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예수님 말씀은 누가복음 집필 배경과 서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할 사명을 받고 태어났다.
Ⅰ. 머리말 1:1-4
외식적인 서언과 헌사, 아첨하는 말투, 그리고 득의만만한 태도 등은 항상 지혜롭고 선한 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익하고 교훈적인 말들에 대해서까지 그 비난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경우가 그러하다.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데오빌로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어떤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데오빌로를 고위층의 특정 인물로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는 여기서, 바울이 총독이었던 베스도를 부를 때 사용했던 존대의 호칭과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26:25). 종교는 아름다운 말씨와 훌륭한 태도를 보존케 하며, 우리들의 관례에 따라, “존경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존경하라”고 가르친다.
1. 누가가 이 복음서를 쓴 이유(1-3)
그는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이 복음서를 쓰게 되었으며, 복음서를 저술한느 중에도 성령에 감동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감동을 받은 것이지, 그저 기계처럼 움직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고려하여 저술하게 되었다.
(1) 그가 기록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확실하게 믿는 것들이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는 회의적인 논쟁거리가 아니라, 가장 확실히 믿고 있으며, 또 확실히 믿어야 될 것들에 대하여 기록하려고 했다. 대체로 우리가 오랫동안 가장 확실하게 믿어져 왔던 것들을 신조로서 지킨다는 사실은 비록 그것이 믿음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믿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수 천의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과감히 내맡겼던 것이다.
(2) 그러한 일들을 순서대로 써야 한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애를 순서대로 써야 한다는 사실들이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면, 우리 자신이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부분을 찾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를, 그만큼 더 잘 알 수 있다.
(3)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기록했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일은 우리들의 할 일을 대신해 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을 북돋워 주기 위한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4) 그가 기록해야 했던 사실들의 진실성은 그 일들을 완전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일치된 증언으로 확증된다는 것이었다. 즉 이제 누가는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2절)’에 의해 되풀이 하여 구전되어 왔던 사실들을 저술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관하여 다음의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혹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일군된 자들 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말씀을 받아들였고 또한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요일 1:1). 그들은 교사가 되기 위하여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군으로서 전파하기 위하여 받은 것이었다. 둘째, ‘말씀의 일군 된 자들’은 목격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그 사실들은 소문이나 보고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셋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던 처음부터 보고 들었다(2절). 예수께서 그의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요 2:11).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함께 다녔다(행 1:21). 넷째, 우리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이 기록된 복음은 초대 교회에서 선포되었던 복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섯째,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일들에 대하여 ‘근원부터 완전히 알고’ 있었다(3절).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일을……자세히 살핀 나도……좋은 줄 알았노니(3절). 그는 이러한 일들을 열심히 살폈다. 그는 상세한 사항들에 관하여 지식을 얻는 것을 그의 임무로 삼았었다. 그는 전승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계시로써도 그의 지식을 얻었다. 그는 전승으로 전하여진 것이면서도, 영감에 의하여 확증된 것들에 대해서 썼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 모든 일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일들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2. 누가가 본 서신을 데오빌로에게 보낸 이유 (4)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3,4절). 이 말은, 마태복음 28:18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그가 세례받기 전이나 후, 혹은 세례받으면서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배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배운 바. 그 말의 뜻은 이러하다. 가장 지각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에의 입문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가는 데오빌로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의 확실성을 알게’하고자 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확실성이 있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잘 교육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들의 확실성을 알기 위하여, 즉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과 그것을 믿는 이유를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안에 소망이 있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Ⅱ. 세례요한의 탄생 예고 1:5-25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자들은 요한에 대하여 그의 세례와 사역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자는 우리 구세주의 잉태와 출생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1. 세례 요한의 부모에 대한 설명(5)
그들은 헤롯 왕 당시에 살았다. 헤롯은 외국인이었으며, 로마의 대리인이었다. 후에 그는 유대를 로마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었다. 이것은 유다가 주권을 아주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노예가 되었지만, 그때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 사가랴였다. 아론과 다윗의 혈족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영예를 받은 혈족은 없었다. 한 가문에게는 제사장직에 대한 약속이, 다른 한 가문에게는 왕권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 그리스도는 다윗 가문의 출신이었으며, 세례 요한은 아론 가문의 출신이었다.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 출신이었다. 다윗의 시대에 아론의 혈족이 많아지자, 다윗은 그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더욱 철저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24반열로 나누었다. 그들 가운데 여덟째가 아비아 반열(대상 24:10)로서, 아론의 맏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이었다. 사가랴의 아내도 아론의 후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론의 아내인 엘리세바와 같은 이름인 엘리사벳이었다(출 6:23). 제사장들은 아주 엄격하게 그들의 가문내에서만 결혼하였다. 이제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해 살펴 보자.
