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설교 말씀은 바울이 할례를 금지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말한다. 율법주의 신앙은 믿음이 아니라 할례를 행하므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성령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Ⅰ. 갈라디아교인에 대한 권고 5:1-12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으며 모세의 율법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이제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1절). 우리는 복음 아래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롭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된 것이다. 즉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 자유 안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1] 그들이 의를 위하여 할례에 복종하고 율법에 의지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모든 유익을 상실하게 된다(2-4절). 사도 바울은 엄숙하게 이점을 선포하고 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그는 3절에서 되풀이하여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할례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 점에 대한 바울의 의도는 4절부터 나오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이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한다고 표현했다. 그리스도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은혜가 떨어진 자들에게 아무 효력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진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율법 전체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복종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그들의 소망을 율법 위에 둔다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또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구세주가 되려 하지 않으신다.
[2] 바울은 그들을 확고하게 설득하고자 그 자신의 실례를 들어 그들의 소망에 대해 알려 준다. 성령으로 믿음을 쫓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절).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의의 소망’이다. 우리들은 이 의의 소망으로써 죽은 후의 다른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 의의 소망은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대상이며 그 어떤 것도 이 의의 소망보다 크지 않다.
그런데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얻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그 의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2) 그들은 이 행복을 어떻게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곧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야 한다. (3) 그들은 무엇을 통해서 이 의의 소망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것은 곧 성령을 통해서 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와 지시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고 그들에게 말한다(6절).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이제는 어디에서도 할례자나 무할례자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더 유익하거나 더 악하지 않으며 또 어느 한쪽에 의해 하나님에게 천거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한다. 즉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어떤 것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참된 믿음은 실제로 유효한 은혜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며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는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된다.
[4] 바울은 그들의 신앙적 퇴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믿음을 갖기 시작했을 때의 신실성을 상기시킨다(7절).
1) 그들은 달음질을 잘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주와 같다. 그들이 상급을 얻기 위하여는 잘 달려야 할 뿐 아니라 계속 끝까지 달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경주를 함에 있어서 단지 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잘 달려야 한다. 갈라디아인들은 잠시 동안은 그렇게 하였으나 도중에서 이탈하거나 힘이 빠져 비틀거리게 되었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누가 너희를 막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이 직접 대답하게 했다. 물론 바울은 그들을 방해한 자들이 누구며 무엇이 그들을 방해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자문자답하기를 원했다. 신앙 생활을 올바르게 시작하여 잠시 동안 잘 달렸던 사람들이 이제 그들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잘 달리다가 그 길에서 벗어나거나 그 길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초신자들은 사단이 그들의 진로를 변경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복음에 순종해야만 하며 또 그들의 삶과 소망이 이 복음의 지시에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 진리는 믿어야 할뿐만 아니라 복종해야 하며 또 진리의 빛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과 능력도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올바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것이다.
[5] 바울은 유익하지 못한 설득으로부터 그들이 벗어나도록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있다(8절).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나 사도 자신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칭의와 구원의 길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 권면은 또한 사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할례를 반대해왔고 또한 할례를 주장하는 설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할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가르침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 할례에 대한 가르침이 그의 매개자에게서 기인된 것임이 틀림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은 그 가르침을 거절하고 또 그들이 이전에 깨달았던 진리 안에서 모든 진리를 확고부동하게 지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6]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나쁜 영향이 파급시키는 위험을 논증함으로써 거짓 교사들을 추종하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그 교훈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이 있음을 그들에게 확산시키기 위하여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한다(9절). 전 기독교 사회가 한 사람에 의하여 오염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는데 유념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열심으로 전염시켰으며 갈라디아 교인들 중 몇 명이 유혹되었던 그 교리는 기독교 자체를 전복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치명적인 영향을 생각한 그는 그것들을 가볍게 그리고 무관심하게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7]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0절).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와 같은 마음을 품게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그들이 인정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대단히 우려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최대의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을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죄와 실책을 훈계함에 있어서 우리들은 지도자와 지도받는 사이를 항상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책망하면서도 그들의 잘못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졌던 반면 그들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데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심지어 제하여지기까지’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구원의 모든 소망으로부터 제하여지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의 훈계하는 사람에 의하여 제하여지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침식시키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증거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8]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이러하다. 그는 이 갈라디아인들이 유대교적 경향을 띈 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표현한다. 이 거짓 교사들은 바울 자신도 할례를 전하는 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거짓 교사들이 그를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한 사실은 그가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11절) 이라는 그의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을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했던 그들의 말에 전적으로 반박한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파하였더라면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라고 말한다. 이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만일 그가 그들의 말에 동의하였다면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그들의 호의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들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그가 비난 받게 된 그 교리를 전파해왔으며 그로써 비롯된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해왔던 것이다. 만일 그가 유대인들에게 굴복하였더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다.’ 그는 진리를 부패케하고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 자신의 안일과 명예와 생명 자체까지라도 포기하기를 원했다.
