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정신건강상담에서는 구원과 영적 건강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영육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육체만 건강하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병들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면서 영육으로 올바른 진리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건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구원과 영적 건강의 관계(신학적,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관점)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로서 구원을 얻고, 올바른 믿음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겠으나, 정신적인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나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중요한 부분인 이 구원과 건강을 위한 신학적, 심리학적, 정신의학적인 관점의 접근을 시도함은 의미가 깊은 일이다. IMF로 인한 경제적인 손실과 타격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의 골이 깊어가고 있고, 퇴폐와 향락의 물질문화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적인 소돔과 고모라의 현실속에서 올바른 구원관과 건강관을 형성하는 것은 이 시대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대적인 요청이요, 현실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있겠다. 깊은 영적인 성찰과 대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다 할지라도 이 것에 대한 조그마한 연구일지라도 생각해보고 찾아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곳에서는 건강이라는 단어를 병에 걸려 있는(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상태에서의 회복을 의미하는 치유라는 단어로 쓰도록 한다. 즉 치유 목회라는 단어는 병들어 있는 인격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한 제반 방법을 동원하여 영육간에 회복시키는 목회라는 뜻으로 받아 들이면 되겠다. 이는 즉 올바른 구원사역이며, 건강사역이므로 곧 구원과 건강이라는 이 주제에 부합된 단어일 듯하다.
1. 신학적 관점
성서에서의 치유는 구속적인 은혜와 그 은혜의 표현이다. 엘률은 「치유란 언제나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이다」라고 말했다. 투니어(Tournier)는 「진정한 치유란 단지 질병의 회복 단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회복 이후 계속적인 삶의 자세까지 연관시켜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자의 삶을 사는 것」을 완전한 치유로 보고 있다. 그는 「회복된 건강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은 건강 그 자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 힐트너(Hiltner)는 「치유란 단지 육체적 질병에서 치유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치유라고 할 수 없다. 치유란 온전하게 만드는 일, 다시 회복하는 일을 말한다. 방향이나 스케줄에서손상(병) 입었던 기능적 불완전성을 다시 회복하여 회복 이전 단계보다 한단계 더 발전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창1:26) 이 말은 곧 치유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는 인간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 혹은 사회적인 질환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는 온전히 만드는 일, 다시 회복하는 일을 말한다. 즉 치유는 생의 위기나, 전기 또는 시험을 이기게 하고, 도덕적 결함을 고치며, 본성적, 후천적 모든 결함이나 와해 등을 회복 시키며, 완전케 하고, 유지하며 인도하는 총체라고 하겠다.
구원과 건강의 신학적 배경을 찾기 위하여 다섯가지 범주로 나누어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 예수의 치유의 목회는 이미 예언되었던 사실이라는 것이며, 둘째, 예수께서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을 실천하셨다는 것, 세째, 예수께서 우리의 질병을 십자가에서 짊어지셨다는 것, 네째, 치유는 예수의 구원의 사역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다섯째, 예수의 부활 속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메시야에 의한 치유 사역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이다. 이사야 53장은 장차 올 메시야가 자신을 내어줌으로 죄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을 치유하여 살리심을 예언하고 있으며, 누가복음 4장에서는 그가 구약의 이사야를 읽으시며 또한 자신을 구약에 예언된 치유자 즉 메시야와 동일시하였다. 둘째, 예수는 구약의 예언된 대로 치유자의 사명을 친히 감당하셨다. 누가는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면서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치유자의 사명을 행함으로 잘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치유는 메시야 임재의 특징이었다. 세례요한이 예수의 사역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제자들을 시켜 예수에게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라고 시켰을 때 예수를 찾아간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예수는 자신의 치유사역을 통하여 메시야 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세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8:16-17)」. 예수께서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심으로 마지막 십자가의 순간까지 치유목회를 수행하셨다. 네째, 육체의 치유는 예수님의 구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의 십자가는 과거에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휴거될 때에 온전한 몸을 입는다는 것을 확신해 준다.