(1) 그들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부부였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6절). 그들은 진정으로 그러했다. 그들의 의인임은 하나님에 의해 입증되었다. 결혼하여 서로 연합한 부부가 모두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그들은 말로가 아니라 행위로 보여 주었다. 즉 그들은 행하는 방법과 원칙으로 그것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거룩한 예배와 관련된 주의 규례대로 행했을 뿐만 아니라 선한 생활의 모든 실례들을 언급한 계명대로도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임무가 아닌 일은 결코 행하지 않았으며,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죄가 없지는 않았지만 흠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공공연하게 비난할 만한 죄로 그들을 정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정직하고 악의없이 살았다.
(2) 그들은 오랫동안 무자 하였었다(7절). 자식은 하나님의 유업이다. 그들은 가치있고 바람직한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로우면서 그러한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엘레사벳은 잉태하지 못했으며, 엘리사벳과 사가랴 둘 다 늙었으므로, 자식을 가지는 일을 단념하게 되었다. 훌륭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이삭, 야곱, 요셉, 삼손, 사무엘이 그러했으며, 세례 요한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의 출생은 더욱 돋보이며, 출생의 축복은 그들의 부모들에게 더욱 값진 것이 되었다.
2.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남(8-11)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사가랴가 하나님의 직무를 행한 방법(8절):그는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서 행했다. 그 때는 그가 섬기는 주간이었으므로 그는 직무를 행해야 했다. 그런데 제비뽑기로 각각의 직무를 맡았던 다른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사가랴도 제비뽑기를 하여 그가 섬기는 주간 동안 아침 저녁으로 주의 성소의 향을 피우게 되었다. 그 일은 향단(11절)에서 매일 향을 피우는 일이었다. 그 향단은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지성소가 아닌 성소(9절)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한사람의 제사장이 일평생 두 번 이상 분향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가랴가 성정에서 분향하고 있는 동안 ‘모든 백성은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10절). 사람들이 모두 기도하고 있는 (그들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으므로,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때 종이 울리면 그들은 제사장이 분향을 하러 안으로 들어갔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그 때에는 분향과 같은 의례가 행해질 때 영적이고 도덕적인 임무도 함께 행하도록 요구되었다. 다윗은 그가 그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단 앞에 있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서 분향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과 같았다. 셋째, 만약 우리 마음이 예배드리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넷째, 우리가 이 세상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들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리스도가 드리는 중보의 분향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고 응답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의 기도가 끊임없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다.
(2) 사가랴는 직무를 행하고 있었을 때, 하늘에서 그에게 보낸 사자를 통하여 어떻게 영광을 받았나?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11절). 이 사자는 향단 우편 즉, 사가랴의 우편에 섰다. 사가랴는 그의 오른편에 서서 그를 격려하는 선한 사자를 보았다.
(3)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사가랴는 어떻게 대처했는가(12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왔고, 생활에 흠이 없었지만,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죄인으로서의 그의 마음은 그러한 계시들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그 계시들이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
3. 천사가 그에게 전했던 소식(13-17)
천사들이 일반적으로 하듯이 그는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그의 전언을 시작한다. 아마도 사가랴는 천사를 보자 자신이 저지른 무슨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그로부터 힐책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 했을 것이다. 천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전해 주어야 할 소식을 침착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듣도록 하라.” 이제 그 소식이 무엇인지 알아 보자.
(1) 그가 종종 드렸던 기도는 이제 평온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13절). 만약 천사가 말한 것이 아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기도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전에 그가 자식을 가질 수 있었을 때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드렸던 기도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오랫동안 사가랴가 그의 아내를 위해 그리고 아내와 함께 드렸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당장 응답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하늘에 쌓이며 잊혀지지 않는다.
