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장 설교 말씀은 비밀로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말씀한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감추어 놓고 선택한 백성에게만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님을 아는 지혜이다. 복음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에게 예수님을 깨닫는 지혜를 주셨다.
Ⅰ. 복음 전도에 대한 바울의 태도 2: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처음 그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하였는가를 상기시킨다.
[1] 2절에서 그는 자신이 밝히고자 하는 사실과 주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신인(神人)이신 그의 인격과 직무로서 그리스도는 복음의 총체요 본질이 되시며 복음 사역자들이 전하는 내용의 대주제가 되시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귀찮을 정도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을것이다.
[2]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소극적인 면으로 볼 때 그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1절). 즉 그의 (내)말과 그의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4절). 그는 좋은 표현으로 귀를 즐겁게 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고상하고 재치있는 언변으로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매혹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언변으로 수식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적극적인 면에서 볼 때 그는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였다(1절).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파했다.
인간의 화술이나 철학적인 재주나 논증은 하나님의 권위로 천거되는 것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3,4절). 고린도 교회 내의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에 대하여 매우 경멸적으로 말했다. 즉 ‘저희 말이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고후 10:10). 그는 아마 체격이 왜소하고 목소리도 작았던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결코 평범한 연설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는 용기나 결단도 필요치 않았으며 그의 대적자들로 인하여 두려워 떨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잘난 체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반대자들 같이 거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실한 사역자들의 두려움과 떨림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의 원인은 그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권위 있게 외쳤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평이하고 쉬운 말로 전했다. 그는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만 복음의 교리를 전하고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를 입증하시도록 의탁했다.
[3] 5절에는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 목적이 언급되어 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절). 즉 그들이 인간적인 동기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지 않도록 하며 쓸데없이 인간적인 논쟁들에 휘말리지 않도록 함이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신령한 능력으로 전파되었을 때에만이 그 성공의 결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돌려지는 것이다.
Ⅱ. 참된 하나님의 지혜 2:6-16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가장 진실하고 고귀한 지혜의 보물을 전했음을 말한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6절). 복음의 교리를 신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면밀히 상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안에서 참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우리가 전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참 지혜인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지혜가 무엇인가를 바로 판단한다.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이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6,7절). 즉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신령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이 발견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받을 수도 없는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세상의 판단과 그 얼마나 다른가! 그가 가르치는 지혜는 이 세상에서 통하는 관념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7절). 그 지혜가 이제는 드러났지만 그 깊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측량할 수 있다. 이제 이 지혜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1. 이 지혜의 생성과 기원(7)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것을 계시하시고 알리기로 작정하셨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즉, 사도들과 전 기독교인들 모두의 영광을 위하여 나타내신 것이다. 사도가 이 지혜의 계시를 위탁받은 것은 큰 영광이다. 또 그리스도인이 이 영광스런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위대하고 명예로운 특권이다. 그리고 복음이 일러주는 하나님의 지혜는 장래의 우리의 영원한 영광과 행복을 예비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명예와 영광은 얼마나 큰 것인가!
2.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세상 위인들의 무지(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8절). 이것은 주로 로마의 통치자들과 유대나라의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이시다. 그가 마음을 받았던 것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들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불경스런 손을 움츠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 23:24).
3. 계시 없이는 알지 못하는 지혜(9)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이 지혜는 계시 없이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자기를 앙망하는 자들’은 70인역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자들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며 기다리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일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있다. 이 복음의 위대한 진리는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영역밖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계시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영역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계시의 빛에 의지하지 않고는 찾을 수 없다.
4. 이 지혜를 우리에게 알려 준 성령(10-12)
우리는 누가 이 지혜를 우리에게 일러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도 똑같은 성령의 감동에 힘입어 말했다. 그러므로 그가 가르친 내용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하나님을 나타낸 것이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1절). 여기서 성령의 신성에 대한 증거가 두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로 그는 전지(全知)하시다. 즉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고 하나님의 가장 깊이 숨겨진 지혜도 꿰뚫어 보신다.