예수의 구속해 주심은 죄를 속하여 주시는 은혜만이 아니라 질병까지 치유해 주시는 은혜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영적 능력을 통한 육체의 치유는 전인적인 구원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치유는 예수님의 부활속에 포함되어 있다. 부활은 기독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는 이런 부활의 기록이 없다. 부활하신 예수를 마음 속에 영접한 사람은 부활의 씨를 가지게 되어 그 부활의 씨가 치유의 근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완전한 건강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이 우리의 육체속에 파동칠 때 온전한 치유가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치유를 통하여 대속의 은총을 허락 하신다. 그는 전인 치유의 대의사(Total Healer)로서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완전한 개인으로서의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의 치유는 풍성한 삶을 주실 뿐 아니라(요10:10)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잃어버린 인간을 회복시키는 선교였다. 즉 육체와 영혼을 함께 치유하시면서 어느 한 면도 간과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전인성을 치유하여 주셨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치유와 죄사함의 선포를 하시거나 다시는 범죄하지 말것을 경고하심으로(눅5:20, 요8:11) 육체 및 그 육체에 속한 악한 세력까지 소급하여 승리를 선포하심으로 전인 치유를 이루셨다.
예수의 치유 사역의 또 하나의 특성은 제자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계속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의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들린 자를 바로잡고 앉은뱅이와 반신불수를 일으켜 세우라고 명령하시고 실제적인 권능도 주심으로 그의 치유 사역이 계속 되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마10:7-8 ; 막3:14-15) 이런 놀라운 능력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실제로 나타났으며 지속되어온 것이 사실이다(행2:33, 4:30).
성경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전인적으로 구원과 건강의 자리에서 완전하게 있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본인 자신이 행하시며 인도해 주셨다. 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본 구원과 건강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올바른 구원은 건강한 크리스챤을 만든다고 단언할 수 있다.
2. 심리학적 관점
심리학이 그리스도인들을 곁길로 가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리도인들 역시 여전히 심리학적 측면에서도 보아야 하는 존재들다. 불교신자들이나 힌두교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각 사람의 영혼이 값지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심리학의 눈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단지 그것이 인간의 영적 목적을 부인할 경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자아를 찾도록 도와주는 일에는 못미칠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눈을 통해서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부딪칠 때에라야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심리 치료는 전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증강시켜 준다. 정서적 문제가 모두 영적 문제는 아니며, 심리 치료는 성경적 개념이다.
첫째, 성경 자체는 그러한 분야의 존재와 필요를 인정하고 있다.
둘째로, 성경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영적 선물들을 주셨는데, 이중 하나는 병 고치는 은사이다.
셋째, 그것이 사실상 상호적인 의사 소통 방법을 마련해 주는 반면 설교나 성경은 일반적으로 일방적인 의사 소통 방법이다.
성경은 죄악의 병에 대한 교과서이다. 반면 정서적인 병은 인간 관계와 관련되어 있는 왜곡 상태, 상처, 좌절 등을 다루고 있다. 더우기 성경의 진리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과 교통한 것은 아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나, 이 진리 가운데 많은 것들은 성경에 있는 진리의 범위 바깥에 있다.
심리 치료가 정당한 권리를 갖는 또 하나의 주된 이유는 그것이 다른 지식 수준이 공급하지 못하는 어떤 특정한 요구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모든 병에는 그에 합당한 처방이 있으며, 심리 치료는 다른 방법으로 채워질 수 없는 어떠한 요구를 채워준다는 점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심리 치료는 죄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해준다. 또한 심리 치료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다른 큰 필요들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는 수단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모든 질병은 악에 뿌리를 박고 있으나, 죄의 결과들을 다루는 데에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있다. 정서적인 병의 원인 및 치료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원죄의 보편적인 영향으로 사람들은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상은 불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 죄는 인간의 정서적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으나, 그 사람의 특정한 죄가 그의 모든 정서적인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죄의 개념은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죄의 존재와 영향을 인식하고 있다. 연약한 에고를 지닌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든데, 신학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과 신학은 동전의 앞, 뒷면처럼 이런 견해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정서적 및 영적 성숙 역시 이러한 관계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행하실 때에 반드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심리학과 그 치료에 정당한 권리가 있다면 훈련받은 카운셀러들은 필요한 변화를 제공함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연결의 역할을 한다. 이 때 전문적인 상담은 주체성을 명백히 해 주며, 현실을 보는 눈을 수정하여 준다. 이러한 개인상담의 필요성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나, 비록 「주님만을 의지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때 심리학을 잘 사용할 때 구원과 건강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떤 학문이든지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겠지만 심리학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시켜나가면서 구원을 이뤄가는 것은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3. 정신의학적 관점