만약 천사가 사가랴의 “지금 간구하고 있었던” 기도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생각할 때 그 기도는 그의 직무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들의 평안을 위해, 그리고 메사아와 왕국의 도래에 대해 그들과 맺어진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드려졌을 것이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왜냐하면 네 아내가 곧 메시야의 선구자가 될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대인 저자들은 제사장이 분향하면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가 상달될 것이라고 말한다. 대체로 천사의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네가 지금 드리고 있는 기도와 네가 드리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며, 이것은 곧 네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다.”
(2) 그는 노령에 오랫동안 잉태치 못했던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아들에게 지어 줄 이름에 대해서도 지시를 받는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절). 이 이름은 히브리어로 요하난에 해당하며 우리가 구약에서 종종 대하는 이름이다. 또한 그 의미는 “은혜로운”의 뜻이다.
(3) 이 아들은 그의 가족과 모든 친척들의 기쁨이 될 것이다(14절). 그는 환영받는 아이가 될 것이며 사가랴 자신에게도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오래토록 기다려 왔던 일이 마침내 실현되었을 때, 더욱 더 기쁜 법이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14절). 만약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이 무엇이 될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들은 자녀의 출생을 기뻐하기 보다 오히려 자녀가 태어나지 말기를 원할 것이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이와 같은 의미를 전한다. “내가 네 아들이 무엇이 될지를 말하겠으니, 아들의 출생을 두려움을 가진 채로 기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는 할 수 있는 만큼,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하라.”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모든 친척들과 탄생의 복을 비는 모든 사람이 그 일을 기뻐할 것이니, 그의 출생은 집안의 영광이요 위안이기 때문이다(58절).
(4) 이 아들은 “하늘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요, 땅에 특별히 내린 축복”이 될 것이다. 아들을 얻는다는 영광은 그러한 아들을 얻는다는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1) 그는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다(15절).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면전에 그를 두실 것이다. 그는 선지자가 될 뿐더러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주 앞에 지극히 위대한 자가 될 것이다.
2) 그는 나실인이 되어 불결한 모든 것에서 떠나 하나님 편에 있을 것이다. 이것의 표시로써 나실인의 율법에 따라, 그는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평생 나실인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 되고자 하며 하나님의 탁월한 사역을 하려는, 사람은, 자기 부정과 겸손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죽이고, 마음을 혼미케 하며 교한시키는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3) 그는 그렇듯 훌륭하고 특별한 일을 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15절). 성령으로 충만해 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취하지 않고 절제해야 하며, 포도주와 소주를 삼가야 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어린 아이들이 모태에서부터 성령에 의해 영향받는다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왜냐함녀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조차 성령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자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사 46:3).
4) 그는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16,17절). 그는 이방인에게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보내질 것이다. 그렇지만 제사장의 가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모두에게 보내질 것이다.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신 주, 다시 말해서 메시야에 앞서 가게 된다. 요한은 메시야보다 앞서 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려주고,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할 것이다.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갈 것이다. ①그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되고 엘리야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세대에게 회개와 저듭남의 필요성을 설교할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대담하고 열렬하게 죄를 책망하고,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의 죄까지도 고발하여 그로 인하여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엘리야처럼 거룩한 능력과 심령으로 그의 일을 수행할 것이며 그 거룩한 능력과 심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역은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앞서 갔으며, 복음의 가르침과 의무의 본질,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를 설교하면서 복음 시대를 열어 보여주었다. ②요한은 주의 날이 오기전에 보내어 지리라고, 말라기에서 엘리야의 이름으로 예언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말 4:5). 그는 이스라엘의 많은 자손들을 그들의 주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할 것이다.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를 우리의 주시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 돌아고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통하여 죄의 멍에를 떠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아오게’할 것이다. 즉, 유대인의 마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키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이 이방인들에 대하여 가졌던 뿌리깊은 편견들을 없애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세례 요한의 행함으로부터 시작 될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의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 군사들에게도 세례를 주고 그들을 가르쳤으며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의 자만심과 확신을 고쳐 주었고, 그는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그들에게 말했던 것이다(마 3:6).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유대인들이, 그들처럼 그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인들과 함께 사귀게 될 때,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 결과 증오가 사라지고 불화가 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목하는 자들은 그의 세례로 결속되어 보다 더 친밀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요세푸스의 고대사 제 18권 7장). “그는 선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의로움으로, 유대인에게 덕행을 가르쳤다.” 또한,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들었으며, 그의 가르침을 대단히 즐거워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아버지와 자녀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또한 서로서로에게로 돌아오게 하였다. 첫째, 참된 신앙은 의인의 슬기이다. 경건해지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자 의무이다. 경건에는 공평과 신중함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둘째, 믿음이 없었고, 불순종했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의로운 자의 지혜에로 돌아올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큰 무지와 편견도 극복할 수 있다. 셋째, 복음의 가장 중요한 의도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며,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가게하는 것이다. 그결과, 세례 요한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주께 헌신하고, 주 안에서 은혜를 누리려는 사람들은 모두 먼저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데 있어서 회개에 대한 가르침 이상으로 직접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죄가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 그리스도는 가장 귀중한 분이 될 것이다.