그렇다면 하나님 이외에 누가 하나님의 지식을 그처럼 철저히 알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언급은 사람 속에 사람의 마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속에 성령이 계신 것을 알게 한다. 또 사람의 마음이 사람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이 성령도 하나님과 매우 밀접하게 하나로 존재한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과 일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안다. 이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과 목적을 알 수 없다. 사도들이,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성령에 의해서 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이 모든 것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즉, “복음의 위대한 특권들”을 우리가 아는 것도 성령의 은혜로운 조명에 의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령을 받기까지는 구원의 목적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수 없다.
5. 이 지혜가 가르쳐진 방법(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절). 사도들은 그들이 가르칠 지혜를 성령께 받았었다. 그들은 이 지혜를 가르칠 때 가식적인 인간의 생각으로 오도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사실 그대로 선언하고 성령께 의지하여 가르쳤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나 달변으로 장식할 필요가 없으며 성령이 가르치는 말씀으로 할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즉, 계시의 한 부분은 다른 부분에 의하여 밝혀진다. 영적인 일들은 함께 모아졌을 때 서로 서로 조명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학문이나 재주로 계시를 시험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못 판단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언어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6. 이 지혜를 받는 방법(14-16)
[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14절). 첫째로 부패한 죄의 세력 아래 있는 사람과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어리석은 것이다. 악한 경향과 사악한 권세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를 꺼리게 한다. 사람이 진리를 분별하는 데는 반드시 거룩한 진리의 영이 밝은 조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인은 깨달을 수 없다.
둘째로 자연인 즉 세상의 지혜 있는 자(고전 1:19,20), 세상의 지혜자(고전 2:4-6), 믿음으로는 아무 것도 받으려 하지 않는 자, 초자연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의 이러한 태도는 바로 그 당시의 철학과 헬라적 학문과 지혜의 명백한 특성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계시는 학문의 원리가 아니다. 그들은 계시를 몽상가의 허망한 생각으로 여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계시된 지식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진리는 오직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다.
[2]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거룩하게 된 사람은 인간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향기를 품고 있다. 거룩한 미를 진정으로 분별하는 것은 성화된 심령이다. 또 이들은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일에 대하여 분별할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소유할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은 자연적, 초자연적 그리고 인간적, 영적인 모든 일들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누구에 의하여 판단 받거나 헤아림을 받지 않는다. 육의 사람은 그가 영의 일을 모르는 것과 같이 영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도 모른다. 영적인 사람은 관찰 대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신령한 자’는 일상적인 일과 영적인 일 모두를 판단할 수 있다. 그는 계시 위에 신앙의 터전을 두었으므로 이성의 능력을 상실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 즉 아무도 그를 논박하거나 판단 할 수 없다. 학문적인 원리와 단순한 이성의 빛 위에 선 사람은 계시의 진위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16절). 누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 감화를 입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깊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까? 자연의 힘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자는 없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특권이다.
Ⅰ. 고린도 교인들의 육적인 면 3:1-4
[1]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악함을 책망한다(1,2절). 영적인 새 생명을 얻은 사람도 아직은 많은 면에서 결함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1절). 이것은 그들이 움직이고 부패한 생각의 지배 아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기독교의 초보적인 원리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받았으나 아직 성숙하게 장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복음의 더 깊은 것들을 전하지 못했다. 그들은 고기와 같은 단단한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젖으로 양육을 받아야 했다(2절). 말씀을 듣는 자들의 능력을 파악하여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가르치는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의 의무이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장성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이 그리스도 안의 어린이들도 장성하기 위해 노력하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와 지식에 있어서 성장하려는 노력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책망을 받아야 한다.
[2] 사도 바울은 그들이 육에 속해 있음을 책망하고 그것에 대한 증거로 사역자들로 인한 분란과 불화를 언급한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4,5절). 신앙으로 인한 분쟁과 싸움은 육적인 잔재가 남아 있다는 슬픈 증거이다. 참된 신앙은 사람을 화평케 하지만 불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오. 인간의 일반율을 훨씬 능가한 위치에서 살아야 할 기독교인들이 보통 인간의 수준에서 그들과 별다른 것 없이 행동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