 판가름 된다. 우리의 행실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변화를 입증해야만 한다.
5. 우리가 마음으로나 생활에 있어서 진정으로 성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고백과 또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한 고백은 아무 소용이 이러다.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지대한 의무인 회개의 의무를 면제 받을 수 있다고 꾸미지 “말라.” 우리 자신이 경건치 못한데 우리 조상이 경건했다는게 무슨 소용 있으며, 우리 자신이 계약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우리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6.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적인 특권이나 외형적인 신앙 고백을 믿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지 않으며, 우리들이 없이도 하나님 자신의 영예와 이권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멸절 되고 패망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를 높이 세우실 수 있다. – “돌”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되게 하실 수 있다.
7. 만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
우리가 더 중대한 회개의 고백을 하면 그만큼 더,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도움과 격려가 크면 클수록 큰 만큼 더, 우리의 멸망은 가깝고 확실한 것이 된다.
이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는데,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즉 악한 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경고가 이전보다 더 무섭게 되었다. 반면에 이제 회개한 자들에게 대한 격려 또한 더욱 고무적이다. “이제 너희의 운명은 너희의 행실에 달려 있다. 자신을 살피라.”
8. 열매 없는 나무는 마침내 불에 던져진다.
불이 그런 나무를 위한 최적의 장소이다. 열매, 곧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모든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하나님의 은총을 위해서 열매 있는 봉사를 못한다면, 그 나무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연료로 쓰여져야 한다.
Ⅴ. 요한은 자기에게 의무를 물어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자세한 지시를 주고 있다.
즉 “무리”(people)와 “세리”와 “군병들”에게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몇몇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하고 물은 것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요한이 자기들에게 일러 줄 만뿐 아니라 자기들이 할 일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 혹은 요한이 말해 준 모든 것을 행하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와 “세리”와 “군병”은 자기들의 잘못을 알고 있는 자들이요, 그래서 더 잘해야만 되는 자들이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매우 소홀히 여겼고, 거기에 무식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구체적인 지시를 요구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음 사실을 명심하라.
1. “세례를 받은” 자들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자들은 기회 닿는 대로 그들을 가르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마 28:19, 20).
2. 일반적인 말로 회개와 새 결심을 한 자들은, 자기들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서, 구체적인 개혁의 실례를 보여 주어야 한다.
3.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알려고 하고 물어야 한다. 바울이 회심하고 나서 한 첫 마디의 훌륭한 말은,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나이까?”(행 9:6 -개역 성경에는 없음)라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이 사람이 뭘 할 것인가?”하고 묻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맺어야”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이에 요한은 각자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 대답해 주었다.
(1) 그는 “무리”에게 그들의 의무를 일러주었다. 즉 자선을 베풀라고 했다. “옷 두 벌 가진 자”, 그래서 한 벌의 여유가 있는 자들은 그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한 벌도 없는 자에게 주라.” 최소한 “빌려 주라.” 아마 요한이 자기의 청중 중에는 지나치게 잘입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누더기를 입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화려하게 입은 자들은 궁핍한 자들을 구제해 주라고 한 것이다. 복음이 원하는 것은 “자비”이다. 희생제사가 아니다. 복음의 뜻은 우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넉넉하게 “음식”을 가진 자는, 옷을 영물론 있게 가진 자들처럼, “일용할 양식”이 없이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의 청지기일 뿐이요, 우리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자들이다.
(2) 요한은 “세리들”에게도 그들의 의무를 일러주었다. 그들은 로마황제의 세금 수납원들이다. 그들에게는 “너희에게 지정된 것 이상을 받지 말라”고 했다(13절). 그들은 정부와 상인들 중간에서 정의를 시행해야 하며, 세금을 사람들에게 과도히 메기거나, 법이 정한 것 이상으로 무거운부담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직책이 백성들이 군주를 속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인 만큼, 자기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하찮은 권력 부스러기라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악용하기 쉽다. “그런 일은 안 된다. 정한대로 지키라.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를 위해 거두어들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 취하여 자신들을 부유케 하지 말라.” 공적 세원은 공공 사업에 투자되어야 한다. 사리사욕에 이용하지 말라.
요한이 세리들에게 그 직위를 사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더 이상 세무서에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 직임 자체는 합법적이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공정하게 하고 정직하게 하라.
(3) 그는 “군병들”에게도 그들의 의무를 일러주었다(14절). 어떤 이들은, 이 군병들은 유대 민족 출신이며 유대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로마 군인들이라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로마에 봉사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로마인들도 유대인들이 유대를 지키는 것은 신임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복종한 초기의 사례가 된다. 흔히 군인들은 신앙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세례 요한의 엄격한 신앙고백까지 따르려 했다. 그들은 그가 한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기들의 생명을 자기들의 손에 쥐고 있으며, 종종 죽으며, “평화 속에 발견되기” 위해서 자기들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관심 있게 묻는 자들이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요한은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하지 않았으며, 군복무를 이탈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군인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을 죄악에서 보존하는” 것이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① 그들은 자기들에게 할당된 “사람들(‘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사람들을 압제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도 폭력을 쓰지 말라(강제로 빼앗지 말라). 너희들의 임무는 평화를 지키는 것이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을 막는 것이니라. 누구에게는 폭력을 쓰지 말라. 아무 사람이든 흔들지 말라(원문의 뜻은 그런 것이다)” 또 “사람들에게 겁주지 말라. 정의의 칼 뿐 아니라 전쟁의 칼은 오직 악행자들에게만 공포가 되고, 선행자들에게는 보호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 주둔 지역에서 무례히 행치 말라. 그들에게 공갈로 돈을 탈취하지 말라. 평화시에 전쟁의 피를 흘리지 말라. 남자나 여자에게든 비정한 짓을 하지 말라. 군인들이 종종 그렇듯이 마음을 황폐케 하지 말라.” 또 아무도 “거짓으로” 정부에 “고발하지”말라. 그런 일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뇌물을 취하는 일이 없게 하라.
② 군인들은 “동료 군인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된다. 혹자는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라”(개역은 “속여 빼앗지 말라”-역주)라는 경고는 특히 동료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볼 수 있다. “서로 상관에게 고자질하지 말라. 너희가 악감을 품고 있거나 무시해 버린 상급자들, 또는 자리를 빼앗긴 자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무도 압제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풀이를 한다. 그것은 칠십인역의 구약성서 구절 인용에서 취한 해석이다.
③ 군인들은 폭동에 가담하거나 봉급에 불만을 품고 지휘자들과 다투어서는 안 된다.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 너희가 동의한 금액을 받는다면, 그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말라.” 사람들을 억압하고 피해를 주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이다. 자기들이 가진 것에 결코 족한 줄 모르는 자들은 남의 것을 탈취해서라도 자기의 소유를 늘이는데 주저치 않을 것이다.
“자기들의 봉급에 족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종들에게 대한 법칙이다. 불만에 빠져 있는 자들은 스스로 많은 유혹에 걸려들고, 현재 있는 것으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