4. 천사의 예언에 대한 사가랴의 의혹과 천사의 책망(18-20)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다.
(1) 그는 의혹에 차서 무어라 말했는가?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18). 구약에서는 늙었을 때 아이를 갖게 된 사람들의 실례가 많이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약속된 아이를 자신이 갖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징표가 주어지기를 원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 소식을 성전에서 기도하며 분향하고 있었을 때 들었음에도,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충분히 모든 의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몸과 아내의 몸이 너무 늙었다는 것만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의 자손답지 않게 그 약속에 아연실색하였다.
(2) 그의 의혹은 어떻게 잠잠해 졌으며, 그는 어떻게 그 일에 침묵하였나? (1) 천사가 그를 침묵하게 하였다. 그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라고 물었으며 이에 대하여 천사는 ‘나는 가브리엘이라'(19절)라고 말함으로써 그를 이해 시켰다. 즉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권능 혹은 하나님의 전능한 자라는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내가 지금은 여기서 너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이다. 나는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졌다. 그러니 이 소식들은 모두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너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천사는 실제로 그의 입을 막았다. “너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보라 네가 벙어리가 될 것이다. 만약 네가 믿기 위한 증거로 징표를 갖고자 한다면, 징표는 또한 너의 불신앙에 대한 벌이 될 것이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능히 말을 못하리니(20절). 너는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즉 한 단어에 두 개의 의미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음은 그가 사람들에게 형용으로 뜻을 표시했다는 것(22절)과 그들고 그에게 형용하였던(62절) 것으로 보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말했으므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는 공정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친절하고 매우 온유하며 자비롭게 대하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의심하며 믿지 못해 하는 말들을 더 이상 못하게 하셨다. 사악한 말을 할 바에야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굳게 해 주셨다. 즉 말할 수 없게 됨으로써 그는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누설하지도 자랑하지도 않게 되었다. 넷째, 그의 죄된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알맞은 때에 실현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이다. 그는 영영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이 일의 되는 날까지만 벙어리가 될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너의 입술이 열리고 네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리라.
5. 약속된 아이가 잉태됨(21-25)
(1) 백성들은 사가랴가 성전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는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내려진 축복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평소보다 훨씬 오래 지체했는데도, 그들은 축복에 대해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므로 급히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은 그가 ‘성전에 오래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고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 하고 염려하고 있었다(21절).
(2) 그는 나왔지만 ‘말을 못하였다'(22절). 그는 회중들로 축복을 안고 돌아가게 하려 했지만 벙어리가 되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3) 그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을 이해 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22절). 구약은 징조로써 이야기한다. 구약은 우리에게 형용으로 뜻을 나타냈지만 말없이 그대로 있다. 반면에 복음은 구약에서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였던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고 분명히 알게 해 준다.
(4) 그는 직무의 날들 동안에 쭉 성전에 있었다. 왜냐하면 제비에 따른 그의 직무는 ‘분향하는 것’이었고 벙어리요 귀머거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수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실 것이다.
(5) 그러고나서 그는 그의 가족에게 돌아갔으며 그 후 그의 아내가 수태하였다(23,24절). 그녀는 다섯달 동안 숨어서 수태한 일을 비밀로 하였다. 그것은 첫째, 그녀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였다. 둘째, 그녀는 낳을 아이가 나실인으로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식상의 부정한 일에 관계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셋째, 그녀가 숨어 있었던 것은 지나친 절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그것은 겸손의 표시였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영광을 자랑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넷째, 그녀가 숨어 있었던 것은 신앙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숨어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25절). 자식을 가지는 일은 유대인에게 아주 큰 축복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불임은 크나큰 비난거리였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큰 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제 엘리사벳은 승리하였다. 즉 그러한 비난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큰 영광이 그녀에게 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