의학과 질병의 유기적인 관계를 언급하자면, 먼저 질병은 부모에게서 받은 공포와 정신적 번민 즉 개인 문제에서 시발하고 있다. 과거의 크나 큰 충격과 그 사실을 무마시키려는 의식의 갈등이 표출됐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보다 큰 문제점은 고민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상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가 다음에 겪을 불행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며 개인 문제의 깊이까지 고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의술이나 약은 기도와 믿음과 모순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학적 지혜나 의술을 가진 인간을 사용하시어 병자를 고치시기도 하신다. 의술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과정에 대한 끝없는 연구의 참여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를 인류의 육체적 치유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병원, 최신 의학기술 그리고 복잡 다단한 제약법들은 병든 사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분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믿는 자들이 의사와 약의 도움을 받을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복용하라고 말했다(딤전5:23). 예수님은 의사들과 약을 합당한 수단으로 인정하셨다(마9:12; 눅10:25-37). 그러므로 우리가 아플 때, 우리는 우리의 건강이 전적으로 의사들에게 달린 것처럼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회복이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달린 것처럼 계속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와 약이 한계를 갖는 때에라도 믿음과 기도는 계속될 수 있다.
의학의 진정한 의도는 “인생 상담”이 아니라 병든 자를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줌으로써 환자가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 새로운 생활의 길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하신 바를 깨달아서 그에 순종하는데 요구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하려는 데 있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심령의 전이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먼저 자신의 행동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고, 행동 과정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정신의학의 목적은 인간을 건강한 진정한 남자와 여자로 만드는 데 있다. 즉 창조자의 뜻하신 대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정신의학의 필요성은 과학이 마련한 기술분야와 영혼 문제에 관한 상식을 보완하여 인간을 올바로 이해하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활력을 주며 그의 의식을 깨워주고 환자를 인간답게 살도록 해 주는 직분을 맡은 자로 볼 수 있다. 즉 질병을 치료하기 보다는 인간 전체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역자는 참다운 정신의학자이기도 하여야 하겠다.
나가는 말
인간들은 인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생각과 방법대로 치료할지 모르나, 근본문제가 존재 자체의 문제이므로 이 존재 자체의 문제는 존재의 근원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며, 존재의 근원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므로 인간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의존 되어야만 한다. 투니어는 인간의 근본적인 치유 방법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며 하나님이 인간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며,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김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관하시도록 할 때, 인간은 삶의 자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자존심이나 독립심은 포기되며 영적체험을 통해 놀라운 평화속에 건강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하고 있다.
치유는 하나님이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치유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러나 치유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들었을 때 약을 먹고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 같이,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 영혼만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포함한 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치유는 예수님의 선교사역의 절대 필요한 요소였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말씀선포(preaching)와 가르침(teaching) 그리고 치유(healing)가 본질적인 부분이었다(마4:23).
그런데 현대교회는 말씀선포와 가르치는데는 신실하지만 치유사역은 소홀히 하는 경향도 있다. 한 인간의 아픔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뿐만이 아닌, 정신적, 영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가정과 사회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어 간다. 그러므로 병든 상태에 있는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한 치유사역은 말씀 선포와 가르침 못지 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을 돌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치유사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이 감소되고 상처가 아물어져 가는 것으로 기뻐하면서 보살피는 것이 치유사역이다.
현대 교회가 성장과정에서 조직화, 제도화 그리고 대형화 되어 가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깊이 병들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교회는 예수의 사역을 계속하는 사명을 맡은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에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목회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을 이어 받는 일이기 때문에 치유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목회의 모든 일들을 치유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행해져야 한다. 말씀 선포와 가르침은 치유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결국 목회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회복시키며, 하나님과 역동적인 관계를 가지게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건대, 구원과 건강과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건강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구원관을 확립하고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로 서 있을 때만이 올바른 건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자유다. 모든 것에서 억눌리지 않고, 참으로 자유로운 것. 또한 자유로운 것이 바로 건강한 상태이다. 이렇게 온전한 구원 안에서 자유로운 건강의 상태를 유지하며 나가는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우리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