Ⅱ. 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 5:13-26
바울 사도는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하고 실제적인 경건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1]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13-16절).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투어서는 안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그들을 주의 깊게 경계시키고 있다(13절). 그는 그들에게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신 것이지 율법의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굳게 서야 하지만, 그것을 그리스도의 자비를 깨뜨리는 것으로 고집해서는 안되며 서로를 향하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려고 하는 성품을 항상 지녀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다. (1)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14절). 사랑은 모든 율법을 총괄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분명해진다(요 13:35).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불행한 알력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경우 적어도 그 당사자들에게는 중대한 파국이 임하게 될 것이다. (2) 서로 다투는 것은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절). 만일 형제 가운데 서로 분쟁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함께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분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그 자신들의 손으로 파멸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짐승과 같이 서로 물고 먹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은혜를 거절하시고 사랑의 성령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시며, 또한 악령이 지배하리라는 것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2] 가장 위험한 대상인 죄악에 대항해야 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고한다(17-26절).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싸움을 멈추고 죄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그것은 교회에 대한 축복이 될 것이다. 죄야말로 우리 모두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대상이다.
1) 모든 사람에게는 영육간의 투쟁이 있다(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느린다. 반면에 성령(우리 안에서 새로워진 부분)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반면에 성령(우리 안에서 새로워진 부분)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자연인들에게도 이와 같은 투쟁이 있는 것과 같이(양심의 확신과 타락한 마음 사이의 투쟁) 거듭된 사람에게도 옛 본성과 거듭난 본성 사이에는 투쟁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와 같은 투쟁을 각오해야 한다.
2)우리는 더 옳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편에 서서 우리의 욕망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이 일방적인 법칙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법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 바울이 이곳에서 우리에게 명한 이 의무는 복되신 성령의 인도와 영향하에서 행동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들의 타락한 본성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지 못할 지라도, 또 그 타락한 본성이 우리 가운데 남아있을지라도 우리가 성령을 의지한다면 그 본성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죄의 독성을 없애는 가장 좋은 해독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로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다(18절). 만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 경향과 방향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비록 지금도 여전히 죄의 명령과 세력 가운데 있을지라도 율법으로 정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3] 바울은 육체의 일과 소중히 생각하여 결실을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에 대해 자세히 열거하고 있다(19절). 그는 먼저 육체의 일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 육체의 일은 다양하면서도 분명하다. 어떤 죄는 ‘음행 간음 더러운 것 호색’ 등과 같은 제 7계명에 대한 죄가 있다. 그런가 하면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새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같이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죄도 있다. 이와 같은 죄는 때때로 명성과 평판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까지도 해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또 다른 죄로서는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죄가 있다. 이와 같은 죄에 대해서 바울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를 상술하고 있다(22,23절). 육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에 죄를 육의 일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그 이유는 열매가 뿌리에서 기인된 것과 같이 은혜는 전적으로 성령에 기인되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명령한다. 첫째로 사랑과 희락을 명하는데 우리들은 이것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서의 변함없는 기쁨을 이해하게 된다.
둘째로 화평을 명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화평 혹은 다른 삶에 대한 평화로움을 의미한다. 셋째로 오래 참음과 자비를 명하는데 이는 친절함과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의 너그러운 태도를 뜻한다. 넷째로 양선을 명하는데 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려는 태도이다. 여섯째로 온유를 명하는데 이는 쉽게화를 내지 않는 것이며 설사 화가 났다 해도 곧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절제를 명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그는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죄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하였다. 즉 성령이 그들 가운데 거하는 동시에 그들이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욕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와 같은 것으로 적지 않은 방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완전히 파멸을 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에 변함없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죄의 종으로 굴복시키는 그런 자들을 결코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선한 행동을 하도록 배워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우리들은 육의 일을 거부해야 할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일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중대한 관심거리이며 노력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서 육의 일을 거부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바울이 나타내고자 한 의도임은 다음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스도의 영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임을 바울은 4:6에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실을 보여야 하며 선한 행실로써 우리의 선한 행동 원리를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육체의 일을 억제하고 새 생명에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사도는 교만과 시기를 경고함으로써 5장을 결론 짓는다. 그는 여기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헛된 영광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서로를 시기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헛된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져야 할 사랑과 모순되는 불화와 싸움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을 경계시키고자 한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야 한다. 첫째,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헛된 영광이다. 그 영광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지나친 관심은 불행한 투쟁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다툼의 큰 요인이 된다.